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피하고 싶었던 그 일을 마주해야 했다.
나는 그이처럼 거리가 멀다는 핑계를 댈 수도, 기차표 예매에 실패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으니, 그저 연락이 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냥 그렇게, 평화롭고 조금은 안온하게 지나가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랐다. 싸가지 없는 딸년이 대부분의 날을 차단해 놓는 일이야 이제는 흔한 일이 되었으니, 이번에도 그러려니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당신은 기어이 그분의 연락처를 빌어 내게 연락해 온다. 내가 그분의 연락처까지 차단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당신의 부고 연락마저 놓쳐버리는 그런, 정말 몹쓸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아서라는 걸… 당신은 모르겠지….
별수 없이 차단을 풀었더니, 몇 달 전에 마지막으로 나눈 문자 메시지가 눈에 걸린다.
“아빠랑 만나볼래?”
하,
그랬지. 그래서 차단했었지.
엄마는 살면서 나에게 수천 번의 잘못을 저질렀다. 대부분의 날은 어린 나를 방임했고, 종종의 날은 학대했으며, 가끔의 날은 나를 살해하려 했다. 어렸던 나는 당신을 사랑했기에 대부분의 날은 이해했고, 종종의 날은 마음이 아팠으며, 가끔의 날은 사무치게 억울했다.
내가 마침내 당신에게서 자력으로 벗어난 이후, 당신은 내게 수없이 사죄를 건넸다. 여전히도 당신을 사랑했던 나는 모른 척 그 사죄를 받아주었으나, 그 긴 세월 동안 당신은 몇 번이고 다시 내 상처를 후벼 파고, 덧내고, 들쑤셨다. 그리하여 나는 여전히도 당신을 사랑하지만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커져 버린 탓에, 이도 저도 못 하고 늘 그 마음에 스스로 찔려 피 흘리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풀메이크업을 하고 명품 가방까지 들쳐메며 단단히 차려입는다. 엄마를 만나는 일이란 나에게 그런 것이다. 여느 집 딸처럼 대충 편하게 걸쳐 입고 맨얼굴로 마음 편히 마주할 수 없다. 전투를 치르는 마음으로 세 시간 전부터 결연히 준비한다. 그리하여 도착한 그녀의 집 앞에서 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는, 남몰래 눈물을 찍어 누른다.
아… 진짜 돌아가고 싶다. 토할 것 같아.
함께 식사하자고 데려온 곳이 결국 이곳이라니. 힘들었던 시절이 생각나 분명 가기 싫다고 말했었는데….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먹음직스러운 진갈색 갈비가 익어간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열세 살, 내가 살던 그 빌라가 정면으로 보인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아빠가 남긴 빚에 시달리다 쫓기듯 이사 온,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허름했던 빌라. 층계의 높낮이도 일정하지 않은 데다, 불도 깜빡깜빡 들어오다 말던 복도. 목에 걸린 외로운 열쇠를 주섬주섬 꺼내 꽂으면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던 녹슨 문소리. 얼마쯤 어둡고, 쿰쿰했던 냄새.
사실 그런 건 다 괜찮았다. 깊이 들이마신 숨에 심호흡하고 집에 들어가, 매일 울부짖는 엄마를 안고 위로하다가 그 원망이 문득 딸년을 향하는 순간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되고 나면, 산발인 머리와 엉망진창인 마음을 부여잡고 밤늦은 시간 그저 집 밖으로 뛰쳐나가야 했던 것이니.
나는 그때에도 겁 많고 깡 없는 어린애였어서, 시내로 나가자니 무서운 언니들한테 삥이나 뜯길까 봐 두려웠다. 그저 혼자 슬픔을 달랠 곳이 필요했던 것이라, 그 허름한 빌라 밑 구석에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주저앉아 홀로 무력하게 울었다.
그러다 보면 건너편 갈빗집에서 회식을 하거나 가족외식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항상 즐거워했다. 나는 하염없이 절망했는데. 그래서 나는 그 갈빗집이 너무너무 싫었다. 쳐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내가 여기 오기 싫다고, 분명, 말했었잖아…
“다음에도 여기 와도 괜찮지?”
“… 아니…”
“괜찮다고?”
“……”
적당히 들를 곳이 있다는 핑계로 그들을 보낸 후, 나는 그 빌라로 들어갔다. 그때도 지어진 지 이십 년은 됐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사십 년짜리 건물이려나…
그래 여기쯤, 이 구석쯤……,
그 불쌍하고 작은 아이가……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속이 만 갈래로 찢어진다.
애초에 별로 먹지도 못했지만, 집으로 돌아와선 그마저도 전부 게워내 버리고 말았다.
엄마는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 그때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 그 사랑은 복수처럼 차올라서, 어느 날 갑자기 뻥하고 터질 것처럼 나를 불행하게 한다. 온전하지 못한 사랑은 늘 나를 아프게 하고, 숨이 차게 한다. 그 뱃속이 불행으로 팽창하다가 터져버릴까 봐 나는 너무 무서워서, 오늘도 말없이 당신을 차단한다. 나는 역시 당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나는 늘, 당신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