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삼 남매를 낳았다. 언니와 남동생 그리고 나. 아들을 갖고 싶었던 아빠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하고 둘째로 태어난 나는 늘 부모의 온기를 갈망했다. 언니와 엄마가 나의 세계 던 어린 시절을 지나 가족보다 친구들이 좋았던 청소년기를 보냈다. 남들처럼 그럭저럭 졸업하고 연애했다. 그저 나란 인간은 사람들에 떠밀려 의미 없이 흘러갔다. 디자인과를 나와 디자이너 일을 시작했다. 말이 디자이너지 동대문을 왔다 갔다 하는 심부름꾼 수준의 일이었다. 새벽반 종로어학원을 다니며 일본어를 배웠다. 의류무역회사에 입사했다. 회사는 내가 나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그렇게 나는 소진되고 닳아갔다. 일본어는 점점 늘었고 바이어들은 나를 찾았다. 마음의 여유는 점점 줄었다. 회사에서 한 달에 한번 복지 혜택으로 영화 관람을 했는데 그날도 업무가 많았다. 뒤늦게 택시를 타고 왕십리 CGV에 갔다. 택시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지금의 남편인 남자친구에게 ‘일 중독자’라는 말도 들었다. 열심히만 하면 핑크빛 미래가 있을 것 같았는데 아이러니하게 택시 안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상사들의 모습이 나의 미래의 모습이라면 좀 끔찍하다.
부장, 팀장으로 사는 중년의 삶은 두근거리지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몸은 안정된 생활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을 좋아했지만 마음은 자유롭고 싶었다. 회사는 퇴사 순간부터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남들처럼 서른을 넘기지 않고 혼기에 맞춰 결혼을 했다. 나도 엄마처럼 삼 남매를 낳았다. 첫째를 낳고 복직을 하지 않았다. 다시 신 대리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복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다. 무역 3팀에서 당당히 일하던 나는 없고, 꺼지지 않은 배가 불룩한 초보 엄마의 모습만 남았다. 출산 휴가는 3개월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출산 일주일 전까지 일을 한 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남산만 한 배를 하고도 출근하는 나를 보며 관리팀 여자 부장님이 '뱃속에 있을 때가 좋은 거야' 라며 너스레를 떨며 하신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당시에는 전혀 몰랐다.
몇 년 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을 읽는데 주인공 김지영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 여자의 삶이란 아이를 낳고 360도 바뀐다. 산전 요가나 브라이덜 샤워 대신 부모 수업을 했어야 했다. 부모가 되는 일은 자기중심에서 타인 중심의 삶을 사는 일인데 너무 준비 없이 엄마가 되었다. 탄생은 축복이라는 공식은 표면적인 공식처럼 느껴졌다. 아이를 낳고 비로소 나는 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호가 영아산통으로 밤새 울면 같이 밤을 새우고 아침에 잠이 들었다. 눕히면 깨는 등센서를 가진 아기를 아기띠에 넣어 메고 엉덩이를 토닥이며 몸을 흔들었다. 손은 아기의 엉덩이에 눈은 모니터로 향했다. 그 시절 유행하던 <그레이 아나토미> 시리즈를 정주행 했다. 아이가 잠을 자면 잠시 눕히고 일기를 썼다. 빨간 스프링노트 한 권이 채워질 즈음 지호는 생일을 맞았고 곧 통잠을 잤다. 그때 빨간 노트가 유일한 나를 위로해 주는 친구였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나는 언니와 계양산 아래 작은 야외 수영장에 갔다. 꽃이 달린 입체 수모를 쓰고 원피스 수영복을 입었다. 튜브는 없었다. 발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나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허우적거렸다. 그 후로 물공포가 생겼다. 수영장 근처는 얼씬도 안 했다. 셋째를 낳고 나는 본격적으로 수영을 시작했다. 서아를 낳고 친정엄마가 6개월 정도 막내를 봐주셨다. 엄마 덕분에 새벽 수영을 꾸준히 나갔다. 결혼 전 회사 근처 충무아트홀에서 1년 가까이 수영을 배웠지만 물에 뜨기까지 6개월 넘게 걸렸다. 그때 나는 뭐든 배우는 데 빠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영은 아직도 하고 있다. 빠르게 배우는 재능은 없지만 꾸준하게 한다. 물속의 고요함을 좋아했다. 수영을 하면 현실의 소란을 잊을 수 있었다. 달리기가 내게 없던 시절 나는 매일 새벽 하루라는 수영장에 내 몸을 던졌다. 그러다 코로나가 찾아왔고 수영장은 기약 없이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