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공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
상장기업이 금융감독원 또는 한국거래소 시스템을 통해 공시해야 하는 것(의무인 것)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의무가 아닌 것)의 경계는 대부분 정확하게 나뉜다. '최근 사업연도 말 자기 자본의 100분의 10 이상에 해당하는 타법인주식 및 출자증권 취득에 관한 결정이 있을 때'와 같이 공시를 해야 하는 요건이 공시규정에 명쾌하게 기재되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 자본총계의 10% 미만에 해당되는 취득 결정은 공시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공시는 때로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시점과 판단의 영역이 되기도 한다.
당겨 말하자면 공시담당자가 회사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챌린지 들은 크게 둘 중 하나다. 규정상 공시해야 하는 사항에 대해 내부에서 누군가 물어본다. "그거 공시 안 하면 안 돼?"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거 공시하면 안 돼?" 의무인 걸 안 하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과, 공시대상이 아닌 걸 공시할 수 없냐는 질문이다. 관건은 발행회사의 공시담당자가 내부에서 그와 관련한 질의를 받았을 때 답변하기 위해서는 공시규정 또는 한국거래소의 실무 해설서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서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공시대상이다 또는 대상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면 된다.
가끔은 회사 내부에서 공시담당자의 역할을 금융감독원 또는 한국거래소와 '협의', 여기서는 속된 말로 '네고'(주로 중고거래 시 가격 에누리를 하는 행위를 지칭) 또는 '딜' 하는 것인 것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공시대상인 내용을 거래소와 잘 협의해서 공시를 안 해도 되도록 '막아내'거나, 공시대상이 아닌 걸 거래소와 잘 협의해서 전자공시시스템에 노출될 수 있도록 잘 '설득'하는 영역인 것처럼 착각되는 것이다.
일단 둘 다 아니다. 많은 상장기업 오너 또는 임원의 착각 중 하나는 공시를 전자공시시스템을 통해 투자자 모두에게 노출시킬 수 있는 회사 게시판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공시의 특성과 성격상 정확하게 짚어야 할 것은 공시는 회사 입장에서 쓰는 게 아니라 투자자 입장에서 쓰이는 언어라는 것이다. 회사가 쓰고 싶은 대로, 가 아니라 정해진 규정과 서식에 맞게 투자자 보호를 위해 투자자 정보 제공을 위해 기재하는 것. 많은 경우 회사가 쓰고 싶은 대로, 다시 말해서 회사가 보여주고 싶거나 강조하고 싶은 것을 살리는 쪽으로 쓰는 게 공시가 아니라 최대한 사실의 영역에 충실하게 건조하고 중립적인 언어를 쓰게 된다. 판단은 회사가 해주는 게 아니라 투자자의 몫이니까.
이런 문제는 수많은 상장기업에서 공시담당자 한 명이 대부분의 실무를 떠안아야 한다는 데서 비롯한다. 모든 회사가 대기업처럼 충분한 인력을 가지고 체계적인 의사결정과 업무 분담 과정을 통해 공시의 각 분야별 법무 및 실무 검토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중소규모의 코스닥 상장기업일수록, 홍보 또는 대외협력 또는 재무회계 관련한 부서에서 직원 한 명이 공시업무를 '전담'한다. 앞선 글에서 쓴 '일당백'이라는 표현이 사실 이 뜻이다.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회사 내의 모든 사람을 통틀어 공시업무에 대해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실상 그 회사에서 공시와 관련한 모든 것을 '꿰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공시 내용이 틀리거나 공시해야 할 것을 놓치거나 여타의 사유로 공시 규정을 위반하는 일이 생겨 불성실공시법인 지정에 따른 벌점이 누적되는 등 특정한 상황이 되면 회사의 상장유지에 위험을 초래하는 일도 생긴다(상장적격성 실질심사 대상이 된다).
그간 타사 공시담당자들 여럿과 이야기를 나눠온 경험치에 따르면, 공시담당자가 한 명인 회사의 업무 상황이 대체로 비슷한 면이 있다. 업무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 공시를 포함해 PR과 IR 업무 자체가 회사의 대외적인 메시지를 공식적인 방식과 경로로 전달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외부로부터 오는 문의를 주관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공시담당자가 되는 순간, 한국거래소에 'A회사의 공시담당자'로 신고되는 순간 마치 최전방에서 맨몸으로 리스크를 떠안는 요원이 된 기분이다.
'그거 공시 안 하면 안 돼/하면 안 돼?' 같은 질의의 상당수 내용은 대부분 내가 자체적으로 파악하고 정확한 답변이 가능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예를 들어 오너 또는 임원)은 재차 묻는다. 그게 확실한 지 금감원(또는 거래소)에 알아봐. 로펌에 자문 구해봐. 그런 사례로 공시한 회사 없는지 한 번 찾아봐. 이미 알아본 것에 대해 한 번 더 알아보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소위 말하는 '현타' 같은 것이 밀려올 때도 물론 없지 않다. 그럼에도 공시담당자로 일하면서 느낀 건 공시업무가 회사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조망하고 회사 경영상의 여러 의사결정에 대해 경영학적, 거시적 사고로 헤아릴 수 있는 최적의 분야라는 것.
앞선 글에서 담당자로서 누군가의 연락이나 컨펌 따위를 기다리는 일에 대해 말한 것처럼 여기서는 나만큼 공시규정에 대해 알고 있을 리는 없는 회사의 누군가가 공시에 대해 물어오는 것에 대해 내가 답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깨닫고 성장하게 되는 이 업에 대한 이해도다. 물론 언제나 주의하거나 상기해야 하는 점은, 세상에 나보다 이 업을 뛰어나게 이해하고 있는 고수가 많고 내 경력은 아직 일천하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