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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여행자 May 14. 2024

승무원에게 여권이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

  여권, 승무원 등록증, ID 카드


  승무원에게 이 세 가지는 목숨처럼 지켜야 하는 것들이다. 세 가지 중 단 하나라도 없으면 비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수 휴대품의 중요성은 백번 천 번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본격적인 비행을 시작하기 전에 승무원들은 브리핑을 하는데, 이때 필수 휴대품 소지 여부를 확인하는 시간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저 다 챙겨왔어요~" 이렇게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권을 펼쳐 본인 여권이 맞는지, 유효 기간은 충분히 남았는지, 훼손된 곳은 없는지 함께 비행 가는 승무원들과 함께 꼼꼼히 확인을 한다. 매 비행마다 반드시 하는 절차이다.

  만약 필수 휴대품을 소지하지 않고 출근하게 된다면 그 승무원은 해당 비행 스케줄에서 아웃되고 스탠바이 하던 승무원이 대신 투입된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다.

  회사에서는 승무원들의 필수 휴대품 관리를 철저히 강조하고 있고, 만약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개인 인사고과에 반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승무원들은 필사적으로 필수 휴대품을 지키려 한다.



  10년 가까이 비행을 하면서 '필수 휴대품'으로 문제 되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 '그날'의 기억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두 눈을 질끈 감을 정도로 아찔하다.


  "필수 휴대품 확인하겠습니다. 각자 여권 확인하고 캐리어에 잘 넣어주세요."

필리핀 클락에서의 레이오버 Lay -Over(현지에서 머무는 것)를 마치고 밤을 새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비행을 앞둔 어느 날. 호텔 로비에서 승무원들과 간단히 브리핑을 했다. 승무원들에게 필수 휴대품 관리를 신신당부하며 말이다.

  평소 여권이 젖거나 찢어질까 봐 케이스를 끼고 다니지만, 여권 케이스의 역할이 못 미더워 케이스 끼운 여권을 파우치에 넣어 이중 삼중으로 보호한다. 거의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

  브리핑이 끝나고 꺼낸 여권을 캐리어 깊숙이 보관했다.



 사진 출처 https://populous.com/project/clark-international-airport

  클락 공항에 도착하여 순조롭게 출국심사를 하였고 직원으로부터 내 여권을 잘 건네받아 파우치에 다시 넣어 캐리어 깊숙이 집어넣었다. 가방 안에 넣고도 불안한 마음에 가방 겉면을 주물럭거리며 여권을 확인했고 그제야 마음이 편해진다.

  밤을 새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공항에 있는 카페에서 아이스라떼를 마시며 여유를 부려본다. 라떼가 담긴 컵에 얼음이 보일 정도가 되자 저 멀리 지상 직원이 비행기에 타라는 손짓을 한다.

  비행기에 타니 다음 손님을 태울 준비로 매우 분주하다. 소독을 한다고 들어온 검역 직원들, 객실 안을 깨끗하게 정리해 주는 청소 조업사들, 정비사, 현지 직원들까지 동시에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니 좁은 객실 복도에서 서로 부딪히기 일쑤이다.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승객 자리 한쪽에 자리를 잡아본다. 캐리어에서 기내화를 꺼내 갈아 신고, 비행 중에 필요한 물건들을 서둘러 꺼냈다. 그때 캐리어 정리 중이던 내 쪽으로 청소기를 든 청소 조업사가 지나가려 한다.

  "Excuse me ma'am~"

  나는 '쏘리쏘리'를 반복해서 말하며 캐리어 지퍼를 후딱 잠그고 그가 지나갈 수 있게 객실 복도에서 몸을 구겨본다.

  "Thank you ma'am~"


  아수라장 같았던 비행기 안은 순식간에 새 비행기 마냥 정리가 되었고 곧이어 손님을 태우고 한국을 향해 출발했다.

  잠 한숨 못 자고 하는 밤샘 비행으로 내 눈에는 빨간 실핏줄이 올라왔고, 건조한 기내 환경 덕분에 눈이 더 뻑뻑해진다. 승객들에게 피곤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눈알을 굴려보기도 하고 눈을 껌뻑껌뻑 떠보기도 한다.

  그 사이 창문 너머로 둥근 해 머리가 살며시 내밀었다. 비행 내내 환자 승객, 흡연 승객, 진상 승객 없이 무탈히 한국에 도착했다.



사진 출처 https://simpleflying.com/what-parts-of-cabin-crew-training-must-be-self-funded/

  비행기에서 승객이 다 내리고 나니 그제야 긴장이 풀리고 승객들 앞에서 참았던 하품이 마구 나온다. 퇴근 준비를 위해 비행기 선반에서 캐리어를 꺼내 주섬주섬 짐 정리를 한다. 반쯤 풀린 동태 눈깔을 한 채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함께 비행한 승무원들과 형식적인 "수고하셨습니다"인사를 한 뒤, 각자 집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나는 공항을 떠나기 전 여권을 비롯한 필수 휴대품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밤샘 비행으로 너무 피곤했지만 할 건 해야지 생각으로 여권이 잘 있는지 가방에 팔을 넣어 휘적휘적 저어본다. 이쯤 휘저었으면 여권 파우치가 손에 잡혀야 되는데 애먼 화장품이 들어있는 파우치가 잡힌다. 다른 짐 밑에 깔려있나 싶어 팔꿈치까지 들어가도록 깊숙하게 팔을 집어넣어 본다.

  여권 파우치가 손에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 일시 정지가 됐다.


  '어??? 뭐야?... 여권이 어딨지?'


  관자놀이에서 심장이 뛰는 게 느껴진다

  설마 아니겠지라는 마음으로 다급하게 캐리어 지퍼를 죽 내려 가방 입구를 벌려본다.


(2편에서 계속)



PS. 예리하신 분들은 이런 궁금증이 들 수 있어요.

'여권이 없는데 한국 입국은 어떻게 한거지?' 라고 말이에요. 승무원들은 여권 대신 승무원 등록증으로 한국에 입출국을 한답니다. 그래서 한국에 잘 입국할 수 있었어요. 물론 그때까지도 여권이 없어진 줄도 몰랐지만 말이에요ㅜ

한국에 도착해서 여권을 분실한 것을 알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 해외에서 분실됐다면.. 정말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최악의 경우 출국을 못하니 비행기에 탈 수 없고, 승무원이 비행기에 타지 못하면 비행기가 출발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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