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다정’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다정만큼 기억에 오래 남는 잔상이 없다는 걸 자주 느낀다. 그 다정은 퇴근길, 지친 몸과 마음이 노곤해 주섬주섬 카드를 꺼내 찍을 때면, 먼저 살갑게 인사를 건네시는 기사님에게서 뜻밖에 도착한다. 옷 수선을 기다리는 동안 의자에 대충 앉아 자발적 야근이나 하고 있자니, 굳이 탁상까지 꺼내주는 친절 또한 그렇다. 내 꼴이 어떤 줄도 모르고 “우린 무조건 네 편이야.”라고 말하는 순수한 선의에게서도 얻는다. 그저 얻어 탄 뒷좌석에 앉은 이들을 위해 당연스럽게 히터나 에어컨을 켜주는 손길 또한 그렇다. 단톡방에 스치듯 흘려낸 첫 출근 이야기에 조용히 도착한 축하선물 앞에서,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파르르 떨었다.
그럴싸한 응원의 말은 누구나, 언제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이 당신에게 가 닿기까지 고민하고 정제하는 데 단 1초도 망설이지 않는 확신의 다정은 언제나 내 가슴을 떨리게 한다.
전에는 예쁘게 말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가식덩어리라 여겼다. 어머, 사람이 어떻게 저래. 모름지기 사람은 욕도 좀 하고 그래야 인간미가 있지. 안 그래? 저런 사람들이 앞에선 저래 봬도 뒤에선 온갖 추잡한 속내를 숨기고 있을걸. 다 그렇지 뭐.
그러니까 그건 내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거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딱 내가 그 꼴이었던 거지.
요즘의 나는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꽤 노력하며 살아간다. 겉으로만 다정해 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사실 내가 다정해지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다정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고, 살아남아야 했고, 그러려면 꽤나 이기적이어야 했다. 뼛속 깊이 새겨진 습관은 관성처럼 반응한다. 수십 년간 타성에 젖은 몸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은 결코 순탄치 않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많은 말실수를 하고 늘 후회하며 살아간다.
한때는 고민 상담 같은 것에는 영 소질이 없다며, 누군가 내게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면 퍽 당혹스러워 도망다녔다. 그들에게 적당히 “그래, 힘내” 따위의 예의상 말만 남기고 자리를 회피하던 내가 이제는 당신의 이야기가 내게 향하는 것이 여전히 두렵지만 조금은 설레게 되었다면, 그렇다면 나도 조금은 변한 걸까.
감히 내가 건넨 말들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어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비록 나는 그 말들을 당신에게 건네기까지 아주 오랜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더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언젠가 내가 아는 그이처럼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의 다정을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내가 받은 다정들은 모두 값지다. 허나 그 망설임 없는 다정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흔들림 없는 내 존재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아주 소중한 친구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도, 당신에게 단단한 확신의 다정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피로하고, 슬프다.
하지만 이렇게 볼품없는 나에게도 끊임없이 다정을 부어주는 당신들이 있기에, 나는 언제나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이가 들어감을 자꾸 느끼며 관계 정리의 필요성도 체감한다. 늘 나를 소중하다고 말해주는 사람들 곁에서,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 말하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내가 너무 싫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미련투성이의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마음이 멎으면, 그 곁에는 다정한 사람만 남기고 싶다. 나는 언제나 조금은 부족한 인간이니까, 그들의 좋은 모습을 본받으면서 그렇게 함께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