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경
“그곳에서 살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라이프앤페이지, 2020
내게도 그런 곳이 있을까. 그곳에 살지 않았더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집. 이것도 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결혼과 출산’이라는 집을 꼽아야겠다. ‘결혼과 출산’이 합쳐지면서 집은 내게 낯선 곳이 되었고 새롭게 그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으니까.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장만한 후 한동안은 집을 꾸미고 가꾸는데 열성적이었다. 쉬는 날이면 집에 있는 게 좋았고, 이불 빨래를 하고 음식 만들기를 즐겼다. 회사를 다니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 주말에 하는 집안일은 삶의 기본을 보살피게 해 주었다. 생활에 질서와 안정을 불어넣음으로써 소모적인 직장 생활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가치를 보상받는 것 같았다. 성인 두 명이 사는 집은 크게 어지럽혀질 일이 없었고 그때만 해도 남편이 자발적으로 청소기를 돌렸으니 부담도 덜 했다. 거기다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고 요리를 즐긴다는 데서 생기는 자부심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러니 집안일에 열심이던 마음엔 인정에 대한 욕구 또한 숨어 있었을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집의 질서는 흐트러졌다. 나만의 방은 사라졌고 아이 물건이 집안 곳곳을 장악했다. 남편과 같이 쓰게 된 방에는 남편의 물건과 옷이 내 것과 뒤섞여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갔다. 남편은 주머니에서 꺼낸 영수증과 동전을 고스란히 책상 위에 놓아두었고 매일 아침 그걸 버리는 게 내 일이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었더라면 내 눈에도 보이지 않았을까. 잠에서 깬 아이를 먹이고 입히느라 세수할 겨를 조차 없는 나와 달리 그는 매일 아침, 저녁에 감은 머리를 다시 감고, 드라이를 하느라 삼십 분도 넘게 화장실에 머물렀다. 그러고는 흠뻑 젖은 수건을 남겨두었다. 누군가는 온전히 자신을 꾸미기 위해 시간을 쏟는 사이 다른 이는 아이 뒤치다꺼리로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허둥지둥 씻고 나면 젖은 수건에 얼굴을 닦아야 했는데 물이 흥건한 수건에 얼굴을 닦을 때마다 슬퍼졌다. 내 삶까지 축축해지는 것 같아서.
여러 사정이 맞물려 출산과 함께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다. 아이는 여기저기 장난감을 늘어놓았고 치워도 돌아서면 다시 어지럽혀져 있는 날의 연속이었다. 두 명은 어지럽히고 한 명은 늘 치우는 생활의 반복. 나날이 쌓여가던 스트레스는 어느 날 폭발했고 모든 상황이 부당하게 느껴졌다. 남편이 출근한 후, 침실에서 폭발하듯 소리를 질렀던 아침이 떠올라 아찔해진다. 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물건과 쓰레기는 내 눈에만 보이는 것 같았고, 그걸 보지 못하는 사람은 책상 위에 쌓인 영수증과 젖은 수건의 존재 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집은 우리에게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p.26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누군가에겐 “일과가 끝난 뒤 돌아가는 휴식의 공간을 집이라고 한다면” 나에게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보수도, 출퇴근도, 휴일도 없이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가사와 육아 노동의 현장. 쓸고 닦고 치우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현실이 암울해졌다. 내가 흘린 것도 아닌 물건을 치우다 보면 혼자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것 같아 억울해졌다. 그럴수록 함께 사는 이를 원망하게 되고 내 삶을 부정하는 일이 잦아졌다. 말끔하게 정돈된 아름다운 집을 꿈꾸었지만 그런 집은 나의 끝없는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내 몸의 고단함으로 얻는 질서와 안정은 더 이상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완벽한 집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거나, 무언가를 덮기 위한 가림막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이 없는 가사에서 벗어나고 싶어 눈을 감기로 했다. 서재였지만 어느새 창고가 되어버린 방, 그 방으로 들어갔다. 장난감이 널린 거실과 그릇이 쌓인 주방이 보이지 않게 문을 닫았다. 옷과 가방, 선풍기와 제습기 등 철 지난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책상 앞에 앉으면 다 괜찮았다. 거기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졌다. 분노와 불만, 불안과 두려움을 잠재울 수 있었고 의무와 역할 없이 온전히 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가사의 굴레와 완벽하게 정리된 집이라는 환상에서 조금씩 벗어났던 것 같다.
책상 앞에 앉으면 하얀 백지를 펼쳐 놓고 무작정 적어 내려갔다. 마음속에 뒤섞여 있는 것들을 종이 위에 쏟아 놓고, 다시 읽으며 분류하고 정리했다. 많은 것을 잘라내고 바로 잡으면서, 적절한 단어를 찾아 제대로 문장을 만들면서, 숨어 있던 내 안의 욕구에 다가갔던 것 같다. 무질서한 방은 더 이상 나의 내면을 흔들 수 없었다. 설령 그런 날이 오더라도 빈 종이를 꺼내 마음을 쏟아 정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 시간이 쌓이자 새로운 꿈도 만들어졌다.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이들을 만났고 읽고 쓰는 일이 경제활동으로 확장될 기회를 발견하기도 했다. 글을 계속 쓰기 위해서라도 방은 절실하다. 창고이지만 유일하게 내가 될 수 있는 곳, 나만의 방은 더 이상 문학 속 은유가 아니다.
매일의 가사와 육아는 나만의 기준을 세워 최소한 것으로 한정했고, 가능한 나를 위해 읽고 쓰는 일에 시간을 들이고 있다. 그러느라 청소의 주기는 길어졌고 보이지 않는 곳에 때가 쌓였을 것이다. 아이 물건으로 늘 어수선한 집은 예전처럼 아름답지도 않다. 그런데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완벽한 집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불완전한 우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끔하게 정돈된 집으로 내면의 안정을 찾으려 했던 헛수고를 그만두고 진짜 내면을 채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으니까.
하재경 작가는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집을 통해 공간의 의미와 사람과 사회와의 관계를 되새겨본다. 집안의 흥망성쇠를 거치며 경험한 결핍과 상실, 자기 몫을 하는 어른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부모와 타인의 자리를 돌아보기까지, 그녀가 거쳐왔던 집들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든 번지고 스며들 수 있는 무늬를 그려낸다. 작가 개인의 경험이라 고유한데도 이상하게 보편적인 감정을 자아낸다. 그 속에서 여성과 쓰는 이로서 공간의 의미를 고민했던 저자의 목소리가 잠잠하지만 단단한 힘을 가지고 흘러나온다. 그 소리에 홀린 듯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욕망과 집에 대한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내어 보고 싶어 졌다.
“어떤 이에게는 공간의 독립이 자아의 독립을 의미한다”는 저자의 말에서 공간에 몰두하고 집이 있지만 진정한 집은 없다고 느꼈던 내 마음의 진위를 발견했다. ‘자기만의 방’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독립’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자아의 독립이란 경제력에서부터 자유로운 시간의 마련까지 다양한 자립의 힘을 내포하는 일일 테고. 집은 있으나 ‘자기만의 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 안의 모순이 여기서 생겨났던 것 같다. 내겐 시도 때도 없이 엄마를 필요로 하는 작은 아이가 있고, ‘자아의 독립’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에.
누군가와 공유하는 공간으로서 집의 의미를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공간이 늘 중요한 문제였듯, 가족과 공유하는 집에 대한 꿈도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다만 공간이 주어진다고 모두에게 ‘집’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작은 방 하나라도 누구에게 침해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시간과 함께 주어질 때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공간을 가진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독립과 같이 사는 이들의 배려로 온전해질 것이다.
나만의 공간을 꿈꾸며 기다리고 있다. 집이란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이 담기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집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의 시절을 돌아보게 되는 일이고. '결혼과 출산'이라는 집의 시간은 아직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한 시절을 통과하고 나면 다른 의미로 이 집을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이 집의 의미가 완성되는 날을 향해가며 날마다 작은 기록을 덧붙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