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은 아씨들'(2019)을 다시 보며
거의 일주일에 가까운 설 명절 연휴를 포근하게 보낸 직후 찾아온 입춘 한파 속에서 영화 한 편을 고르고 노트북을 펼친다. 3년 전 이 지면 3월호에서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2020)를 다루며 조지 엘리엇의 소설 속 한 대목의 인용으로 마무리한 적이 있다. “우리가 이 땅을 이토록 사랑할 수 있음은 이 땅에서 보낸 유년 시절 때문이며,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따던 그 꽃들이 봄마다 이 땅에서 다시 피기 때문이다.”* 봄을 함께 맞이하자며 독자들에게 편지처럼 건넸던 이 이야기를 혹시 기억하실는지.
위 소설 속 구절은 그레타 거윅의 영화 <작은 아씨들>(2019)에서 대사로 등장한다. 조와 베스 두 자매는 바닷가에 앉아 책을 낭독한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네 자매 중 둘째인 조는 글을 써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셋째 베스는 넷 중 제일 심성이 착하고 감수성이 풍부하지만 병약해 바깥출입을 많이 하지 못하고 집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뉴욕에서 글을 쓰며 하숙하던 조는 베스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소식에 고향으로 달려오고 동생에게 힘을 주기 위해 몇 년 전 네 자매가 함께 거닐었던 바다에 온 것이다.
"고난이 많았기에 즐거운 이야기를 썼다."
-루이자 메이 올컷(1832~1888)
문학이나 영화 속 등장인물의 형제자매들 중 누군가 아프거나 단명하는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지만, 여기서 이 대목을 언급하는 건 조가 글을 쓰는 이유에 베스의 존재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베스를 위해'라는 제목의 글을 쓸 정도로. 원작을 쓴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자전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소설 『작은 아씨들』은 자매를 중심으로 가족들의 평범한 일상을 연대기처럼 묘사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메그와 조 두 언니가 자기만 쏙 빼놓고 재밌는 연극을 보러 가는 게 심술이 났던 막내 에이미는 조가 아끼는 원고를 서랍에서 찾아내 불에 태워버린다. 이 일로 조와 에이미는 크게 다투지만, 다음날 조가 이웃 청년 로리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러 가는 길에 에이미가 따라나섰다 빙판이 녹아 물에 빠지는 일을 계기로 화해하게 된다.
팔리는 글을 쓰기 위해 골몰했던 조는 가족의 결혼과 상실을 두루 겪으며 훗날 자기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가족이 티격태격하고 웃고 하는 이야기를 누가 읽겠어? 중요한 것도 없는 얘기잖아"라고 조는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철없는 막내 같기만 하던 에이미가 놀라운 한 마디를 던진다. "그런 걸 안 쓰니까 안 중요해 보이는 거지. 계속 써야 더 중요해지는 거야." 이 이야기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작은 아씨들>은 7년에 걸친 기간 동안 일어나는 가족의 일상을 과거 각 시점과 현재의 교차편집을 통해 그 자체로 드라마틱한 서사로 만들어낸다. 원작 소설이 워낙 방대한 분량으로 쓰인 탓에 압축된 장면들도 존재하지만, 영화만으로 따라가는 데에 큰 무리가 없다. 자매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집에서 어설픈 분장을 갖춘 채 연극을 하고, 이웃에 사는 남자를 좋아하고, 무도회에서 함께 춤을 추는 그런 평범한 일상들이 모두 소설이 된다. 조가 쓰는 이야기의 소재로 하나씩 빛을 얻기 시작한다.
19세기 중반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의 빛나는 점은 풍경과 의상을 통해 사계절을 충실하게 묘사하되 주로 겨울과 봄을 사이로 많은 에피소드를 펼친다는 점이다. 크리스마스에 가난한 이웃집에 식사를 대접하는 모습과 친구들에게 멸시받지 않기 위해 무리해서 드레스 옷감을 사는 장면이 교차하는가 하면, 봄이 되자 조는 자신이 쓴 원고를 원치 않는 방향으로 편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출판사 관계자와 결말 묘사에 대한 담판을 짓는다.
눈 녹고 싹이 돋는 계절이 되면 지난날 별로 대단한 이야기가 되지 못했던 순간을 돌아보게 된다. 여전히 움츠린 채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들이 내 일부라고 쉽게 착각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문학이 그렇듯 영화 역시 당신은 고결하고 다른 무엇에 의해 억눌릴 수 없는 천성을 갖고 있다 말해 준다. 훗날 루이자 메이 올컷의 전기를 쓴 코닐리아 메그스 역시 “『작은 아씨들』은 자연스럽고 사실적이었으며 복잡하지 않은 데다 억지로 감동을 자아내려 하지 않았는데, 이런 책을 소녀들이 그토록 기다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라고 회고한다. 지금 시시해 보이는 시절들이 결국 내 고유한 서사가 된다. 다시 맞은 이 봄이 그 서막이 될 것이다.
*조지 엘리엇, 『플로스 강변의 물레방아』 중에서
*본 리뷰는 기상청 소식지 <하늘사랑> 2025년 3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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