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저는 밴드 들국화의 보컬리스트였던 전인권을 인터뷰로 만났습니다. 20년 가까이 들국화의 팬인 저는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들국화의 LP와 CD 몇 장을 인터뷰 자리에 챙겨갔죠. 그와 인터뷰를 나누던 저는 문득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과연 그는 들국화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말입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냐고요? 사실 들국화란 이름을 가진 꽃은 없답니다. 들국화는 국화과 야생종을 총칭하는 표현이기 때문이죠. 구절초, 쑥부쟁이, 산국, 감국, 벌개미취 등 매년 가을이면 볼 수 있는 모든 국화과 꽃들이 들국화의 일종인 셈입니다.
전인권은 그 사실을 30년 만에 처음 알았다며 매우 놀라더군요. 들국화란 밴드 이름의 유래가 궁금하시다고요? 조금 황당한 사연이지만, 들국화란 이름은 밴드의 건반주자였던 고(故) 허성욱이 씹던 껌의 상표에서 따온 겁니다. 이는 팬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이야기이죠. 전인권은 제가 들고 온 들국화 2집 LP를 가리키며 “재킷에 담긴 꽃은 무엇이냐”고 묻더군요. 저는 “이 꽃은 금잔화인데, 국화과 꽃이니 들국화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고 답했죠. 이후 전인권과의 인터뷰는 대단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진행됐습니다.
저는 마침 그동안 촬영한 꽃의 사진들을 모두 담은 외장 하드디스크를 가지고 있어서, 다양한 들국화들의 사진을 직접 전인권에게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을 보이며 꽃들을 눈에 하나하나 담았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앞으로 꽃들에 대해 궁금한 게 생기면 물어보고 싶다”며 제게 자신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넘겨주고, 또 저의 번호를 적어갔습니다. 그날은 제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은 하루가 됐습니다.
꽃은 늘 계절보다 한 발 앞섭니다. 요즘 출근길에 가장 많이 보이는 꽃은 작지만 강한 향기를 자랑하는 샛노란 산국(혹은 감국)입니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국화차는 대개 산국을 말려서 만들죠. 산국은 가을의 마지막 들꽃입니다. 산국이 눈에 많이 띈다면, 겨울이 가까워진 겁니다. 산국은 모든 국화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수많은 국화들이 이 작은 꽃으로부터 출발했다니 놀랍지 않나요?
마음에 둔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걷다가 산국을 발견하시거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시죠. 마법 같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몇 년 전 여름 어느 날, 저는 배우 박준면에게 홍대 땡땡이 거리에 피어난 국화과 꽃인 기생초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앨범을 발매하고 저와 인터뷰로 만난 그녀는 그런 저의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고 회상하더군요. 지금 그녀는 제 아내가 됐습니다.
들국화와 만나는 방법 : 말이 필요 없습니다. 나가서 걸으면 됩니다. 눈에 띄지 않기 힘들 정도로 많은 꽃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