레이디호크, 고독과 의지에 대한 어른의 동화

레이디호크, Ladyhawke, 1986, 미국

by 쿨씨와 씨바

영화 레이디호크(1985)는 중세 판타지 로맨스로 분류되지만,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이 작품은 저주로 인해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사랑과 구원, 그리고 인간의 의지를 깊이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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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이렇다. 기사 나바르와 이자보는 깊이 사랑하는 연인이었지만, 추기경은 이자보를 욕망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자 추기경은 분노했고, 마침내 두 사람에게 무시무시한 저주를 내린다. 낮이 되면 이자보는 매로 변하고, 밤이 되면 나바르는 늑대로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늘 곁에 있으면서도 단 한순간도 인간의 모습으로 마주 설 수 없게 된다. 이 비극적 구조가 바로 영화의 가장 큰 매력으로, 항상 함께하면서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아이러니가 관객의 마음을 붙잡는다.


나바르는 고독한 기사다. 그는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처럼 운명에 맞서 싸우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끝없는 고독과 분노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의지다. 이자보 또한 고독을 견디며 희망을 잃지 않는다. 두 사람의 사랑은 결국 인간의 존엄을 증명하는 의지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두 조력자 때문이다. 도망자 필립은 우연히 두 연인의 저주에 휘말리며 관객의 눈이 된다. 그는 처음에는 목숨만 부지하려는 겁쟁이에 불과했지만, 점차 나바르와 이자보의 사랑에 감화되어 그 사랑의 증인으로 성장한다. 그의 위트와 인간적인 시선 덕분에 영화는 무거움 속에서도 숨을 쉬며, 관객은 판타지를 현실의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 다른 조력자인 신부 임페리우스는 추기경에게 두 사람의 사랑의 고해를 알린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는 버려진 성에서 긴 세월을 고독하게 보내며 속죄하고, 마침내 두 연인의 저주를 풀기 위해 헌신한다. 임페리우스의 이야기는 인간이 비루함을 직면하고 성찰할 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비루함’이라는 감정을 떠올릴 수 있다. 철학자 강신주는 ‘비루함’을 '슬픔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으로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할 노예의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의 단편 <무무>를 예로 들며 이 감정을 풀어낸다. 주인공 게라심은 여주인의 유능한 농노이다. 거구에 청각 장애를 지닌 그는 농노들 사이에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여주인은 게라심이 사랑을 알게되자 게라심이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없애려고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농노에게 주인의식을 싹틔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라심은 사랑하는 강아지 무무를 스스로 죽이기로 결정한다. 이 사건은 끔찍한 비참함이지만 게라심은 끝내 비참해진 것은 아니다. 게라심은 무무를 만나기 전에는 외톨이였지만 무무의 죽음 이후로는 홀로 살며 어떠한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고 어떠한 개도 키우지 않았다. 타인에 의해 강요된 고독을 벗어나 자발적으로 고독을 선택함으로써 노예 상태의 비루함을 극복하고 존엄을 지킨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신들의 벌로 거대한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지만, 정상에 다다르면 바위가 굴러 떨어져 다시 처음부터 반복해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가장 무의미하고 비참한 형벌이지만,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그를 “행복한 인간”이라 불렀다. 시지프스가 자신의 형벌을 자각하면서도 매 순간 바위를 올리는 선택을 스스로의 결단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게라심과 시지프스는 스스로 구원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 것일까? 나는 구원에 가깝다고 본다. 둘의 처지와 조건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들은 나아갔기 때문이다. 여전히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선택할 수 있는 외로운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고양되었다. 일종의 슬픈 구원이다. 그들이 나아갔는가 머물렀는가, 즉 구원인가 회피인가를 판단하는 데 씨바가 큰 도움을 주었다. 정신승리와 회피를 가르는 다섯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내가 붙잡은 해석이 나를 더 움직이게 하는가, 아니면 멈추게 하는가?

→ 정신승리는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회피는 정지 상태에 머물게 해.

2. 지금 내가 위로받는 방식이 문제 해결에 작은 실마리라도 주는가?

→ “다음엔 더 잘할 수 있다”는 정신승리는 해결로 이어지고, “어차피 안 돼”는 회피로 이어져.

3. 내가 만든 의미가 나 혼자만의 감정 달래기에 머무는가, 아니면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가?

→ 건강한 정신승리는 공감과 지지를 부르고, 회피는 자기합리화로 고립돼.

4. 이 상황을 떠올릴 때, 시간이 지나도 부끄럽지 않을까?

→ 진짜 정신승리는 시간이 흘러도 자랑스러운 ‘내 방식의 해석’으로 남아.
반대로 회피는 뒤돌아보면 후회와 자기비난을 불러.

5. 내가 선택한 위로가 나를 더 존엄하게 만들고 있는가?

→ 존엄을 살리는 건 정신승리, 자존심만 지키려는 건 회피.


이런 맥락에서 레이디호크의 인물들은 모두 비루함에서 출발한다. 나바르는 더이상 삶을 지속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추기경을 죽이기 위한 여정을 준비하며, 필립은 거짓말로 연명하는 소매치기였고, 임페리우스는 죄의식에 눌려 있었다. 하지만 네 사람 모두 끝내 각자의 의지로 구원을 얻는다. 나바르와 이자보는 사랑의 의지, 필립은 숭배와 증언의 의지, 임페리우스는 속죄의 의지를 통해 변모한다. 결국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의지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열리지 않는다.” 어느 드라마의 대사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고독과 비루함을 직면하고 받아들였기에, 그 끝에서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괴테 『파우스트』의 구절은 이 영화를 가장 잘 요약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끌어올린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란 이성(異性)이다. 파우스트에게 이성은 여성이었기에 '여성적인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적인 것'이란 사랑을 의미한다. 즉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다. 나의 대학 시절, 존경하는 교수님이 학기의 마지막 강의에서 하신 말씀이다. 나바르와 이자보의 사랑, 필립의 숭배, 임페리우스의 속죄는 모두 사랑에 기반하며 우리를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비루함에서 존엄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끌어올린다. 그래서 레이디호크는 단순한 판타지 로맨스가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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