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회계의 언어가 IFRS이듯이
증권계좌에 주식 종목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 중 다수는 증권사 모바일 앱 등을 통해서 또는 전자공시 알림을 통해 '공시가 떴을 때' 밀려오는 낯선 긴장감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통상 그 알림은 종목명과 공시의 제목 정도만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직접 공시를 읽어봐야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투자에 가볍게 참고하는 정도의 정보이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제목만으로 '아 뭔가 터졌다'라는 직감을 하게 만드는 것들이 담긴다.
몇 조 원 규모의 계약을 수주했다고 공시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경영권 분쟁에 휘말려 경영진 해임 등을 의안으로 하는 주주총회의 소집을 알리기도 하고 막대한 규모의 주주배정 유상증자를 결정했거나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임상시험을 마친 신약의 품목허가를 승인받았다는 소식이 나오기도 한다. 공무원 시험의 약자인 공시도 아니고 부동산 따위의 '공시'지가도 아닌, '기업공시'에 대해 말하려니 벌써부터 뭔가 끓어오른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투자자라면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서 마땅히 몇 번은 보았을 공시를 제출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서 그런 것 같다.
모든 상장기업에는 최소 1명 이상의 공시담당자가 있어 그 사람은 한국거래소에 'A회사의 공시담당자'로 신고(등록) 되어 있다. 1년에 한 번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교육 연수도 있고 현저한 시황 변동이나 언론 등을 통해 보도된 확인되지 않은 풍문과 같이 회사에 무슨 일이 있으면 한국거래소나 경우에 따라 금융감독원에서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바로 공시담당자다. 개인 투자자들이 흔히 묻는 "회사에 뭔 일 있어요?"라는 질문을 조금 다른 결로, 훨씬 더 공적이고 정제된 방식으로 물어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고, 공시담당자는 그냥 법령과 규정에 맞게 공시해야 하는 사항이 벌어졌을 때 필요한 내용을 잘 공시하면 된다.
여기서 말하는 법령과 규정은 한국거래소 공시규정, 자본시장법(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등이다. 증시에 상장한다는 건 기업을 공개한다는 뜻이고, 기업 공개는 자금을 조달하는 등 여러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주식시장의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회사 주식을 거래할 수 있게 되는 만큼 금융당국에서는 투자자를 보호하고 폭넓은 투자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전자공시시스템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공시(Disclosure)는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사실인 뭔가를 외부에 드러낸다는 뜻이다. 회사가 투자자(혹은 잠재 투자자)에게 어떤 것을 알리기 위해 쓰는 공적인 언어다. 기업 회계처리에 있어서 국제적으로 쓰이는 표준(IFRS)이 있는 것처럼 공시도 수많은 업종과 규모의 기업들을 아우를 수 있도록 공통된 체계와 양식이 있다.
앞선 글에서 말한 전화 응대가 1대 1로 일어난다면 공시는 회사 대 그 공시를 보게 될 모든 사람 간에 일어난다. 다시 말해 공시로 회사가 말하는 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내용으로 접근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전달된다. 공시는 특정 투자자에게 편향적으로 정보가 제공되는 걸 막기 위해 존재하는 체계이기도 하다. 수많은 공시들을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으므로, 우선 공시의 종류는 첫 번째로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다. 금융감독원의 기업공시 실무안내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다.
1. 유통공시 - 정기공시(분기, 반기, 사업보고서), 주요사항보고서, 자기주식 취득 및 처분 등을 말함
2. 발행공시 - 증권의 모집 및 매출, 증권신고서, 투자설명서 등을 포함함
3. 지분공시 - 최대주주, 주요주주, 임원 등 주식 보유 및 소유 상황에 대한 보고, 거래계획 보고, 의결권대리행사권유제도 등을 지칭함
그리고 한국거래소 소관인 공시들을 고려하면 아래와 같은 성격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1. 수시공시 - 유통시장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투자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보에 대한 공시/신고 의무사항을 규정한 제도
2. 공정공시 - 기업이 공시되지 않은 정보를 특정 투자자에게 제공하고자 할 때 그 정도를 모든 시장 참여자들이 알 수 있도록 그 특정인에게 제공하기 전 공시하는 제도
3. 자율공시 - 주요 경영사항(주로 수시공시) 외에 투자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회사가 판단하는 사항을 사유 발생 익일까지 신고할 수 있게 한 제도
4. 조회공시 - 기업활동과 관련한 풍문이나 거래량 변동 등 한국거래소가 별도로 정한 기준에 따른 사유가 발생했을 때 거래소가 기업에 사실 확인을 요구해 공시하도록 하는 제도
앞으로 이어질 글들에서 공시를 실제로 제출하는 공시담당자가 무슨 업무를 하고 어떤 일과를 보내는지에 대해서도 두루 포함할 예정이다. 공시를 제대로 읽기만 하면 기업활동에 대한 거의 모든 내용과 현황을 그 세부를 파악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시장참여자가 공시를 성실히 읽는 투자자들이었다면 이 글을 아마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분공시 중 '주식등의대량보유상황보고서' 서식을 통해 우리 회사 최대주주의 특수관계인인 등기임원 중 한 명이 보유 주식의 일부에 대해 담보대출 계약을 체결했다는 내용(변경보고)을 공시했다고 해볼까. 그러면 전자공시시스템 알림을 통해 공시가 제출되었음이 알려진 후 이런 전화가 한번쯤은 꼭 걸려 온다. "이럴 때일수록 최대주주가 솔선수범해서 주식을 대량 장내매수 해야지 또 판 거 아닙니까!" 물론 최대주주 본인의 주식 보유 현황은 전혀 변동이 없음을 공시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건 아무래도 중요치 않다. 기존에 공시한 유상증자(제3자배정) 납입 기일을 정정하는 정정공시를 제출해도 가끔 '얼마 전에 증자 결의하지 않았냐 또 무슨 돈이 필요해서 증자를 다시 하냐'는 문의가 오기도 한다.
담당자 입장에서는 공시를 회사 입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정확히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이 공시 최대주주 주식 판 거 아님! 임원들도 주식 안 팔았음! 누가 돈이 급해서 담보대출 좀 받았을 뿐임! 빨간 글씨로 첫 장에 이렇게 쓰면 어떨까. 그럼에도 그건 어떤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공시는 기본적으로 회사가 쓰고 싶은 마음대로 쓰는 언어가 아니라, 서식과 규정에 맞게 정해진 틀 안에서 작성해야 한다. 물론 한때 일명 '모험가'라는 별칭을 가진, 모 요식업 분야 기업(지금은 상장폐지 되었다)의 투자자 중 한 명이 지분공시를 통해 기재한 갖가지 문구들이 각종 기행처럼 유명세를 타기도 했는데... 그 공시가 실제로 문제가 되지 않은 건 지분공시에 필요한 보유 현황 보고는 제대로 했기 때문이다. 모 증권회사의 공시담당자가 흰 바탕에 흰색 글씨로 기재한 "공시업무 지겨워!!!"가 담당자들 사이에서는 유명하다. 그래 지겨울 수 있지. 그렇지만 우리는 이 지겨운 업무를 담당자인 한 계속해서 해야만 한다. 몇 주 뒤면 3분기 실적 공시자료를 제출 마감하는 날이 도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