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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 Feb 10. 2024

만년필과 함께 하는 단상

누군가의 연락에 대한 마음

오늘이 음력으로 2024년 1월 1일입니다. 갑진년이 진짜 시작이 되는 날이네요. 글을 쓰고 싶고, 올리고 싶은 욕구가 꼬물거리고 올라오는 순간입니다. 무엇을 쓸까, 고민하다가 얼마 전에 만년필 매장에 다녀온 후기를 올릴 겸 제 만년필 역사를 복기할 겸 만년필에 대해서 써보자고 결심합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좀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순간순간 올라왔다가, 내려왔다가 했습니다. 요새는 사소한 것에도 이렇게 오르락내리락하네요. 에너지가 좀 차오른 건지, 아니면 여전히 헤매고 있는 건지 조금은 헷갈립니다.


누군가와의 약속도 [만나고 싶다] vs [아니 좀, 쉬고 싶다] 사이에서 계속 방황을 합니다. 그래서 좀처럼 먼저 연락을 하지 않게 됩니다. 먼저 연락하고 싶지 않은 마음, 아니 먼저 연락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만남 자체가 성사되지가 않는데 그 누군가에게 연락이 오면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내가 너무 연락을 안 했구나, 상대는 어떤 마음일까? 내가 너무 연락 안 해서 섭섭해하면 어떡하지?] vs [그런데 왜 연락했을까? 굳이, 만나야 하는 걸까? 만나면 여러 가지 기억들이 건드려져서 힘든데, 몸도 피곤한데! 또 이야기 들어야 하는 거야? 질문받으면 답하기 곤란한데!] 이런 생각들이 빠른 시간에 스쳐지납니다. 그래서 연락이 오는 것도 편치 않습니다. 답하는 건 두말할 것도 없죠.


원래 저는 제가 먼저 연락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언젠가부터 먼저 연락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오는 연락에 반응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을까요? 제가 누군가에게 어떤 감정의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하지 않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어떠한 감정의 파장도 받고 싶지도 않고요. 이 부분을 쓰고 다시 읽어보니 저는 좀 조용히, 혼자 고립되고 싶은가 봅니다. 고립되어 심심해지고 싶나 봅니다. 심심해지면 뭔가를 하고 싶어지잖아요. 이 포인트가 저는 참 좋습니다. 


일 이외의 시간은 대화(관계)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멍 때리고 쉬고 싶거든요. 이걸 소진(burn out)이라고 퉁쳐서 말하기에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에너지가 없는 상태는 아닌 것 같거든요. 이렇게 <대화(관계)에 참여하고 싶지 않음>은 성향과 환경, 그리고 경험들이 빚어낸 상태인 것 같습니다. 특히,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나 사람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이라면 모를까요? 과거를 모두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아닙니다. 그저 좀 떨어져 있고 싶습니다.  


굳이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면, 감정이나 관계, 개인적인 이야기보다 사물이나 운동(신체활동)에 대한 주제는 할 만합니다. 사람이 한 방향으로 너무 가다 보면 그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여 밸런스를 잡으려고 하나 보네요. 직업이 심리치료사이다 보니 주로 한 사람의 비밀스러운 내면(생각, 감정, 관계, 욕구)에 대한 이야기를 몰입해서 듣게 됩니다. 주로 앉아서 일을 합니다. 그것의 반대 방향의 행위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아직은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서(언제 가능할까?)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계속 찾고 있습니다. 제 속도로, 천천히.


책을 읽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도 조금 버거워질 때, 제가 잡게 된 것은 만년필이었네요. 


만년필에 본격적으로 입덕한 시기는 2021년 4월 경이였던 걸로 기억됩니다. 한창 상담을 정말 많이 하던 때였고, 종이에 볼펜을 잡고 내담자분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데 불편감이 느껴졌습니다. 더 힘을 빼고도 펜이 잘 미끄러지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되었고, 궁즉통(窮卽通)이라고 만년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산 저가용 만년필과 다이소 만년필을 두루 섭렵하며 만년필과 친해지고자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트위스비 에코, 라미 사파리, 카웨코 알스포츠 등을 거쳐서 펠리칸 m200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베스트 펜 매장에 가서 다시 트위스비 에코 한 자루, 클로르퐁텐 제본 노트, 로디아 제본 노트를  샀습니다. 베스트펜 매장에는 시필 비용이 오천 원입니다. 그날 시간이 넉넉지 않아서 시필을 꼼꼼하게 못 할 것 같아서 시필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시간이 펑펑 남아돌 때 다시 가서 시필을 할 계획입니다. 


2021년에 온라인 베스트펜 매장에서 구매를 했을 때보다 베스트펜이 많이 성장을 했는지 사업장의 주소가 바뀐 것 같더라고요. 매장도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더 크고, 펜과 잉크, 종이가 많았습니다. 매장 구경을 다 하려면 넉넉하게 3시간 이상은 걸리겠더라고요. 제가 방문한 요일이 토요일이라서 아마 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음에 방문하려면 평일에 가야겠더라고요.  


그리고 어느 화요일 저녁 모임이 있었는데, 가는 길에 베스트펜 매장에 들르려고 좀 일찍 출발했었는데 화요일이 마침 매장 오프 날이라서(와, 가는 날이 장날입니다) 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면서 다른 매장을 검색했더니, 펜앤아트 삼성점이 검색에 잡혔습니다. 


이곳에 가니 매장이 베스트 펜 매장만큼 널찍했는데, 분위기는 대조적이었습니다. 매장 직원 두 명 외에 저 빼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기뻤습니다. 인구밀도가 희박한 세상을 늘 꿈꾸었는데, 밀도가 희박한 공간에서 큰 아일랜드 탁자 위에 놓인 파이롯트, 플래티넘 만년필을 다양한 종이와 잉크로 시필할 수 있었고, 시필비용은 따로 받지 않았습니다. 


직원 두 분은 본인 전화받고, 일하시느라 저에 대해 관심이 아예 없으시고(제가 가장 좋아하는 포인트입니다, 저는 쇼핑할 때 누가 저한테 말 걸거나, 쳐다보면 그냥 매장에서 나오고 싶어집니다), 저는 홀로 다양한 닙을 다양한 색과 종이에 시필합니다. 


꽤 좋았습니다. 침묵과 옆 카페(펜앤아트 매장과 연결된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그리고 만년필들과 종이들과 다양한 색감의 잉크들, 방문했던 누군가의 메모들도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러던 중,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는 걸 알아치라고, 사고 싶은 아이템(만년필, 잉크)을 적은 메모지를 가방 안에 쏘옥 넣고 유유자적 나옵니다. 


금닙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언제쯤 할지 가늠해 봅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화상상담할 때 쓰는 트위스비 에코 투명, 대면상담할 때 쓰는 영웅 만년필 두 자루, 내 방 책상 위에 올려진 펠리칸 m200, 카웨코 알스포츠, 라미 사파리, 트위스비 에코 핑크, 도합 7자루네요. 7자루면 충분한데, 잉크의 세계(다채로운 color)를 더 탐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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