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아주 불행했음 좋겠어. 연진아,
3월 10일을 기억하며 두 달을 기다렸다.
그래서 3월 11일.
연진이 만나러 가는데 늦으면 안 된다고 가족 단톡방에 농담을 하며 '더 글로리 파트 2'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틀 정도. 나는 일상에서 짬이 날 때마다 연진이를 만나러 TV 앞에 앉았고, 동은이의 18년이 무색하도록 그녀의 복수는 후다닥 끝이 났다. 군더더기 없이 골고루 악인들에게 가해진 복수를 보며 잠시나마 시원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어딘가 찜찜한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아마 기다릴 드라마가 없어져서 허무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오늘 문득, 아쉬움에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던 가사를 찾아 폴킴의 '너는 기억한다'를 들으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몇 번을 리플레이하며 가사를 씹고 또 곱씹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설거지를 하다 말고 주저앉아 오열하고 말았다. 마음이 이상하게 답답하고,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이 느낌의 이유를 마음이 알아버렸다.
이젠 아무렇지 않은 아주 오랜 기억을
네가 거기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쉽게 지워지지 않는 아주 오랜 상처만 남아
그때의 너는 기억한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작은 돌을 던지고
소리쳐도 울어봐도 들어준 이 없고
눈물이 마를 때쯤엔 너의 맘엔 미움만 남아
그날의 너를 잃어간다
네가 아주 행복했음 좋겠어
대신 내가 불행하면 좋겠어
나의 슬픔, 눈물, 고통이, 너의 웃음이 되길
사실 난 행복을 잘 몰라
이젠 아문 줄 알았던 아주 오랜 흉터가
낙인처럼 선명하게 너의 굴레가 되어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대신 증오하는 일
너의 상처를 지워버리는 일
네가 아주 행복했음 좋겠어
대신 내가 불행하면 좋겠어
나의 슬픔, 눈물, 고통이, 너의 웃음이 되길
사실 난 행복을 잘 몰라
기억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시 돌아갈 수 있음 좋겠어
너의 찰나와 영원들이, 너만의 것이 되길
사실 난 행복을 잘 몰라
너는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야 하니까
'넷플릭스'를 자주 보는 편이지만, 처음 '더 글로리'가 방영되었을 때 어둡고 긴장되는 느낌이 싫어 덮어놓고 보지 않았었다. 워낙 긴장감에 취약하기도 하고, 어두운 드라마를 보고 우울해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미국 순위 차트까지 치고 올라오는 드라마를 외면할 수 없어서 결국은 보기 시작. 순식간에 몰입하여 파트 1을 끝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파트 1을 끝내고 파트 2를 기다리면서 기웃거리던 인터넷의 게시판 글들이었다.
동은이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는 동은이들의 찰나와 영원들이
그녀들과 동시대에 웃으며 학교를 다녔던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연진이는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잘 살고 있다고
나는 혹시 과거에 연진이었는데 그 일을 잊은 걸까. 나는 혹시 과거에 동은이었는데 그 일을 잊은 걸까.
환시를 느낄 정도로, 동은이가 너무
많았다.
연일 학폭으로 고발되는 유명인들만 연진이가 아니었나 보다.
동은이는 기억하는데, 연진이는 잊고 산다.
철없을 때 모르고 한 일이라고 항변한다.
영글어가는 어린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상처와 흉터를 남기고
모르고 한 일이라고 한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현실에서 동은이는 기억하고, 연진이는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니까
드라마 속 동은이의 복수가 끝났어도 찜찜한 기분이 이어졌던 거다.
그래서 슬펐던 거다.
그래서 오열했던 거다.
운 좋게 연진이도 동은이도 거치지 않고 어른이 된
나는
당신은
우리는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네가 아주 행복했음 좋겠어. 동은아,
네가 아주 불행했음 좋겠어. 연진아,
[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The_Glory_%28TV_series%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