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목
병원에 들렀다 오는 길에 상인분이 갑자기 군밤 한 개를 손에 쥐어주셨다. 원래 경계심이 많아서 이런 건 함부로 받아먹지 않는 편인데 너무 마구잡이로 쥐어주시는 통에 아무 생각 없이 주워 먹어버렸다...? 맛있었다....?
그냥 집에 가려다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입맛이 까다로워서 밖에서 사 먹는 커피는 꽤 가려먹는 편인데 운이 좋게도 집 근처에 종종 먹는 브랜드 커피집이 생겼다. 빽해서 콜드브루로 사 왔다. 참고로 나는 얼죽아다. 돌아가는 길에도 또 군밤을 쥐어주셨다. 맛있었다.
생각해 보니 내일 그의 생일이다. 다시 또 빽 해서 마트로 들어간다. 그도 나도 평소에 굳이 미역국을 즐겨 먹진 않기에 우스갯소리로 "내년엔 간편 즉석 1인 미역국 같은 거나 할까?", "그거 괜찮은데,"라고 늘 얘기하지만, 둘 다 실제 행동으로 옮겨본 적은 아직 없다. 정육 코너에서 한우국거리 1인분과 돼지갈비찜을 요청한다. 그는 할배나 진배없어, 이빨도 연약하고 위장도 연약하다. 그래서 질긴 소갈비찜은 못 먹인다.
잡채는 반찬가게에서 그냥 샀다. 왜냐하면 그는 어차피 잡채를 그다지 안 좋아하니까 그냥 기분 내기일 건데, 그에 비해 손질해야 하는 재료는 너무 많아진다. 그리고 반찬가게에서 파는 김밥이 맛있다. 사실 김밥 먹으러 간 거다.
돌아오는 길에 군밤을 세 번째로 쥐어주신다. 더 이상 그냥 받아먹기엔 면구해서 세 봉에 만원에 받아왔다. 갈비찜에 넣으면 될 것 같다. 사장님이 장사를 좀 할 줄 아시는 것 같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음식을 하려면 오전에 다 안 끝날 것 같아서 장본 것들을 정리하고 재료 손질 해 놓고 고기 핏물이 빠지도록 소주 넣고 재워두고 있는데 남편 놈이 갑자기 카톡으로 시비를 건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다. 내 화는 153이다. 제 발 눈치 좀 챙겨 오빠.
10-03-금
어제 그가 집에 돌아와서 냉장고를 쓱 보더니 눈치를 챙겼는지, "생일이니까 넘어가줘"라고 했다. 여전히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지만, 허리춤까지 누그러뜨리고 알겠다고 했다.
결혼 6년 차.
한때는 매일 7첩 반상, 9첩 반상 해먹이며 예쁘게 사진 찍어 올리는 새댁의 면모를 자랑한 적도 있으나, 살다 보니 다 부질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58키로던 남편 놈을 69키로까지 찌워놓으니 왜 나는 20키로가 찌는 건지 모르겠는 거지.
그의 찌지 않는 체질은 시댁 내에서도 아주 유명했던 거라, "아버님, 제가 오빠 이만큼 찌워놓느라 20키로나 쪘지 뭐예요~^^*"라고 하니 눈을 못 마주치시는 거다.
이제는 남편도 회사에서 법카 받아 밥 먹고 다니고, 나도 끼니에 욕심을 안 내게 되었으니 주말 정도가 아니면 끼니를 달리한다.
그러니 생일인데 그 마음이 서프라이즈 정도는 해주고 싶은 거지.
허나 고양이를 키우는 집은 그마저도 할 수 없어 유감이다. 시끄러울까 봐 문을 닫고 싶은데 열어달라고 양방향에서 벅벅 긁어대니 진퇴양난이 따로 없다. 결국 "뭐 해..?"라며 눈을 비비는 그가 방에서 나오면 "어어 방해하지 말고 가서 다시 누워..."라고 돌려보낸다.
그렇게 아침 아홉 시쯤 눈을 뜨면 어제 준비해 둔 재료들을 꺼내고 요리를 시작한다.
갈비찜 양념이 생각보다 부족하네, 오히려 좋아 고추장을 더 넣자.
마침 어제 작가님들 톡방에서 미역국 얘기가 나왔는데 쌀뜨물을 넣고 끓이라던데.
어 그런데 집에 왜 들기름이 없지? 참기름만 세 통이네, 하지만 괜찮아 직접 짠 마법의 참기름이 있으니까.
불고기 전용 전골냄비에 양파 자작하게 깔고 소 불고기도 올리고.
야채들을 잘게 다져 넣고 명란을 짜 넣은 두툼한 계란말이까지 말고 나면 예상대로 벌써 점심.
쓰는 꼬락서니를 보면 어딘가 이상해 보이겠지만 괜찮다. 사실 나는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한다. 그래서 간도 안 본다. 얼마쯤 자신감에 기인한 거니 괜찮다.
그리고 몇 시간 내내 불 앞에서 요리한 나는 입맛이 뚝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먹을 만 해?"
"응, 엄청 맛있다"
"미역국 절대 남기지 마,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마 알겠어?"
"어?…어어…"
"그리고 어머님께 내가 이거 차려줬다고 사진도 보내드려."
"으응…"
나는 가끔 그가 불쌍하다.
결혼하자마자 아파버린 나와 함께 사는 그가. 그럼에도 욕심만 그득그득해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하기 싫은 것도 많은 나랑 사는 그가. 겁은 더럽게 많아서 여기저기 치이면서도 단 한 마디도 못하는 주제에 지한테만 깡다구 있게 쏘아대는 나랑 사는 그가. 그러면서도 세상에 살아가면서 단 한 사람, 너한테라도 깡다구 부릴 수 있는 게 어디냐며 가불기나 걸어대는 나랑 사는 네가. 가끔 좀 불쌍하다.
생일 축하해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