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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석 Apr 04. 2022

[박대석 칼럼] 윤정부 '미화고정환율제' 는 경제 묘약

제조업 강국, 집값 안정, 경제 지속성장에 환율이 가장 큰 위험

미국 달러 고정환율제 (필자 명명)


제조업의 경쟁력은 일반적으로 기술과 가격이라고 말하지만 절반만 맞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을 제외한 한국 같은 나라에서 제조업의 가장 큰 위험(변수)은 환율이다. 제조업 등을 포함하여 한국 경제가 지속 성장하려면 환율 리스크를 없애주거나 헤지(hedge)해주어야 한다. 필자가 오랫동안 분석한 결과 제조업 강국으로 지속하여 발전하려면 안정적인 환율이 절반을 채워주어야 한다.


이 문제만 해결하면 한국의 제조업은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고 금리정책을 효율적으로 펼칠 수 있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 또한 금리 운영에 완충 폭이 커져 집값 안정, 가계부채 축소, 물가안정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정답은 이름하여 '미국 달러 고정환율제(필자 명명)'로서 한국 환율을 미국 달러화에 고정하면 된다. 고정환율은 매년 미국과 한국의 물가 등을 고려하여 연(年) 단위로 정기적으로 변경하거나 특수요인이 발생할 경우 변경할 수 있게 하면 된다.


한·미동맹을 공고히 하려는 윤석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미국과의 포괄적 동맹관계인 미국 역시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이 환율제도 하나로 한국은 단숨에 준기축통화국의 지위를 얻을 수 있고 글로벌 패권 동맹국으로 홍익인간의 이상을 펼칠 수 있다. 이미 한국과 미국은 통화스와프(Swap)를 하고 있는데 이를 질적으로 확대하는 일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빈곤 농업국에서 산업화를 통하여 제조강국, 무역대국의 기틀을 만들었다. 한강의 기적이다. 그 이후 3번의 좌편향 정권들은 대부분 철 지난 낡은 이념에 갇혀 벌어놓은 곳간을 비우는 것도 부족하여 청년들을 볼모로 빚을 내어 흥청망청하며 나라를 퇴보시켰다.


자유민주주의 세계 최강 미국과 일본의 흐름을 역행하며 중국 사회주의, 북한 김일성 주의를 쫒았다. 이제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쌓아놓은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며 다시 국가를 정상화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저출산, 고령화, 청년 일자리, 집값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다. 답은 기업 활동에 연계한 경제에 있다.


다행히 한국의 제조업은 아직 탄탄하고 디지털 경쟁력 또한 우수하다. 문제는 한국 경제에 가장 큰 외적 변수(위험)는 환율이다. 미국과 협의하여 '미국 달러 고정환율제'도입을 통하여 이 문제 하나만 해결해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룬 한강의 기적에 버금가는 일이다.


제조업의 대선배의 나라 영국과 한국을 포함한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대만 중, 영국의 쇠락 과정, 일본과 대만의 추락, 독일과 미국의 건재 등 제조업 흥망성쇠 과정을 통하여 한국의 길을 찾아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술의 차이보다는 환율 위험 관리 여부에 따라 승부가 결정 났다. 


한국은 현재 '자유 변동환율제
IMF는 환율제도 기준 사용현황

참고로 한국은 1945년부터 환율제도가 5번 바뀌었고, 현재는 1997년부터 완전한 시장환율을 반영한 '자유 변동환율제'를 사용하고 있으며 아시아 국가 중 자유변동환율제를 채택한 나라는 한국·일본밖에 없다. 주무부처는 기획재정부이다.  


환율제도는 크게 고정환율제와 자유변동환율제를 양극단으로 하여 이 두 가지를 절충하는 다양한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현재 IMF는 환율제도를 8개로  분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정환율제도는 한 나라의 대외의존도나 특정국에 대한 수출비중이 높고, 정책당국의 물가정책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경우에 적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반면 변동환율제도는 경제규모가 크고 금융산업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거나, 해외충격에 대한 노출이나 자본이동성이 큰 나라에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많다.


1990년대 동남아 외환위기의 여파로 이들 국가의 환율제도는 환율변동의 신축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이행되었으며, 나라에 따라서는 고정환율제도를 강화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 농업국에서 산업화로 제조강국, 무역대국이 된 것은 기적이었다. 그 누구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 위대한 업적을 폄하할 수 없다.

일몰과 함께 한강 위를 비행하는 무인 항공기 / 이미지 출처 gettyimages.

농업국은 산업화가 안되면 절대 빈곤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한정된 농토에서 아무리 농업이 최첨단 과학화하여도 인구증가보다 농업 생산성이 더 클 수 없고, 자본축적이 안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1961년 농업인구가 전체 인구의 55% 이상이고 농업 위주의 1차 산업이 40%를 상회하였다. 오죽하면 농업 육성 및 농민 보호를 위하여 농협을 만들어 은행 기능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위대성은 대한민국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제조강국, 산업국을 넘어 무역대국으로 만든데 있다. 흔히 라인강의 기적과 비교하지만, 차원이 다르다. 독일은 전쟁 전으로 회복하는 정도의 기적을 만들었지만, 한강의 기적은 무에서 유를 창출한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을 만들었다. 농업사회에서 산업화, 수출대국으로 만든 일이다.


70년대 초 한국이 수출한다고 하였을 때 외국은 물론이고 국내에서조차 돌았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농업인구가 반이 넘고 GDP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국내 산업 비중의 반 이상 역시 농업이었다.


농업이 감속 경제인 이유는 땅은 한정되어있고 인구는 늘어나니 소득은 줄어드는 제로섬 경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분의 빈국이 농업 위주의 국가이다.


수출하려면 산업화 국가가 되어야 한다. 그 당시 한국에서 공산품, 물건이라고 내세울 만 것은 강화도 화문석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나라에 물건을 팔려면 품질도 좋아야 하고 가격이 싸야 한다. 그나마 공장도 천연자원도 전기도 대부분 북한에 있었다. 


물건을 만들 기술도 철강 등 원자재는커녕 수출입할 항구나 도로도 없었다. 아니 도로를 달리는 차도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수출입국(輸出立國), 산업화라는 발상 자체가 몽상이고 돈키호테가 비웃을 만한 치기 어린 의지였다.


젊고 아리따운 여성들이 서독에서 피 묻은 시체를 만지고 말쑥한 청년들이 서독의 50m 갱도 아래서 목숨을 걸고 광부 일을 했다. 가관(?)인 것은 당시 대통령은 서독에 가서 그들을 얼싸안고 울더니 그들의 임금을 담보로 4천만 달러의 돈을 빌려온다.


젊은 학생들이 자원하여 참전한 월남에서 32만 명 청년들의 목숨으로 번 돈을 국가가 대신 나서서 50억 달러의 외화 수입을 중간 마진으로 챙겼다. 그뿐만 아니라 야당과 대학생들에게 욕을 먹어가며 일제 만행 대가인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보상을 급전으로 받아온다. 


중동 사막에서 땀과 눈물 값으로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런 돈으로 고속도로 만들고 제철소를 만들며 온 나라가 모두 미친 듯이 밤새며 일하여 수출을 시작하였다.


한국의 경제는 감속 경제에서 급가속 경제로 변하였다. 기간 사업 확충을 목표로 한 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3, 4차를 거치면서 중화학 공업 산업화와 수출대국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한강의 기적이다. 경제 10위권의 나라가 되었다. 한국만이 한 부국의 일이다.


▲ 제조업 강국 중 독일, 미국은 환율 위험에서 벗어나 건재 과시

한국 제조업의 가장 큰 리스크는 환율이다. / 이미지 출처 gettyimages

인구 규모가 어느 정도 이상 되는 국가는 제조업이 아니면 성장하기 어렵다. 제조강국이 아닌 홍콩, 싱가포르, 스위스는 인구가 적은 홍콩이나 싱가포르는 '도시국가'에 가깝다. 이 정도 규모의 국가라면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해 중개무역, 금융업으로 높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국가가 금융이나 중개무역만으로 국민들을 잘살게 하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와 인구 규모가 비슷하거나 더 많은 영국, 독일, 미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는 모두 제조업 강국이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원지이자 내연기관을 발명한 선두 공업국이었다. 미국은 테일러 시스템을 통해 제조업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며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일본은 1980년대 미국을 위협한 제조업 강국이었다.


하지만 제조업을 통한 국가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제조업을 통한 성장이 한계에 다다르면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멀리 볼 것 없다. 일본은 1990년대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장기 침체를 겪었다. 제조업의 대선배인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00년에 걸쳐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때 유럽의 제조업 강자였던 이탈리아는 이제 유럽연합 국가들의 도움이 절실한 나라가 됐다.

    

반면 제조업의 저주에서 벗어나 재도약한 국가들도 있다. 동서독 통일 이후 '유럽의 병자(Sickman of Europe)'로 불리던 독일은 유로존을 이끄는 슈퍼스타가 됐다. 미국은 198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고통을 겪었으나 지금은 애플, 아마존,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알파벳) 등 미국 5대 테크 기업의 2019년 시가총액 1년 증가분이 독일의 전체 주식 시장 시가총액과 맞먹는 규모가 됐다. 왜 이런 차이가 빚어진 것일까?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이만큼 좋을 순 없다고 할 정도로 제조업을 통해 가난을 극복하고 부를 이루었다. 이런 경험과 자신감은 우리만 가졌던 게 아니다. 일본, 독일, 미국, 영국, 심지어 아르헨티나도 20세기 초에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변곡점을 지나 미국과 독일은 다시 닐이 올랐으나 대부분의 국가는 정체하기나 오히려 추락하기 시작했다. 영국, 일본, 대만, 독일, 미국 등의 흥망 사례를 제대로 살펴보면 한국의 가야 할 길이 보인다.


▲ 제조업 대선배인 영국이 100년 간 겪은 쇠락 과정을 한국이 살펴봐야 한다.

영국 파운드 주화 / 이미지 출처 gettyimage

영국은 계속된 무역수지 적자와 파운드화 평가절하로 어려움으로 1976년 IMF의 구제금융을 받게 된다. 우리가 1997년 받은 구제금융의 20년 선배가 바로 영국이다. 당시 영국 노동당 정부는 IMF에 39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요청했는데, 이는 구제금융 사상 최대 규모였다.


영국은 실제로 구제금융으로 받은 자금 중 절반을 사용했고,  3년 만인 1979년 이를 모두 갚았다. 3년 만에 구제금융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77년 석유 수출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영국은 엄연한 산유국이다. 1970년 초 북해 유전을 개발했고 1975년 스코틀랜드 동해안에서 본격적으로 원유 생산을 시작했다.  

   

1976 IMF 구제금융'은 영국 경제의 고질병을 드러낸 사건으로, 영국이 내세우던 복지국가 이념을 끝내게 했다. 영국은 1920년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혁명적 사회주의를 배격하고 간접 민주제를 바탕으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혼합경제 모델과 복지국가 노선을 지향했다.


노동당의 주요 지지층은 노동조합이었다. 그러나 노동당은 IMF 구제금융의 여파로 1979년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에게 정권을 잃게 된다. 무려 18년이 흐른 1997년에야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이 선거에 승리하지만, 더 이상 예전의 복지국가를 주창하는 노동당이 아니었다. 블레어 총리는 당수 시절인 1994년 '신 노동당(New Labor)'이라는 구호를 내걸면서 당 강령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했다.     


영국은 1942년 경제학자이자 노동부 차관이었던 윌리엄 베버 블레어는 “사회민주주의 철학은 글로벌 경제의 새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며, 영국은 세계 자본 시장의 중심에 있으므로 영국 스스로 할 수 있는 경제 정책에는 한계가 있다"라고 고백했다. 또한 유럽 국가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은 통화, 재정 정책은 장기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블레어는 1994년 당수를 맡으면서 노동당 이념을 사회민주주의에서 사회자유주의로 바꿨다.   


영국은 1942년 경제학자이자 노동부 차관이었던 윌리엄 베버리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로 유명한 '베버리지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광범위한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했다. 하지만 과도한 복지 운영과 1970년대 노동조합의 투쟁에 따른 임금 상승, 국영 기업의 방만한 경영은 영국을 소위 고복지 · 고비용 · 저효율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악순환에 빠지게 했다.


이로 인해 1970년대 영국은 '유럽의 병자'라고 불리게 된다. 영국의 1인당 실. 질 국내총생산은 1960년대 세계 9위에서 1971년 15위, 1976년 18위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비효율적인 산업을 구조 조정하는 대신 국유화를 단행하면서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국영 기업을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가 됐다. 그러나 이 같은 대처는 임시방편으로, 병을 더 키울 뿐이었다. 위기 속에서 등장한 정권이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이다.


대처 총리는 복지 지출의 축소, 노조 활동 규제와 노동 시장의 유연화, 국영 기업의 민영화, 한계 세율 인하, 금융 규제 완화를 추진했다. 저항은 거셌다. 광산 부문을 대대적으로 구조 조정하겠다고 발표하자 1984년 광산 노동자의 3분의 2가 파업에 들어갔다. 대처는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을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남대서양의 작은 섬 포틀랜드의 영유권을 두고 싸운 포클랜드 전쟁에 비유하면서 노조를 '내부의 적'이라 규정했다.     


정부의 강경 대응과 여론의 압박 속에서 1985년 광산 노조는 조건 없이 항복했다. 여세를 몰아 대처 정부는 가스, 전기, 철도, 수자원 공사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구조조정의 여파로 1980년대 초영국의 실업률은 큰 폭으로 증가해 실업자 수만 300만 명에 이르렀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가장 많은 실업자였다. 복지 천국으로 불리던 영국이 제조업의 쇠락으로 전혀 다른 국가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중산층과 서민들의 삶이 뿌리부터 흔들렸다.


영국이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의 어둡고 긴 터널을 탈출하고 상황이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2년, 사자로 상징되는 대영제국이 하이에나로 불리는 헤지펀드의 사냥감이 된 사건이 일어난다. 대처 총리는 규제를 완화하고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을 완화하고자 유럽 통화(특히 독일)에 영국을 묶어놓는 외환 정책을 도입했다.


고물가, 고실업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90년 10월 ERM(Europern Exchange Rate Mechanism) 가입을 선택한 것이다. ERM은 일종의 환율 조정 장치로 유럽 가입국들이 회원국 통화의 기준 환율을 설정하고 이에 기초해 각국 통화 환율의 변동폭을 설정하는 제도였다. 상대국과 상하 6퍼센트 범위 내에서 환율을 유지해야 했다.


예를 들어, 1파운드의 기준환율이 2.95 마르크인데 이것이 6퍼센트 범위 밖인 2,773 마르크가 되면 영국 정부가 개입해서 파운드의 가치가 더 이상 하락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1979년 ERM 출범 때부터 가입을 거부한 영국이 ERM에 가입한 것은 불안한 파운드 환율을 마르크에 묶어놓고, 자신은 실업을 줄이고 물기를 안정시키는 국내 정책을 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환율 하나를 묶어놓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남미의 사례만 봐도 익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조지 소로스와 스탠리 드러켄밀러가 운영하는 헤지펀드 퀀텀펀드가 이 틈을 노리고 영국의 마지막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사건을 일으킨다. 1989년, 영국은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금리는 15퍼센트에 이르렀다.


높은 실업률 역시 큰 사회문제였다. 한편 통일 후유증을 겪던 독일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했다. ERM 규칙에 따라 환율 밴드를 지키려면 영국은 독일과 같이 금리를 인상해야 했는데, 이미 금리가 높은 데다 실업자도 늘어난 상황이라 추가로 금리를 인상하기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또한 영국의 주택대출 금리는 단기 금리에 연동되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상하면 주택대출을 받은 사람들에게 즉각 전가되는 구조여서 금리를 올리기가 더욱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로스와 드러켄밀러는 독일이 자국의 인플레이션을 잡는 정책을 펼칠 것으로 판단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수레에 돈을 싣고 가서 식빵을 사야 했던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독일은 인플레이션에 대해 국가적 트라우마가 있다.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면 고금리 정책을 써야 한다. 하지만 경제가 엉망이었던 영국은 독일을 따라서 금리를 인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독일이 고금리 정책을 고수하면 파운드는 실제 가치에 비해 고평가 될 수밖에 없었다. 퀀텀펀드는 고평가 된 파운드가 대폭 절하되거나 영국이 ERM을 탈퇴할 것이라는 데 베팅하고 파운드를 대거 팔기 시작했다. 그 규모는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감당하기에 버거울 정도였다.  

   

결국 1992년 9월 16일 수요일, 영국은 ERM을 탈퇴하고 파운드 가치는 급락했다. 검은 수요일이었다. 1993년 2월에 이르자 파운드 가치는 ERM 고정 환율 대비 26퍼센트 하락했다. 소로스는 이 거래만으로 거의 10억 달러 가량을 벌어들였다.


외환 거래에서 한 국가가 헤지펀드에 패배한 대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히 영국과 헤지펀드의 싸움이 아니라 영국의 쇠락이 외환 시장을 통해 표출된 사건으로 봐야 한다. 제조업 강국이자 한때 패권 국가였던 영국의 쇠락은 파운드 쇠락과 궤를 같이한다. 파운드 쇠락의 역사는 하루 이틀 된 이야기가 아니다.  

   

1821년 당시 최강국이었던 영국은 금본위제를 채택했다. 영국이 금본위제를 도입하자 다른 나라들도 잇따라 영국을 따르면서 금본위제는 19세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국제 통화 질서가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각 나라는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금 준비금을 넘어선 규모의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화폐 발행량이 늘어나자 물가가 오르고, 금은 유럽에 물자를 팔던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때 미국은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변신했다. 1913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금 보유량 50억 달러 중 미국이 20억 달러를 가지고 있었는데 10년 후인 1923년에는 총 60억 달러 중 미국이 45억 달러를 보유하게 됐다.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린 탓에 전간기 세계는 금본위제에서 이탈해 변동환율제로 옮겨갔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9년 4월부터 1년 동안 영국의 물가는 50퍼센트나 치솟았다. 파운드는 4.86달러에서 3.40달러로 떨어졌다. 영국이 국제 금융 시장의 중심지로서 역할하려면 파운드의 신뢰를 되찾아야 했다.


결국 1925년 4월 28일 당시 재무장관이던 처칠이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선언하고 1파운드당 4.86 달러로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수준으로 환율을 고정했다. 영국은 이를 위해 국내 경기 하락을 감수하면서까지 금리를 인상하고 재정을 긴축했다.


달러와 함께 파운드가 금으로 태환 가능해지면서 금 이외의 국가 통화가 국제 준비금이 될 수 있었다. 기분은 좋았지만 경제학자 케인스의 경고대로 대가는 혹독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다른 나라들의 경기가 회복될 때 영국만 계속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그런데 왜 영국은 이렇게 파운드의 가치를 유지하려고 한 것일까?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영국은 국제 금융 시장의 중심이었다. 광대한 해외 식민지, 막강한 해군력, 신뢰성 있는 통화 덕분에 금융신용의 3분의 2가 영국에 집중되었고, 상업어음 거래를 거의 독점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 그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미 20세기 초 영국을 앞지르는 산업 경쟁력을 가지게 됐는데,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제 금융 시장의 중심 지위까지 넘보았다. 파운드와 금을 다시 연계시키는 것은 '더 시티(세계 금융이 집중된 영국 런던의 특별행정구역)'가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복귀하는데 필수적인 요인이었다.


영국이 지금까지 외국에 자본을 수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파운드의 안전성과 건전성이 있었다. 그래서 1919년 미국이 금본위제로 복귀하자 영국도 기축통화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1925년 무리해서 금본위제로 복귀하지만 이는 상처뿐인 영광에 불과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대세를 거스르기는 어려웠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미국은 패권 국가로 등극한다. 그리고 전 세계 국가들은 1944년 미국 중심의 브레턴우즈 체제라는 새로운 통화 질서를 도입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달러를 금에 고정시키고, 다른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키는 협정이다.


이제 세계 각국은 준비금으로 금과 함께 달러를 보유하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운드는 사실상 달러에 기축통화의 위치를 빼앗겼으며, 브레턴우즈 체제는 이를 확인 사살하는 사건이었다. 1949년 달러에 대한 파운드 가치는 30퍼센트까지 절하됐다.


파운드 가치는 그 후로도 꾸준히 떨어져 1967년에는 다시 14퍼센트 평가절하됐고, 1985년에는 급기야 1달러가 됐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도입된 지 반세기 만에 4.80달러에서 1달러로 돈의 가치가 무려 80 퍼센트나 떨어진 것이다.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에 1파운드 대 1달러는 매우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미국이 1971년 '금 태환 정지'를 선언하고 1973년 변동환율제를 도입하자 유럽 국가들은 1979년 환율을 뱀처럼 일정 범위 내에서 움직이게 하는 EMS(European Nonetary System)를 발족했다.


ERM은 유럽공동체' 회원국 간에 통화를 연계시키는 협정이다. 이때 기준 역할을 한 화폐가 마르크다. 1990년, 영국은 ERM에 가입하여 마르크를 이용해 안정적인 통화 제도를 구축함으로써 환율과 물가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환율이 안정되면 국내 신용을 팽창시켜 국내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으므로 결국 환율, 물가, 실업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도는 소로스의 파운드 공격으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파운드 가치는 다시 떨어졌다. '1976 IMF'로 노동당이 정권을 잃었다면, 1992년 퀀텀펀드의 승리 5년 뒤 보수당은 선거에서 노동당에 참패했다.   

  

제조업의 아버지 영국은 19세기 말부터 공업국의 지위를 위협받았다. 공업 총생산 면에서 미국은 1880년대에 영국을 앞질렀고, 독일은 1890년대에 영국을 앞질렀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영국은 세계 무역량의 6분의 1을 차지했는데, 미국과 독일이 이미 이에 육박하는 규모를 갖추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4년 유럽에서 최고의 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었다. 영국 국민의 생활 수준은 절정기였지만 저변의 흐름은 이미 하락의 변곡점을 넘은 상태였다. 후발 공업국의 도전과 20세기 초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경제의 성장 엔진은 차갑게 식어갔다.    

 

영국은 파운드 가치 하락을 방어하면서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지만 대세를 흠집을 순 없었다. 1979년 경제 체질을 바꾸는 과정에 시 시장들은 더욱 벌이지고 실업률은 대공황 시기에 버금가는 수준이 됐다. 그 와중에 1992년 영란은행이 헤지펀드 공격에 굴복하면서 영국은 유럽과 환율 고리를 끊었다.


그리고 20년 후인 2016년 브렉시트"를 결정하고 2020년 1월 31일 브렉시트를 단행하면서 유럽과의 경제적 고리마저 끊었다. 이것이 제조업의 쇠락과 함께 100년간 영국이 겪은 방황의 역사다.


▲ 영국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그라인더를 사용하는 금속 작업자 / 이미지 출처 gettyimages

제조업 대선배인 영국이 걸어온 길은 한국을 비롯하여 다른 제조강국들이 진짜 핵심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영국 제조업 몰락은 파운드의 평가절하 즉 환율에서 비롯했고 과도한 복지와 지나친 국영기업 보유에서 악화되었으며, 파운드의 환율 위험을 줄이기 위하여 ERM( 독일 등 유럽)을 통하여 환율을 고정하였으나 독일의 물가상승, 금리에 적절하게 환율을 대응하지 못한데 있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과 같은 금융, 경제, 화폐, 군사력 등 최강의 패권국인 미국 달러에 환율을 고정하되 정기, 임시로 적기에 대응할 수 있는 환율제도로서 영국과 같은 위험을 벗어날 수 있다.


▲ 대만과 일본의 제조업은 왜 주저앉았는가?

분노한 일본 회사원은 두 손으로 머리를 잡고 절망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일본 도쿄 신주쿠에서 촬영/ 이미지 출처 gettyimages

제조 강국이 환율 등 문제로 제조업이 쇠락하여 다른 경제에 여파를 미쳐 결국은 영국은 쇠락의 길을 지금도 걷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대만 등  인구가 어느 정도 되는 나라들은 초기에 제조업으로 성장하면서 영국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모두 마찬가지다.


제조업으로 성장한 나라들은 하나같이 제조업 쇠퇴로 혹독한 어려움을 겪었다. 제조업으로 나라가 컸는데 그 제조업이 나라를 잡아먹은 꼴이다. 다만 이 난관을 극복한 국가도 있는가 하면, 난관의 문턱에서 주저앉은 국가도 있다. 주저앉은 대표적인 국가가 일본과 대만이다.


일본은 1990년 이후 거의 30년 동안 장기 저성장의 고통을 겪고 있다. 


대만 역시 비슷한 세월을 보내다가 최근 반도체를 중심으로 회복의 단초를 보이고 있다. 일본과 대만은 우리처럼 제조업으로 성장한 나라다. 일본이 1953년부터 20년간 누렸던 고성장은 스탈린 체제하의 소련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다.


1980년대 당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GDP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체의 17퍼센트를 넘었다(재 우리나라의 GDP는 OECD 전체의 2퍼센트 수준이다). 또한 채권국이면서 동시에 경상수지 흑자국이었다.


 1990년대 초 일본의 GDP는 미국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지만, 주식 시가총액은 미국을 앞질렀다. 미국이 세계 1위 경제대국이 되고 난 후 그 어느 나라도 미국의 주식 시가총액을 앞지른 적이 없었다. 하버드경영대학원은 일본 기업의 경영 방식을 찬양하느라 바빴다. 일본 제조업의 경쟁력은 미국에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절정이었다.     


1992년 일본 경제는 1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성장률을 보이더니 급기야 1993년에는 역성장했다. 이후 일본은 오랜 시간 불황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1992년부터 2010년까지 일본의 연평균 1인당 GDP 증가율은 0.6퍼센트에 그쳤다.    

 

사실 일본이 위기 상황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징후는 1980년대 중반 이미 나타났다. 일본 기업들은 엔고의 영향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제조업 생산기지를 국외로 맹렬히 옮기고 있었다. 1990년대 거대 자산 버블이 붕괴하자 소비자들은 갑자기 지갑을 닫았다. 금리를 아무리 낮춰도 소비는 증가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 기모든 사람이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투자와 소비가 얼어붙으면서 일본의 1인당 GDP는 1995년에 4만 3000달러를 넘어섰다가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도 4만 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일본의 장기 불황에 대해 폴 크루그먼 시립대 교수는 소비와 투자 등 총수요 부족이 그 원인이라고 지적했지만 이는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필자는 미국이 1985.9.22. 주도한 플라자 합의( Plaza Accord, Plaza Agreement)로 일본과 독일에 대한 환율을 대폭 절하(미달러 가치 대폭 하락) 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제조, 수출  등 경제기조가 무너진 가장 큰 원인으로 판단한다.     

 

한때 우리의 경쟁 상대로 꼽히던 대만 사정은 무엇일까? 


1990년대 초만 해도 대만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델 중 하나였다. 높은 경제 성장률뿐만 아니라 산업 구조에서도 재벌 중심의 우리나라와 달리 중소기업 중심의 균형 잡힌 경제 구조를 자랑했다. 일본 식민지 시절 닦아놓은 인프라와 국민당 정부가 펼친 개발 정책의 영향으로 전자 제품을 중심으로 경제가 급성장했다.


IMF 기준으로 대만은 1983년 선진국으로 분류됐는데, 이는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뛰어오른 최초의 사례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국이 국외 기업에 문을 열자 대만 기업들은 원가 절감을 위해 중국으로 생산 시설을 이전하기 시작했다. 대만 신발 업체의 80퍼센트가량이 중국 남부로 생산 시설을 옮겼다. 당연히 국내 투자와 고용이 감소했다. 이는 총수요 부진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2000년대 초반 세계적인 IT 버블 붕괴가 나타나면서 경제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2012년 대만을 찾았을 때 현지인들이 자신들도 일본처럼 '잃어버린 20년'을 겪고 있다고 했는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여기에 내재된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제조업의 경쟁력은 기술력과 가격이다. 그런데 제조업을 중심으로 국가 경제가 성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임금과 땅값 등 요소비용이 증가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다. 일본, 대만, 한국 등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국가의 기업들이 요소비용이 싼 중국, 베트남 등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소비용 이외에도 기업 규모가 커지면 관세 장벽을 회피하거나 생산기지의 글로벌 분산을 위해 국외로 나가게 된다. 그만큼 국내에서의 투자와 고용은 줄어든다. 과거에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다른 나라에 공장을 준공할 때 언론에 크게 알렸지만 요즘은 조용히 공장을 짓는다. 국내의 고용과 성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를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 관점에서 이해해보자. 애플의 아이폰을 만드는 가치사슬에는 45개 국 1049개 기업이 얽혀 있다. 이 중 상위 200개 기업의 국적을 살펴보면 대만 4개 사, 중국 41 개사, 일본 38개 사, 미국 37개 사, 한국 13개 사다.


아이폰 X를 예로 들면 소매가격 1200달러 중 부품 비용이 370달러를 차지하는데, 단일 기업으로는 삼성디스플레이가 가장 많은 110달러를 가져간다. 국가로는 일본이 가장 많이 가져간다. 대만 기업 폭스콘이 아이폰 생산기지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아이폰 X 조립 비용은 제품 가격의 2퍼센트에 불과하다. 이처럼 선진국의 브랜드 기업이 원천기술 개발과 상품 디자인을 담당하고, 부품에 특화된 전 세계 기업들이 부품 공급과 조립을 담당하면서 글로벌 가치사슬이 형성된다.     


제조업이 성장하던 초기에 우리나라 기업들은 글로벌 가치사슬의 맨 밑단에 위치했다. 기술력이 달리고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기업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우리나라 제조 기업들은 가치사슬의 정점으로 옮겨갔다.


가치사슬의 정점으로 향할수록 1인당 부가가치는 높아지지만 해당 기업의 국내 투자와 고용은 줄어든다. 글로벌 현지 생산을 늘리는 만큼 국내 고용유발계수가 낮아져 기업이 성장하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용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용유발계수는 특정 재화를 10억 원어치 생산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고용되는 임금 근로자 수와 이로 인해 다른 부문에서 간접적으로 고용되는 임금 근로자 수를 합한 값이다. 우리나라 제조업의 고용유발계수는 2018년 현재 4,68명으로, 2000년의 10.11명에 비해 대폭 줄어들었다.


특히 주력 산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고용유발계수는 각각 1.6명과 2,88명에 불과하다. 컴퓨터와 통신기기도 2,86명, 2.49명밖에 되지 않는다. 석유화학은 2.44명, 석유정제는 0.68 명이다. 제조업 중에서도 장치 산업인 중화학공업 중심인 우리나라는 제조업의 고용유발계수가 낮은 편이다. 반면 서비스업은 그 값이 9. 41명으로, 제조업의 2배가 넘는다.  

   

개별 기업 측면에서 생산기지를 인건비가 저렴한 국외로 이전하면 기업의 수익이 좋아지고, 주가가 올라간다. 하지만 국내 고용이나 생산에 대한 기여는 그만큼 떨어져 국가 경제 성장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제조업 국가는 경제가 성장할수록 국내 고용이 둔화될 뿐 아니라 그나마 있는 고용도 국외로 이전되는 경향을 보인다.


결국 고용되지 않은 사람, 서비스업의 생산성 낮은 근로자와 제조 대기업의 생산성 높은 근로자 사이의 임금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진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임금 근로자 간의 양극화가 일어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소득 양극화는 소비 수요를 줄인다. 때문에 투자 수요와 함께 전반적으로 수요 부족이 발생한다.  

   

제조업의 함정은 이뿐만이 아니다. 제조업 수출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면 국외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늘어나 무역수지가 흑자가 된다. 2010~2014년 우리나라 무역수지는 연평균 380억 달러였으나 2015~2018년에는 860억 달러로 2.3배 증가했다.


이러한 무역수지 흑자는 환율 강세 압력을 가한다. 수출 대기업을 제외한 중소 제조 기업들은 환율이 약세가 되어야 수출 경쟁력이 올라가는데 대 기업이 벌어들이는 무역수지 흑자 때문에 환율이 강세가 되면 그만큼 대외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큰 나무 주위에는 햇볕이 적게 들어 작은 나무들이 크게 자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만 역시 인건비 상승과 함께 환율 강세로 인한 대외 경쟁력 약화라는 제조업의 태생적 메커니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는 제조업 국가의 지속적인 성장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심할 경우 나락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러면 같은 제조업 국가이고 경제 규모가 큰 독일과 미국은 제조업의 저주에서 어떻게 벗어난 것일까 궁금해진다.


▲ 유로화로 환율 위험을 헤지 한 독일은 승승장구

2020. U16  여자 독일 선수의 모습 /  이미지 출처 Getty Images

1980년대 독일 마르크는 일본 엔화와 거의 같은 성격의 통화였다. 독일, 일본 모두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한 제조업 중심국가이다 보니 환율이 비슷하게 움직였고 통화 또한 국제적으로 신뢰를 받았다. 그런데 1985년 미국은 경상수지와 환율 균형을 잡기 위해 플라자 합의를 요구한다.


미국의 달러 약세를 유도하는 플라자 합의가 체결되자 마르크의 가치는 상승했다. 마르크의 가치가 올라가자 독일은 산업 공동화, 고임금 문제를 겪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동서독 통일에 따른 재정 지출이 급증하면서 1990년대에는 인플레이션과 재정 적자 등 복합적인 어려움에 빠진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도입한 고금리 정책은 실업률을 높였다. 결국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독일은 영국에 이어 '유럽의 병자'로 불리게 됐다. 일본만 1990년대에 어려움을 겪은 게 아니다.     

          

그러나 지금 두 나라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일본은 아베 신조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기동적 재정 정책' '과감한 양적완화' 구조 개혁을 통한 성장'이라는 3개 화살을 쏘며 반등을 꿈꿨지만, 여전히 저성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독일은 유럽의 슈퍼스타가 됐다.    

 

2000년 기준으로 일본과 독일이 OECD 전체에서 차지하는 GDP 비중은 각각 14.6퍼센트, 5.8퍼센트였다. 그러나 2018년에는 이 값이 5.8퍼센트, 4.7퍼센트로 차이가 줄었다. 같은 기간 독일의 경제 규모는 일본의 40퍼센트 수준에서 80퍼센트까지 따라잡았다.


2000년 이후 19년간 일본 주가는 21퍼센트 오르는 데 그쳤지만, 독일 주가는 무려 86퍼센트 상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두 국가 모두 전범 국가의 낙인에서 벗어나 고성장 가도를 달리다가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처지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답은 유로화(단일통화)에 있다.     

독일은 1999년 유로화 출범 이후(초기 유로화는 결제를 위한 가상화폐였고, 2002년부터 법정통화로 지폐와 주화가 발행됐다) 2000년대 중반부터 경제 강국으로 재도약했다. 이 기간 독일의 성공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하르츠 개혁과 유로화 단일통화 출범 2가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르츠 개혁은 2002년 독일 정부가 추진한 방안으로, 핵심은 노동 시장의 유연화다. 일반적으로 독일의 재도약을 두고 통일, 하르츠 개혁, 독일 제조 부문의 기술력과 품질 경쟁력의 우위가 큰 역할을 했다는 해석이 많다. 구조 개혁, 통화 통합, 제조 부문의 기술력 3가지 중 지금의 경쟁력을 만든 이유를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통화 통합을 들 것이다. 


독일의 경상수지는 단일통화가 출범하기 이전 100억~300억 달러 적자를 보이다가 단일통화 출범 이후 흑자로 전환했다. 2020년에는 2700억 달러 흑자를 달성했다. 2002년 이후 독일의 경제 지표는 경상수지를 중심으로 확연하게 좋아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후에는 그 탄력이 더욱 강해졌다. 구조 개혁을 한 나라는 독일 이외에도 많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독일 같은 성과를 낸 것은 아니다. 따라서 독일의 눈부신 성취는 구조 개혁 이외에 단일통화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여러 국가가 유로화처럼 단일통화를 사용할 경우 경쟁력이 강한 곳, 다시 말해 생산성이 높은 나라가 유리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단일통화로 묶인 지역들끼리는 서로 무역 거래가 활발해지고 외환 불확실성도 사라진다.


생산성 이외에는 따질 요인이 거의 없으므로 독일처럼 생산성 높은 나라의 기업이 경쟁에서 우위에 서게 된다. 반면 이탈리아, 스페인처럼 상대적으로 생산성 낮은 나라는 경제 체질을 개선하지 않는 한 만성적으로 취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2010년 그리스를 시작으로 2013년까지 유럽연합(EU)이 겪은 위기는 단일통화가 도입된 후 10년간 이 같은 모순이 누적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EU 회원국 각 나라의 내부 사정을 들여다. 보면 명암은 더욱 극명해진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010~2014년 EU 회원국들의 평균 실업률은 11.0퍼센트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페인은 23.4퍼센트의 실업률을 기록한 반면 독일은 5.8퍼센트에 그쳤다. 2005년 독일의 실업률이 11.1퍼센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전벽해 수준이다. 경제 성장률도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2010~2013년 독일의 연평균 성장률은 2.1퍼센트인 데 반해 나머지 유로존 국가들은 0.6퍼센트 성장하는 데 그쳤다.

     

결국 EU 회원국 중에서도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경쟁력이 약한 나라들은 유럽 재정 위기를 겪으며 PIGS (fortugal, Italy. Greece. Spain)로 분류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유럽 재정 위기 이후 단일통화 제도의 영향으로 환율이 평가절하되지 않은 PIGS 국가는 고평가 된 환율에 맞춰 경제 구조를 바꿔야 했다. 


작은 옷을 사놓고 그에 맞춰 살을 빼야 하는 격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채찍을 들고 서 있는 가운데 감량 목표를 보면서 트레드밀을 힘겹게 뛰고 있는 돼지 PIGS들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단일통화가 유럽 각국에 미친 영향을 좀 더 자세히 추적해보자. EU 11개 국은 1999년 1월 1일 0시부터 단일통화인 '유로'를 도입했다. 도입 당시 환율은 1유로=1 ECU'였다. ECU는 유럽 통화 단위로, 회원국 화폐의 가치를 가중 평균한 일종의 바스켓 통화다. 


이에 따라 1유로는 독일 마르크 1.95583, 프랑스 프랑 6.55957, 이탈리아 리라 1936.27, 스페인 페세타 166386으로 사용되었으며, 2002년 1월 1일부터 모든 실생활에서 쓰이게 됐다.     


단일통화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환율에 각 국가의 거시경제 상황이 평균적으로 반영됨을 의미한다. 쉽게 풀어보자. 예를 들어 5개 국의 경쟁력에 따른 환율이 2, 3, 3, 5, 7이라고 하면 평균 4가 된다 (2+3+3+5+7) 5=4), 그러면 1유로는 4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2인 국가는 환율이 고평가 되고 7인 국가는 환율이 저평가된다. EU 회원국들은 경상수지, 재정수지, 물가, 실업률 등 모든 지표가 국가마다 다양하다. 경쟁력이 7에 해당하는 독일은 환율이 4로 저평가되니 EU 역내 시장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수출경쟁력이 높아진다.  

   

이로 인한 효과는 각국의 단위 노동비용, 경상수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산출물 1을 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비용인 단위 노동비용을 비교해보자. 독일은 2009년 단위 노동비용이 107 정도이고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은 135~145 정도였다.


노동비용이 증가하거나 노동생산성이 떨어질 경우 단위 노동비용이 증가하는데, 단위 노동비용의 증가는 어떤 경우든 산출물의 경쟁력이 떨어짐을 의미한다. 이 경우, 환율이 약세를 보이면서 가격 경쟁력 약화를 보완해줘야 하는데 단일통화를 사용하면 그 충격을 국내 경제가 경쟁력 약화라는 형태로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그 결과는 경상수지에서 바로 나타난다. 독일은 경상수지 적자였다가 2002년 흑자로 돌아서서 2015년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가 8.6퍼센트에 이르렀다. 반면에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갈은 통화 통합 이후 경상수지 적자가 크게 확대됐다. 다만 유럽 재정 위기 이후인 2012년부터는 개선되고 있다. 유로화 약세와 다이어트의 결과다.


독일은 GDP 기준 경제 규모가 우리나라의 23배에 이른다. 이 정도 규모의 선진국이 2019년 현재 GDP 대비 7퍼센트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한 것은 대단한 성적이다. 2002년부터 17년 동안 경상수지 흑자 누적액만 3조 8000억 달러(4200조 원)에 이른다. 


독일은 최근 5년 동안 직접투자와 간접투자를 통해 해외로 내보낸 돈이 1500조 원을 넘어선다. 재정 지출 또한 방만하지 않아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이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 82.3퍼센트에서 2018년 현재 61.7퍼센트로 줄어들었다.     


물론 통화 약세가 능사는 아니다. 통화 약세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려면 기업의 경쟁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기업 경쟁력은 기술 우위, 구조 개혁으로 생산성이 높아졌을 때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 때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했는데, 그 구조조정의 효과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나타났다.


기업 경쟁력을 확보한 상황에서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600원까지 상승하자 수출 경쟁력이 대폭 증가한 것이다. 이는 독일이 노동 시장 유연화를 중심으로 하는 하르츠 개혁안을 2003년부터 단계적으로 실시하고 난 뒤 유로화가 약세를 보였을 때 경제가 급성장한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정리하면, 제조업 강국 독일이 유럽의 병자에서 슈퍼스타로 변모한 것은 서독과 동독의 통일 때문이 아니라 EU 회원국이 통화를 통일한 덕분이다. 이를 통해 독일은 제조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높은 제조업 경쟁력은 필요조건이다.   


▲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사실상 환율 리스크 제로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작업 중인 Charles Chaplin( / 이미지 출처 /Getty Images

찰리 채플린이 1936년에 만든 영화 '모던 타임스'는 미국이 대공황에 빠지면서 겪게 된 여러 사회문제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컨베이어 벨트의 부속품이 된 노동자, 일하면서 식사할 수 있게 하는 기계로 대표되는 노동 소외 현상부터 파업으로 아버지를 잃은 젊은 여성이 겪는 사회적 약자의 아픔까지 산업화 초기 미국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뼈 아픈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세계의 공장 자리에 올라선다. 1952년에는 선진국 생산품의 거의 60퍼센트를 만들어냈으며, 전 세계 기업 자본스톡의 절반을 차지했다.


1950년 1인당 총생산 수준은 미국을 100으로 잡을 때 영국은 55, 독일 37, 이탈리아 25였다. 미국의 노동자 1인당 생산성은 영국의 2배였고, 독일의 3배를 넘었다. 1953년 미국의 공산품 생산량은 독일보다 5배, 일본보다 17배 많았다. 한마디로 미국은 제조업의 왕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가 미국의 정점이었다.

     

1955~1970년 미국 제조업의 자본스톡이 74퍼센트 증가할 때 유럽 주요국들은 115퍼센트, 일본은 무려 500 퍼센트 증가했다. 같은 기간 평균 생산성은 미국이 3분의 1 상승한 반면 유럽은 2배, 일본은 5배 늘어났다. 영국이 미국에 따라 잡혔듯, 미국 역시 독일과 일본에 따라 잡히게 된다.     


일본과 독일은 경상수지 흑자를 통해 달러를 쌓아 나갔다. 반면 미국은 1970년 말 무역수지 적자가 늘고 금 유출이 확대되면서 금 보유고가 100억 달러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달러를 팔고 마르크나 엔화를 사들이면서 독일과 일본 중앙은행의 창고에는 달러가 쌓이게 됐다. 그러자 두 국가는 달러를 미국에 보내 금으로 바꾸려 했다.     


위기를 느낀 닉슨 Richard Nixon 미국 대통령은 1971년 8월 15일 달러를 금으로 바꾸어주는 금 태환을 전격 중지했다. 달러를 금의 족쇄에서 해방시킨 결정이었다. 이를 '닉슨 쇼크'라고 부르는데, 이 영향으로 유럽 외환 시장은 일시적으로 문을 닫게 된다. 일본은 고민 끝에 360엔을 기준으로 거래를 계속했다.


금 태환 창구가 폐쇄된 이후에도 핵심 국가들은 달러에 대해 자신들의 통화가 자유롭게 변동되는 것, 다시 말해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에 저항했다. 그러나 1971년 12월 18일 서방 10개 국 재무장관들이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모여 달러 평가절하에 합의했다. 그 뒤에도 달러 가치가 계속 떨어지자 1976년 변동환율제를 골자로 하는 킹스턴 체제가 출범한다.     


1980년대는 대공황 이후 미국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우선 경상수지 적자가 급속하게 증가했다. 1970년대 미국의 경상수지는 연평균 2억 5000만 달러 흑자였으나 1984~1988년에는 연평균 1240억 달러 적자로 급변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 가치를 30퍼센트 하락시키고 나서야 미국의 무역수지는 완만하게 악화되는 수준에서 멈췄다.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1981~1988년 레이건 10 alts reasa) 행정부 시절 국가 채무는 줄곧 늘어나 7000억 달러에서 2조 달러를 넘어섰고 경상수지, 재정수지 쌍둥이 적자는 더욱 심각해졌다.

    

그리고 1987년 10월 검은 월요일 Black Wonday을 맞는다. 하루 만에 다우지수가 22퍼센트가 폭락했다. 1929년 대공황을 촉발시킨 검은 금요일의 손실보다 큰 규모다. 여기에 더해 저축대부조합이 부실화하면서 1989년 대다수 조합이 법적으로 파산했는데, 그 피해 규모가 1조 5000억 달러에 달했다.


그야말로 1980년대 말 미국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시기를 맞았다. 중소 은행들이 연달아 파산하고 시티은행, 체이스 맨해튼 같은 거대 은행들도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거대 은행들 역시 투기성 대출을 안고 있었는데, 1980년대 초 남미 대출에 문제가 생기자 이를 만회하고자 부동산 대출 잔치를 벌였다가 부동산 호황이 붕괴되면서 큰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거칠게 파도가 몰아치는 곳 저 깊이에서는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고 있었다. 변동환율제 도입으로 금의 족쇄에서 벗어난 미국은 달러를 마음껏 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여기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제조업 경쟁국이던 일본과 독일에 대해 환율을 대폭 절하했다.


또한 미 중앙은행 총재 폴 볼커 Paul Voicker는 지속적인 통화 긴축으로 미국의 물가 불안을 구조적으로 안정시켰다. 1980년대 말에도 실업률은 여전히 높았지만 저축대부조합과 거대 은행의 부실 채권을 정리하는 등 나라 전체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내부를 단속하면서 미국은 최강의 경쟁 상대로 떠오른 일본을 공격하는 데 나섰다. 당시 일본은 장기적 관점에서 경제를 이끌 첨단산업으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고 있었다. 통산산업성의 보호와 육성 아래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던 미국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1980년대 초 일본은 반도체 최강자 인텔 ntel을 앞지르면서 세계 시장을 잠식해갔다.


'제2의 진주만 습격'이라는 비유가 회자될 정도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 반도체 산업에 치명타를 입혔다. 그러자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미국의 마이크론은 일본의 반도체 기업 히타치, 미쓰비시, 도시바, NEC 등 7곳을 덤핑 혐의로 무역대표부(USTRR)에 제소했다.


이어 인텔, AMD도 제소에 나섰다. 미국 상무부는 한발 더 나가 기업의 제소 없이도 직권으로 덤핑 여부를 제소할 수 있는 직권 조사를 발동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일본은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을 맺는다. 이 협정은 미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다름 아니었다. 협정을 체결한 이후에도 미국은 보복관세, 일본 반도체 산업 감시를 이어갔다. 인텔이 유대인 기업이라 일본은 그때 받은 공격으로 유대인들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 1987년 루브르 합의 Louvre Accoid, 1990년대 일본의 자산 버블 붕괴 등으로 일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미국에선 큰 판 2개가 흔들리면서 지형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먼저 세계 정치 지형의 새로운 판이 깔리고 있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이 모두 사회주의를 지향할 정도로 중앙계획경제의 위력이 컸는데, 이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연이어 폴란드, 체코 슬로, 바키아 등 동유럽이 체제 전환에 나섰고, 급기야 199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소련연방이 해체됐다.


소련의 붕괴로 사회주의 견제라는 방대한 실험은 막을 내리고 시장경제가 승자가 됐다. 이는 미국이 체제 경쟁을 하면서 동맹국의 물건을 사주고 국제 운송의 안전을 보장하는 등 시장경제 국가의 경제를 확대시킨 결과였다. 마셜플랜이 대표적인 예다.     


산업 지형도 달라졌다. 1995년 8월 9일 실리콘밸리의 한 작은 소프트웨어 벤처 회사인 넷스케이프가 주식 시장에 상장했다. 창업한 지 2년도 안 된 이 회사는 변변한 매출도 없었다. 그런데 주가가 상장 첫날 28달러로 시작해 71달러까지 상승하면서 3개월 만에 델타항공의 시가총액을 앞질렀다.


이 상징적인 사건은 미국 IT 부흥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미국에서는 한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술 혁신이 연달아 일어났다. 반도체 칩을 만들고,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소프트웨어를 제작하고, 플랫폼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2001년 들어 IT 버블이 잠시 꺼지긴 했지만 미국과 미국 기업들은 기술 산업의 변화를 선도할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지만 미국은 여전히 혁신을 선도해 나갔다. 1980년대 반도체, 1990년대 인터넷, 2000년대 스마트폰, 2010년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 혁신의 중심에는 항상 미국 기업이 있었다.     


2020년 1월 기준 알파벳(구글), 아마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의 시가총액은 5조 6000억 달러에 달한다. 2020년 한 해 동안 증가한 이들 5개 기업의 시가총액은 독일 주식 시장의 시가총액과 맞먹는다. 애플의 영향력은 1910년대 스탠더드 오일 Standard Oil, 기이나 US스틸 steel 만큼 커졌다.


현재 미국과 중국은 세계 플랫폼 기업 시가총액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와 남미는 1퍼센트에 불과하다. 유럽은 SAP 정도가 시가총액 1600억 달러 정도인데 이는 애플의 10분의 1 수준이며 삼성전자의 절반에 불과하다.

     

테크 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 전쟁에서 미국이 압도적 1위를 차지한 가운데 유럽은 뒤처졌으며, 중국이 이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형국이다. 2018년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의 본질을 '테크 전쟁'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성공을 혁신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미국의 강점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달러'라는 무기가 그것이다. 미국이 우리나라의 현대차를 1억 달러에 사고 싶다면 달러를 프린트해서 구입하면 된다. 1억 달러 가치와 1억 달러를 프린팅 하는 비용의 차액을 시뇨리지 (seigniorage 주조차의)라 부르는데, 국제통화를 보유한 국가가 누리는 경제적 이익이다.  


우리나라는 원유를 1억 달러어치 구입하고 싶으면 원화가 아닌 달러로 구입해야 한다. 물론 우리도 한국은행에서 원화를 1100억 원 발행해서 외환 시장에서 1억 달러로 바꿔 원유를 구입하면 된다. 하지만 원화를 대량으로 찍어내면 외환 시장에서 원화의 가치가 떨어져 우리나라 총 부(Wealth)의 대외 가치가 하락한다.


그래도 계속 원화를 발행하면? 외환 시장에서 우리나라 돈을 받아주려 하지 않는다. 돈을 마구 찍어되던 남미 국가들이 금융위기에 빠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반면 달러는 국제통화이기 때문에 수요자가 많아서 공급을 어느 정도 늘리더라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미국이 천문학적 자금을 재정 정책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기축통화로서의 지위 자체가 주는 경제적 이익은 이처럼 크다.    

 

기축통화라고 해서 무조건 주조 차익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주조 차익을 얻으려면 금의 족쇄에서 풀려나고 신뢰를 확대해야 한다. 미국이 달러를 기축통화의 위치에 올려두고 막대한 주조 차익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전쟁 배상금 문제가 풀리지 않았을 때 달러의 국제화를 시도했다.


미국은 유럽 국가들에 받을 돈이 있었고, 독일은 유럽 국가들에 배상금을 주어야 했다. 그래서 미국은 독일에 달러를 빌려줘이 달러로 독일이 유럽 국가들에 돈을 갚게 하고 그 달러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달러 국제화의 시작이었다. 전후 재건 시기 미국은 마셜플랜을 통해 유럽에 달러 선물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 여파로 미국은 1971년 금 태환을 중지하고 5년 후 변동환율 제도를 채택하면서 금이 아닌 다른 것의 가치를 통해 달러의 가치를 유지해야 했다. 자칫하면 독일이나 일본에 기축통화의 지위를 내줘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극복하고 경제, 군사, 문화, 정치, 외교 등 다방면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달러는 명실상부하게 기축통화 레이스에서 선두로 치고 나왔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우연의 결과인지 전략의 결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달러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확고히 한 덕분에 미국의 혁신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기축통화는 최후의 안전판 기능을 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경기 부양을 위해 돈을 찍어내는 양적완화 정책을 취하거나 회사채, 주식을 중앙은행이 직접 사들이는 방법을 취할 수 있다. 혹은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사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런 정책을 지속적으로 남발하면 문제가 되지만, 일시적인 어려움에 대응해 기축통화를 발행하는 것은 통화의 신뢰성을 크게 떨어뜨리지 않는다.

   

최후의 안전판이 있으면 경제 주체들은 큰 부담 없이 리스크를 떠안는 경제 행위를 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주식이 오를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주식 투자도 많이 한다. 미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국민들의 주식 보유 비중이 높다. 주식 시장에 자본이 꾸준히 들어오니 당연히 벤처 투자도 활성화된다. 


상업의 신 헤르메스는 뱀 두 마리가 DNA 구조처럼 서로 엇갈려 있는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미국의 혁신과 기축통화는 헤르메스의 지팡이처럼 서로 엮여서 시너지를 낳고 있다.

     

미국은 영국, 일본, 독일처럼 제조업 국가로 출발해서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슈퍼파워를 갖게 됐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기술(혁신)과 기축통화의 역할이 컸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거대 제조업 국가인 중국이 제조업 국가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술과 기축통화를 지향하고 있는 이유다.     


한국의 제조업 상황과 대책
한국 아산에 있는 하나마이크론 공장의 생산 라인 / 이미지 출처 Getty Images

우리나라는 소규모 개방경제 체제가 아니다. 전 세계 경제 규모로 볼 때는 소규모이지만 개별 국가들과 비교하면 결코 작지 않다. 소득 3만 달러, 인구 5000만 명이 넘는 국가는 전 세계에 7곳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핀란드, 스웨덴 같은 강소국을 우리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하는데 인구 700만~1000만 정도인 나라들의 운영 구조를 따라 할 수는 없다. 10명의 인력을 유지하는 기업과 1000명의 인력을 유지하는 기업은 전략부터 달라야 한다. 우리는 5000만 명이 잘 먹고 잘 사는 경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현재는 어떠한가? 1970년대 이후 제조업으로 고성장을 구가하다가 1997년 외환위기라는 암초에 부딪혔다. 외환위기는 자본을 대거 팔아서 부채를 갚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공장이 폭격을 맞은 것처럼 자본이 사라졌다.


외환위기를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하는 이유다. 이 과정에서 기업 지분을 외국인에게 팔아야 했고(현재 상장기업의 외국인 주식 지분율은 35퍼센트에 이른다), 160조 원에 이르는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대가를 치렀다. 대신 부실기업이 청산되고 살아남은 기업은 경쟁력이 높아졌다.  

   

2000년대 중국 경제의 성장은 우리나라 경제에 하늘이 준 기회였다. 2008년에는 환율 약세의 이점을 살려 삼성전자, 현대차 등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이제는 일본 전자업체의 이익을 모두 합쳐도 삼성전자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가 됐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2차 전지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개발도상국 가운데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를 가진 곳은 우리나라뿐이다. 1970~1980년대 한강의 기적에 이은 두 번째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써온 우리나라의 '성장 신화'다.

    

우리는 인구 5,000만 명에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나라가 됐다. 경제 규모가 큰 나라가 제조업으로 계속 성장하려면 끊임없이 내부와 외부의 도전을 이겨내야 한다. 제조업의 제품은 교역재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교역재와 경쟁해야 한다. 가격과 품질이라는 2차원 좌표평면상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제품은 시장에서 축출당할 수밖에 없다.


가격 경쟁력은 제조업 초기 단계의 국가를 당해낼 수 없다. 반면 품질은 선발 제조업 국가를 따라잡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기업의 경쟁자에는 중국, 인도, 베트남뿐 아니라 미국, 독일, 일본 등이 모두 포함된다. 더욱이 선진국들이 자국의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 국내외 기업의 공장을 국내로 다시 유치하면서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설상가상 중국, 인도 같은 후발국들이 앞다퉈 첨단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술 제조업의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중화학공업이나 장치 산업 중심의 제조업을 운영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글로벌 경쟁력을 가지고 성장하더라도 고용 유발 효과가 낮아 원하는 만큼 고용이 따라주지 못한다. 이는 실업 증가와 소득 양극화를 초래한다. 성장하지 못하더라도, 성장하더라도 문제가 따라오는 것이다. 극복해야 할 중요한 난제다.

    

외환위기를 통한 구조조정의 '약발'은 거의 소진됐다. 우리도 장기 저성장 압력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 고령화, 4차 산업혁명이라는 환경 변화가 가세하고 있다. 부정적인 요소와 긍정적인 요소가 혼재해 있는데, 부정적인 요소가 더 지배적인 상황이다.


제조업 국가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강력한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지구의 중력을 탈출하려면 초속 11킬로미터의 추진력이 있어야 하듯, 제조업 국가의 함정이라는 중력을 이길 수 있는 추진력을 갖추는 게 우리나라 경제의 과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독일은 통화 약세를 통해 제조업 경쟁력을 높였으며, 구조 개혁을 통해 도약했다. 일련의 정책이 제조업을 강화시키는 데는 도움이 됐지만 독일 경제가 너무 제조업에 쏠리게 된 약점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이다.


미국은 1980년대의 고통을 구조조정과 혁신으로 돌파했다. 여기에 기축통화의 지위를 공고히 하면서 슈퍼파워 위치를 되찾았다. 이를 위해 미국은 오랜 세월 동안 판을 만들고 판을 바꾸는 전략적 작업을 해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미국 달러에 한국 환율을 고정하는 이른바 '미국 달러 고정환율제(필자 명명)'를 미국과 협의하여 채택 시행하여야 한다.


제조업이 성장의 병목 구간에 들어선 우리나라는 유연한 환율 정책을 통해 제조업의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 앞서 미국과 독일의 사례를 통해 환율의 중요성을 살펴보았다. 우리나라는 수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90년대에는 20퍼센트대였으나 현재는 35퍼센트 수준이다.


우리 경제는 수출 증가와 함께 한 단계씩 성장해왔는데, 그 이면에선 환율 상승(원화 약세)이 강점으로 작용했다. 환율이 크게 오른 1997년 외환위기 때 수출 비중은 35퍼센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는 43퍼센트에 이르렀다.


현재는 경상수지 흑자를 통해 들어오는 달러를 국외 투자를 통해 다시 외부로 내보내고 있다. 이를 통해 환율 강세를 막고 민간의 달러 보유량을 늘려야 하기 때문이다. 외부 충격으로 외환 시장 변동성이 커지면 이렇게 축적된 달러가 공급되게 하면 되는 전략을 시행해왔다.


이제 미국 달러 고정환율제를 시행하면 환율 리스크는 대거 감소하고 제조업 등 기업은 기술개발과 마케팅 등 기업, 무역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외환 운영도 위험 회피 전략이 아니라 해외 투자, 기술 도입 등 긍정적이 생산적인 일에 치중할 수 있게 된다.


다만 미국의 인플레이션 등 물가, 금리 등을 감안하여 정기, 비정기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책을 가지고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한국은 사실상 미국 달러와 연동하는 준 기축통화국의 지위와 역할, 그리고 경제적 이익을 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미국과 동등한 기축통화국이 아니면서 기축통화국 흉내를 내면 안 된다. 미국이 자국 통화를 대량 찍어낸다고 해서 우리가 이를 따라 하면 안 된다. 특히 '정부는 파산하지 않으므로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에 대해 화폐를 찍어 대응해도 된다'는 현대 통화 이론(Minutern Monetairy Theory. MM)을 경계해야 한다.     


둘째, 기업 규제를 강화하거나 과도한 국유화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 


남미 국가의 길을 경계해야 한다. 남미 국가들은 아시아 국가보다 먼저 성장했지만 아직도 중진국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제는 불안정성의 대명사가 됐다. 아르헨티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아르헨티나 사람처럼 부유하다”라는 표현이 쓰일 정도로 잘 살았다.


자원 부국인 데다 철도망의 중심지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남미의 밀과 고기가 모여 다른 국가로 수출되는 글로벌 무역의 중심 국가였다. 자연스레 전 세계에서 자본이 유입됐다. 무역과 경제를 통해 세계 시장과 연결되고 자본을 통해 세계 자본 시장과 연결됐다. 이런 아르헨티나가 지금처럼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2020년 현재 아르헨티나의 주식 시가총액 10위 기업의 구성을 보면 통신 1개 사, 에너지 및 원자재 5개 사, 전기 1개 사, 은행 3개사다. 제조업체라 할 만한 기업이 없다. 아르헨티나는 신문의 국제면에서 경제, 금융위기라는 말이 나올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나라가 됐다. 왜 이렇게 됐을까?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제조업 기반이 없어 자본을 축적할 기회를 잃어버렸고, 축적된 자본이 없으니 생산성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은 1947년 군사 쿠데타 이후 경제 독립을 내세워 철도, 전화, 가스, 전기 기업을 국유화하고 외국 자본을 배제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페론주의 Peronism의 부활과 이에 저항하는 시위가 난무하면서 쇠락해갔다.

    

셋째, 제조업의 혁신을 통해 새로운 산업에서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 투자를 계속해야 한다. 


혁신은 투자에서 나온다. 혁신은 또한 고통을 유발한다. 혁신 기업의 성장을 도모하다 보면 퇴출되는 기업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적절한 구조조정을 통해 이를 안착시켜나가면서 혁신을 이어가야 한다. 우리는 그 효과를 외환위기와 뒤이은 코스닥 열풍에서 경험한 바 있다. 구조조정을 바탕으로 대규모 기술 투자가 이루어졌을 때의 효과를 주시해야 한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 동안 구조 개혁에 실패했다. 특히 1980년대 자산 버블이 꺼지면서 보유하게 된 막대한 부실 채권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투자가 활성화되지 못했다. 또한 세계 산업 지형이 인터넷 중심으로 재편될 때 미·일 반도체 전쟁과 엔고에 대처하느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90년에는 시가총액 기준으로 세계 10대 IT 기업에 일본 기업이 8개 포함돼 있었지만 2000년에 들어오. 면 목록에서 일본 기업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기업·금융·노동·공공 4대 부문에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겪었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2000 년대 중반부터 그 과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는 GDP 기준으로 1990년 일본의 9퍼센트에서 지금은 35퍼센트까지 성장했다.


투자는 자칫하면 경기 변동을 확대하거나 과잉 투자에 따른 버블을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코스닥 버블에서 보듯이 투자는 미래의 성장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 제조업의 함정을 벗어나는 길은 혁신 부문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투자 기회까지 생겼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술 패러다임의 전환기는 기술 추격 국가가 기술 선진국을 앞설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는 F1 자동차 경주에서 코너를 돌 때 상대방을 추월할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코너에서 뒤처지면 직선 길에서는 따라잡기가 어렵다. 기술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시기에는 성장하는 분야에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투자해야 한다. 소소한 정책을 동원하는 것만으로는 장기 저성장에서 탈출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서비스 산업을 새롭게 키워가야 한다. 


서비스 산업의 부가가치, 일자리 창출 효과는 크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은 제조업 대비 절반 수준이다. 고령화 시대에 주목받고 있는 의료와 관광에 과감하게 '산업'이라는 말을 붙이고 키워가야 한다.    

 

이 네가 중 가장 중요한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미국 달러 고정환율제(필자 명명)'이다.


칼럼니스트 박대석


참고한 책과 자료


         https://www.bok.or.kr/portal/main/contents.do?menuNo=200407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happykdic&logNo=220175312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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