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지나온 시간 속의 어느 하루도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없었다. 햇살이 맑게 창가에 내려앉는 날도 그녀가 핑크빛 여행용 가방을 들고 아버지 뒤를 따라 우리 집으로 들어오던 그날의 저녁도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하나의 의미가 되어 내게 남아 있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은 유난히도 천둥소리가 크게 들려오더니 오후가 되면서 비는 그치고 창밖으로 작게 보이던 그 하늘에 저녁놀이 곱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저녁놀을 볼 때마다 난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가 우리 집을 떠난 후 어디에선가 그녀도 저 저녁놀을 보고 있으려나 그리고 함께 지나온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면 나와 같은 기분일지 궁금했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왜 그녀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는지 모른다. 한 가지 알고 있다면 아버지의 여인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생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버지도 그녀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그 누구에게도 일체 입밖으로 소리내지를 않으셨다. 아버지는 어린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와 함께 있는 나를 지켜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녀가 떠나고 나도 카페를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와의 짧은 만남 이후 해외 출장이 잡혀 있어 분주하게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로마로 출발하기 전 해외 바이어의 부탁으로 지방에 있는 영화세트장을 찾았다. 계열사 협찬으로 퓨전 사극을 찍고 있는 민감독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영화에 출연하는 어느 배우의 열렬한 팬들인지 구석진 곳에서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행 속에서 카메라 셔터를 쉬임없이 누르는 그녀를 발견했다.
긴 머리에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카메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한 눈에 봐도 그녀임을 알수 있었다. 그녀에게 가려는데 요즘 대세배우인 민호의 매니저가 그녀 곁에서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를 쫓아가려는데 민감독이 내게로 걸어왔다.
<오늘 촬영 다 끝난 건가요?>
<아닙니다. 부사장님! 짧은 신 하나 남았는데 갑자기 여주인공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대역이 없어 접으려는데 민호가 한 아가씨를 추천하길래 분위기도 맞고 그래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
민감독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민감독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는지 민감독의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등지고 민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민호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잠시 후 민감독의 컷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민호와 악수를 나누었다. 민호가 그녀에게 귓속말로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맑은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더 아름답게 빛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민감독은 그녀가 맘에 들었는지 스텝에게 그녀의 연락처를 받아 오라고 말했다.
<부사장님! 내년에는 저 아가씨가 제가 만든 영화의 원톱이 될 거 같습니다.>
<저 아가씨가 그 정도입니까?>
<네. 앵글 속에 잡힌 저 아가씨의 후광이 증명할 것입니다.>
<민감독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분명 이루어지리라 믿어요. 민감독! 내일 로마로 출장가는데 20분 정도의 예고편이 필요합니다. 저번 거는 좀 짧아서 내려온 김에 다시 만들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럼. 시간이 빠듯한데 먼저 제 사무실로 가시죠.>
민감독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녀는 다시 오지 않았다. 민감독 사무실은 모든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는 작은 영상실이었다. 카메라 감독이었던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민감독은 누군가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더니 자기 책상으로 걸어갔다.
<부사장님! 잠깐 이쪽으로 오시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의 모니터 속에서 그녀가 나를 향해 하얗게 이를 드러내고 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빛속에 숨어 있는 듯 그녀가 서있는 뒤편으로 햇살이 수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내 숨이 멎는듯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나의 시간 속으로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