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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Dec 11. 2023

일본 여행은 시간 낭비

12월 2일 ~ 12월 11일

출발 전 - 11월 25일



일본 여행은 시간 낭비



일주일 뒤 이 시간에 나는 하늘에 있다. 파푸아뉴기니를 지나 광활한 태평양을 지나 일본으로 향한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친구에게 유심을 부탁했다. 애플 페이가 되는 곳에선 애플 페이로, 안 되는 곳에선 친구에게 융통한 현금을 사용할 계획이다. 교통카드도 친구가 준비해 줄 것이다. 인터넷과 돈과 교통편이 구비된 이상 더 준비할 것이 없다. 나머지는 가서 부딪친다.



내 여행의 컨셉은 탈당위다. 여행에서 꼭 해야 한다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기껏 시간 내서 돈 써서 간 여행인데,'라는 멘트 뒤에 따르는 모든 문장을 거부한다. 경험의 신화와 척진 시간을 보낸다. 도쿄 여행 갔다면 00은 꼭 가야지!라는 곳에 안 간다. 그 순간 내키면 간다. 가성비 따지지 않는다. 곧잘 사람들이 유명한 도시 여행기를 듣는다. 여기 가봤어 저기 가봤어, 이것도 해봤어, 저것도 해봤어- 하며 레퍼런스를 산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그곳에 가서 그 행동을 해야 제대로 즐기고 시간을 보냈다는 듯이. 경험은 세속의 가치다. 공인된 여행지를 찍고 오는 사실상 패키지여행이다. 여행에서 당위에 쫓겨 부지런히 움직이고 싶지 않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저렴한 숙소 하나 구해서 실컷 시간을 낭비할 계획이다.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시골에 머물며, 동네 카페에 출근 도장 찍는다. 한나절 책 읽고 글 쓰고, 주인 눈치 보이면 커피 한 잔 더 시킨다. 문 닫을 즈음 가벼운 식사를 하고 시골 거리를 걷다가 선술집에서 한잔하고 일찍 숙소로 돌아와 유튜브 보고 넷플릭스 보고 예능 방송 본다. 여행지에서 하기 가장 멋없고, 유익하지 않고, 가성비 안 나오는 그 행동을 기꺼이 한다. 경험과 성취를 포기하면 진정한 사치가 가능하다. 돈을 많이 쓰는 사치가 아니라 여행지에서 할 법한 일을 통째로 거스르는 사치다.



다른 무용담이 생긴다. 저는 관광지도 안 갔고, 쇼핑가도 안 갔고, 다양한 도시도 안 갔고, 뭘 배우지도 않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고,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내가 아는 일식 레파토리 반복하고 낮잠 자고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생각 없이 지냈어요. 그냥 시간 낭비했죠. 전 낭비가 좋아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출발 당일 - 12월 2일



모닝 커피  



이탈리안 카페에서 모닝 커피를 마신다. 이탈리안식 진한 롱블랙 커피가 취향이다. 멜번 생활 10년 하니 맛있는 커피 구분하는 능력이 생겼다. 최근 한 친구는 커피맛이라는 게 허상이라고 강론을 펼쳤다. 맛있음이란 기준은 주관적인데 누구 맘대로 정하냐는 논조였다. 자칭타칭 힙스터들이 폼잡기 위해 만든 것이 맛있는 커피라는 허구의 개념이란다. 나는 동의하지 않으나 그럴 수 있다고 말을 보탰다. 진하게 내려 물을 많이 타지 않은 이탈리안 커피를 받아들었다. 고소한 향이 코를 쓰다듬는다. 이것은 맛있는 커피다. 맛있는 커피는 실존하고 나는 이 맛을 즐긴다.



행복한 혀와 툴툴 거리는 입이 동거 중이다. 아니 입이 상위 개념이고 혀가 하위 개념인데 동거란 말이 어색하다. 자기모순적 행복으로 고쳐쓴다. 커피 마시는 이 곳은 공항이다. 종종 가는 이탈리안 카페 체인이 있다. 브루네티라는 곳으로 멜번 시티에 매장이 두 개다. 하나는 플린더스 역 근처, 하나는 백화점 4층에 위치했다. 시티에서 스타벅스를 제외하곤 늦게까지 여는 유일한 카페다. 느지막이 맛있는 커피를 즐기고 싶을 때 찾는다. 오늘은 아침 댓바람부터 커피를 마신다. 보딩 게이트 바로 맞은편에 브루네티가 있다.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4.77불을 썼다.



연착이다. 무려 1시간이나.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은 즐겁지 않다. 서프라이즈 선물은 기분 좋다. 놀람은 즐거움을 20%정도 올리는 효과가 있다. 예상하고 받은 선물보다 예상 외의 선물이 더 좋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서프라이즈 연착(연착은 대부분 서프라이즈다)은 미리 안내받은 연착보다 더욱 언짢다. 아니 언짢음, 불쾌함이라는 표현이 주는 부정적 뉘앙스가 강하다. 단어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나로선 피하고 싶다. 유쾌하지 않다로 정정한다. 디폴트가 유쾌한 상태고, 평범한 기분 상태를 유쾌하지 않음으로 구분지으니 좀 낫다. 보딩 시간이 지났음에도 보딩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다. 30분 정도 앉아 있다 사태를 확인하러 입구로 움직였다. 한 시간 연착을 확인했다.



유쾌하지 않음을 유쾌함으로 돌릴 필요를 느꼈다.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게이트 맞은 편에 있다. 카페에 앉아 맛있음의 물자체(쇼펜하우어는 인간이 감각할 수 있다고 주장)를 혀를 통해 마주하면 유쾌로의 전환이 가능하다. 단어의 영향은 상당하다. 카페, 이탈리안 커피란 단어가 내 기분을 풀어준다. 맛이 영향을 끼친 건지 내 안에 있는 이탈리안 카페의 맛있는 커피란 개념이 영향을 끼친 건지는 모호하다. 최근 쇼펜하우어 관련 책을 읽었다. 깜짝 놀란 구절이 있는데, 올해 이동진의 명언이라며 메모를 남긴 내용이었다. 그 발언의 레퍼런스가 여기였군. 쇼펜하우어가 이동진의 말을 따라했을 리는 없다. 무덤에서 하기엔 힘든 일이다. 그것은 쾌락(쇼펜하우어는 의지로 표현)은 절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인생의 행복엔 쾌락보다 불쾌를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동진의 발언을 옮기자면, 싫은 일 한 가지를 안 하기 위해, 즐거운 일 10개를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쾌락은 성취하면 허무해서 불행하고, 성취 못 하면 못 한데로 불행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 쾌락에 쉽게 적응하지만 불쾌엔 적응하지 못 한다. 쾌는 조만간 사라지지만, 불쾌는 언제까지고 불쾌다. 그러니까 쇼펜하우어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커피 섭취는 불행에서 나를 꺼내는, 그러니까 불쾌를 피하는 역할을 했다. 소확행을 고쳐쓰지마녀, 소소하지만 확실히 불행을 잊을 수 있는 행동이다.



연착에 연착을 더했다. 8시 50분 보딩이 9시 50분으로 연기됐고, 9시 57분인 지금도 보딩 게이트는 굳게 닫혀있다. 연착이란 단어가 내 기분에 영향을 끼치려 한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연착이란 단어를 씻어낸다. 목구멍으로 말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커피가 누른다. 연, 욱으으윽 꿀꺽. 연착이란 단어가 나오지 못 하게 커피를 밀어넣는다.



각성에 각성을 더한다. 새벽 1시 30분에 기상했다. 2달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 없다. 11시 눈을 붙였으니 2시간 반 정도 잔 셈이다.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잠 자길 포기하고 집안일을 했다. 내가 없는 동안 집안을 챙겨야 할 너사와가 안쓰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식기류를 정리하고, 설거지하고, 밥솥의 밥을 덜어 냉동했다. 내 개인 물건이 눈에 거슬리지 않게 수납했다. 세탁기에서 너사와의 빨래를 꺼내 접었다. 다시 잠이 오면 언제고 침대로 돌아가려 했으나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서재에 앉아 글을 읽고, 글을 쓰고, 알람이 울리는 것을 앉아서 들었다. 짐을 싸고 씻고, 옷을 입고, 너사와를 깨워 함께 공항행 버스 승강장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강력한 커피를 마시니 정신이 또렷한 단계를 넘어 우주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기분이다.



커피는 이성의 친구, 술은 감성의 친구. 술을 마시면 취기가 오르고, 커피를 마시면 집중력이 오른다. 높아진 집중력을 마땅히 쓸 곳이 없으면 글로 향한다. 언어가 가진 힘, 나의 상태, 사물의 힘에 생각이 미친다. 그것을 풀어내기 위해선 사고 에너지를 글쓰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불쾌를 피하기 위해 카페로 도망왔고, 커피를 통해 시스템 2의 뇌를 가동한다.





12월 3일


1. 언어의 정원


언어의 정원에 왔다. 정확히는 언어의 정원의 배경이 되는 신주쿠교엔(거리의 거와 정원의 원이 붙은 한자)이다. 영화에 나온 공원의 정자를 둘러보고, 명소라는 스타벅스에 왔다. 스타벅스에서 줄을 20분 섰다. 자리가 없어 실외 테이블에 앉았다. 손가락이 얼어서 타이핑이 어렵다. 스타벅스의 통창으로 공원의 정경이 잘 보인다. 바로 앞에 연못이 있고, 그 뒤로 잘 조성된 풀과 나무들이 있다. 추워서 언어는 잘 안 나온다. 내겐 겨울 정원이다.



특색 있는 일본 카페에 가볼 계획이다. 스타벅스도 특색 카페의 범위에 포함된다. 스타벅스의 경우 그 지역과 주위 경관에 맞춘 특색 있는 인테리어를 자랑한다. 특히 일본이 그렇다. 일본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 안에서 녹아든 스타벅스 건물은 운치 있다. 첫 카페로 스타벅스에 올 줄은 몰랐다. 인테리어는 괜찮았으나 우리는 그 혜택의 밖에 있다. 실내 좌석이 한정됐다. 우리는 빛이 들지 않는 실외석에 앉았는데 연못이 보이지도 않는다. 다른 식음료 값은 저렴한데, 커피값은 똑같다. 특색 카페 첫 시도는 실패다.



2. 2만 보



2만 보를 걸었다. 2만 보를 30분 전쯤 돌파했다. 도쿄에서 맞는 첫날을 산책으로 채웠다. 매년 12월이면 진구가이엔(황궁외원)에 은행나무의 노란 잎이 만개한다. 친구 따라 은행 나라로 향했다. 전세계에서 모인 관광객으로 아침부터 바글거렸다. 하늘이 노란 잎으로 가득 찼다. 품종이 다른 건지, 은행나무는 하늘을 향하 곧게 뻗었다. 도로 양편에 직선으로 나란히 정렬했다. 노란 레드카펫을 밟으며 진구가이엔을 거닐었다.


그 후에 도쿄올림픽의 메인 경기장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이어서 친구가 애정하는 신주쿠교엔으로 향했다. 입장료 500엔을 내고 일본과 외국(외국 테마의 정원이 있다)의 정원을 만끽했다. 스타벅스 외부 테이블에 앉아 추위에 벌벌 떨기도 했으나 이내 양지로 자리를 옮겨 햇살을 즐겼다.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버물여진 공간엔 여유가 있다. 사람 손을 타든 어쨌든 간에 넓게 펼쳐진 숲과 나무는 쉴 곳을 제공한다.



그 뒤로 신주쿠 최대 번화가를 거닐었다. 뜻밖에 행운은 도요코 키즈와 타칭보와 미나토죠시의 활동 무대를 봤다는 것이다. 너사와는 출퇴근 준비를 하며 유튜브를 보는 습관이 있다. 약간의 정보가 있는 영상을 선호하는데, 일본 문화를 다루는 '안협소' 채널을 즐겨 본다. 문화재 건물을 다루는 일을 하는 와이프에게 일본 주거문화를 소개하는 안협소는 좋은 매치였다. 듣기로 채널의 주제는 협소한 건물에서 일본 문화, 사회 현상으로 넘어갔다. 너사와의 전언으로, 직접 시청으로 도요코 키즈, 타칭보, 미나토 죠시의 존재를 알았다. 일본 문화 고유의 특성이 느껴졌기에 흥미롭게 보고 들었다. 그 현장을 직접 눈에 담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황궁외원은 미나토 구에 위치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남동과 비슷하다. 고급 맨션과 부티크, 뷰티샵, 명품관이 즐비했다. 도로가 넓고 도시가 잘 관리됐다. 거리마다 고급 차량이 지나다닌다. 친구는 황궁외원 맞은 편의 맨션을 가리키며 '저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일반 유닛의 경우 한화로 10억 전후라 한다. 백억을 호가하는 아파트가 속속 등장하는 한국 기준에서 '에게?' 싶지만 부동산 구매에 회의적인 일본인 입장에선 대단한 금액대리라. 미나토구 고급 맨션에 거주하는 사람은 젊은 IT 기업 사장, 증권가 고액 연봉가, 스타트업 사장 등이 있다고 한다. 억대 연봉을 받는 3,40대 젊은 남성은 외모가 뛰어난 여성을 맨션 파티룸/펑션룸으로 불러 파티를 즐긴다. 호주에선 일반 아파트 거주인에 한해 펑션룸을 무료로 빌릴 수 있다. 렌트나, 쉐어하우스 사는 사람도 가능하기에 펑션룸 빌리는 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일본에선 인식이 다르다. 흔히 타워맨션으로 불리는 미나토구의 고급 멘션이 특별 케이스다. 일반적 아파트엔 헬스장, 수영장, 펑션룸 등의 공용 공간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 그 공간 만들 바엔 유닛 하나 더 만들자는 실용주의 탓이다. 쉐어하우스 개념도 희박하기에 타워맨션의 펑션룸을 빌릴 수 있는 것은 실제 부자에 한한다.



일본은 성상품화의 나라다. kpop도 미국의 주류 팝문화도 성상품화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일본처럼 노골적이지 않다. 낮은 여성인권과 가부장적인 여성상이 만들어낸 사회 현상이다. 어덜트 비디오에 출연하고,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최상위 단계의 성매매부터 메이드 카페, 캬바레, 스넥 바 등의 일반인의 접근이 가까운 직업도 있다. 물론 이런 업계에 종사하는 것은 일본에도 흠이지만 워낙 대중화되어 있고, 공론의 장에서 다뤄지기에 한국만큼 주홍글씨가 진하지 않다. 미나토 죠시가 일반인의 접근이 가장 쉬운 영역에 있다. 돈 많은 전문직 남성들과 하루 날잡고 놀고 마시는 정도다. 공짜로 고급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데 소정의 용돈까지 받는다. 미나토 죠시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성매매를 한다는 자각이 부족한 이유다. 친구의 친구들과 하루 즐겁게 놀고 온다는 합리화할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미나토구를 직접 보니 사람의 욕망을 자극할 만한 요소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 운전에 최적화된 환경이다. 도쿄를 돌아다니면 대중교통과 도보를 위해 만들어진 도시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일단 도로가 좁고, 주차 공간이 많지 않고, 그나마 있어도 비싸다. 반면 대중교통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어 몇 분 걷다 보면 이런저런 역과 조우한다. 교통비가 저렴한 편이어서 뚜벅이에게 천국 같은 곳이다. 반면 미나토구는 운전자에게 적합한 지역이다. 운전자의 편의에 맞춘 지역이다. 미나토구만 다른 공간으로 느껴진다. 그 쾌적함에 이끌려 자연히 발길을 옮긴다.



도요코(토호 시네마 옆 아이들) 키즈의 경우 일본의 치안과 일본의 집단 형성 문화, 틱톡류의 SNS가 어우러져 만든 현상이다. 어린 친구들이 무리를 이뤄 길바닥에 생활해도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된다. 정신 나간 이에 대한 막연한 동경, 병약미를 추종하는 이들의 욕망을 자극한다. 특유의 복식 문화를 만들고, SNS의 숏폼 등을 통해 멘헤라(멘탈헬스가 좋지 못 한/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가 유행이 된다. 그들이 주기적으로 모이는 공간에 집결하고 무리를 이룬다. 파파카츠(돈 많은 아저씨 스폰서에 기생하는 활동)로 몸을 팔고 생활비를 충당한다. 도요코 키즈의 성매매역시 그 문화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진다. 성매매에 이토록 관대한 나라기에 가능한 모습이다. 일본의 여러 요소가 하나로 합쳐진 혼합물이다.



타친보는 직역하면 '서 있는 아이'다. 도요코 키즈의 활동 영역에서 몇 분 걷다 보면 오오쿠보 공원이 나온다. 타친보는 공원에서 멍하니 서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 젊은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수동적이고 젊은 버전의 박카스 아줌마다. 상대가 먼저 말을 걸으면 흥정이 시작된다. 공간을 점유하지 않은 개인 성매매 업자다. 이동 업소인데, 숙박 공간은 서비스 구매자가 담당한다고 한다.



다양한 형태의 창녀, 혹은 쁘띠 창녀가 존재한다. 일반적인 창녀가 홍등가에 숨어서 찾아오는 사람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라면, 일본식 창녀는 밖으로 나선다. 공공장소에 정체를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다. 사회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인식 탓이다. 돈 없으면 그럴 수 있다, 급하게 돈 버는데 좋은 일- 정도의 취급을 받는다. 직접적인 성매매가 아니라면 괜찮다는 인식이 생긴다. 성매매가 공공연히 언급되고 대중매체에 노출된다. 굉장히 일본스럽다.



일본색을 강하게 지닌  도요코 키즈와 타칭보, 미나토죠시의 활동 무대를 직접 봤다. 그들의 존재의 근간을 떠올리다 보니 일본이란 나라의 레이어가 몇 개 더해진다.





12월 4일


1. 긴자  


긴자에 왔다. 9시 20분 지하 출구를 통해 외부로 나왔다. 모두가 일하는 이 시간에 관광을 하려니 선민의식이 꾸물꾸물 올라온다. 인간의 행복은 상대적이다. 누군가의 불행 혹은 귀찮음을 행복의 땔감으로 쓰는 것은 문화시민으로 적합하지 않다. 다만 자연히 그런 기분이 드는 것까지 막을 수 없다. 조건반사다. 딱밤 맞으면 아프다. 삼겹살 김치에 싸서 먹으면 맛있다. 남 일할 때 놀면 즐겁다. 뭐 이런 것이다. 한 가지 신경 써야 하는 게 있다면 입 밖으로 행복의 이유를 꺼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만 지키면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다. 그런데 굳이 이런 생각을 외부로 꺼내놓는 나도 인간이 덜 됐다. 블로그의 폐쇄성과 비교적 개인적 공간이라는 것을 변명 삼아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는다. 솔직은 글의 미덕이므로.



솔직한 행복과 무관하게 사소한 문제가 있다. 대부분, 그러니까 90%의 샵이 11시 이후에 오픈한다. 어떤 관광객도 9시에 긴자에 관광하러 오지 않는다. 가게 입장에선 손님 없는데 굳이 문 열 필요를 못 느낀다. 돈 벌려고 하는 일이다. 아무튼 구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영업하고 있는 가게를 찾았다. 영어를 잊어버릴까 걱정한다. 챗GPT의 보이스 기능을 사용해 사람이 없는 곳에서 대화를 이어간다. 말하기 연습도 되고 실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GPT는 내 영어를 곧잘 이해하는데, 일본 가게 점원들은 그렇지 못 하다. 물론 그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이유는 아니고 이는 한국 또한 비슷하다. 커피를 주문하고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냐고 물었다. 와이파이 사용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지금 나는 와이파이를 사용해 블로그에서 글을 쓰고 있다.



긴자의 인상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럭셔리다. 럭셔리 브랜드 매장이 대로에 줄지어 서 있다. 카페에서 내려다보이는 대로에 보이는 대로 언급하자면, 야마하, 그랜드 세이코, 리모아, 자라, 디올 매장이다. 온갖 명품 매장이 다 있고, 도쿄의 더현대라는 긴자식스도 긴자역에 붙어 있다. 명품 부티크, 편집샵이 골목 사이사이에 자리한다. 내가 가고자 하는 베이프 매장도 긴자에 위치해 있다.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윈도우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 아닐까. 쾌적하다. 명품 브랜드 매장의 인테리어의 공통점이라면 충분한 유휴공간을 들 수 있다. 물건이 많지 않다. 고객이 넓은 공간에 느긋이 다닐 수 있도록 안배했다. 집기나 오브제들도 하나하나 고급 제품이고, 유명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쳐 분명한 컨셉과 균형감 있는 디자인을 자랑한다. 건물 내외부 보는 것도 좋은 구경거리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페는 굉장한 공간이다. 저렴한 값에 오랜 시간 편하게 보낼 수 있다. 핸드폰 충전도 가능하고, 실내 온도가 적절히 설정되어 있어 자켓을 벗어도 문제없다. 단돈 430엔에 라지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받고, 와이파이를 쓰고, 핸드폰을 충전한다. 이 모든 혜택이 단돈 430엔, 한화 4천 원.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사람 구경하기 더할 나위 없다. 시점이 한참 위어서 그들과 눈 마주칠 일도 없다. 일본의 노동인구의 복식과 걸음걸이, 표정 등을 관찰할 수 있다. 관찰 귀찮으면 글로 돌아오고, 글이 귀찮으면 메신저로 지인들과 이야기 나눈다. 관광지에선 지출이 커질 수밖에 없다.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 값을 지불하면 그 이상의 지출은 없다. 그야말로 절약의 성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선반의 위치다. 너무 낮다. 배꼽 아래여서 팔을 아래로 한참 내려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도 자연히 굽힌다. 가끔 스트레칭이 필요하다. 스트레칭 한 번 하고 화면으로 돌아온다.



맞은편에 댄스 교습소가 있다. 문득 그 옛날 본 영화 셸 위 댄스의 배경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구글에게 물었다. 긴자에서 에비스 방면으로 가는 곳에 셸 위 댄스의 배경이 된 댄스 교습소가 있단다. 긴자라는 단어에 눈이 커졌다. 이어폰을 꼽고 유튜브에 셸 위 댄스 결말 포함 영상을 시청했다. 시작과 동시에 교습소가 나왔다. 아, 아니다. 켠 김에 끝까지 봤다. 무료한 일상을 사는 샐러리맨이 있다. 불순한 동기(예쁜 댄스 강사를 보기 위해)로 교습소를 찾는다. 어느 틈에 진심이 된다. 열정을 불어넣을 취미가 생기고, 삶에 활력을 얻는다. 가족과 화목을 되찾는다. 본인의 애초 목적이었던 강사와 마주해 진심으로 춤을 추며 영화는 끝난다. 슬램덩크의 플롯과 같다. 불순한 동기, 소질, 연습, 진심, 성취로 이어지는 플롯이다. 이 플롯은 인간은 감동하게 만든다. 열정을 쏟는 사람에게 느끼는 감동이 있다. 열정의 발현 전의 현실이 암울했다면 더더욱 응원하게 된다. 암울한 현실의 모습에 우리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 아닐까. 불순한 동기를 극복할 정도로 진심이 되어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경험은 숭고하다. 예술이든, 춤이든, 스포츠든, 어떤 활동이 삶에 의미가 되고 열정을 쏟으며 발전하는 과정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삶의 목적을 떠올리다 보면 쉽게 허무주의로 빠진다. 이 넓은 세상, 나는 먼지고 나의 삶과 죽음은 우주의 역사에 무와 다름없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 분투하는 것이 인간이다. 긴자 거리를 보다 인간애를 발견한다.



무료해져 유튜브 뮤직에서 음악을 틀었다. 메인 화면에 추천 음악이 나열된다. 챗 베이커의 재즈 앨범 '쳇'이 있다. 유일하게 앨범째로 듣는 작품이다. 오랜만에 재생했다. 긴자의 풍경과 트럼펫 소리가 하모니를 이룬다. 도쿄의 여기저기를 향하고 있다. 저마다의 풍취가 있다. 혼자 있을 때 항상 이어폰을 귀에 꼽는다. 소믈리에가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고르듯, 풍경에 어울리는 음악을 고른다. 그 공간을 잘 즐길 수 있는 나만의 비법이다. 지난 이틀의 도쿄 유랑은 친구와 함께였다. 누군가와 있을 때 이어폰을 꼽지 않는다. 어른의 룰이다. 누군가와 있지 않을 때 이어폰을 꼽는다. 나만의 룰이다. 긴자와 커피와 음악이라는 세 단어를 병렬한다. 중간에 더하기 표시를 넣으니 마지막 = 뒤에 사치라는 단어가 생긴다.




2. 오늘 할 일



11시 즈음 카페를 나선다. 유니클로와 베이프 매장을 구경한다. 지유를 구경한다. 대로를 따라 걷는다. 긴자 식스를 구경한다. 계속 걷는다. 도쿄역까지 걷는다. 라멘 스트릿이라는 라멘 전문 공간에 향한다. 돈코츠 베이스의 츠케멘을 파는 곳에 들어간다. 면을 먹는다. 밥을 추가한다. 밥을 말아 먹는다. 이 정도가 내가 생각한 전부다. 오후에 친구와 합류한다. 그때까지 무엇을 할 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걷다보면 새로운 할 일이 생기지 않을까?


생기지 않는 사태를 대비해 준비할 필요를 느낀다. 긴자의 즐길거리를 검색한다. 아하 중앙거리(주오도리)에 할 일이 몰려 있다. 여기만 봐도 친구 접선까지 할 일 없어 고민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커피가 남아 카페에 더 남고 싶지만 슬슬 점심 시간이니 나가봐야 한다.





12월 7일



1. 료칸 여행  



십일 년 전, 일본에 1년 살며 료칸 한 번 안 갔다. 비싸기 때문이다. 그 많은 절약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조금 더 여유로워진 상태인 나는 그 당시의 복수를 위해 일본을 찾았다. 복수의 대상은 누구? 지독했던 절약. 관념을 복수 대상으로 설정하고 애플 페이와 실물 카드, 현금 원투 펀치 어퍼컷을 날렸다. 더 이상 절약 따윈 하지 않겠어! 각오하고 친구와 료칸 여행 일정을 잡았다. 일본 땅을 밟고 11년이 지난 이제서야 료칸에 갔다.



절약 따윈 필요 없어. 하지만 나는 가성비 여행을 했다. 마치 일본 드라마 '사랑 따윈 필요 없어'와 같다. 사랑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날선 히로스에 료코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하지만 누구보다 사랑을 그리워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역설적 제목인 셈. 자신을 호도하는 히로스에 료코. 나 또한 마찬가지다. 강산 한 번 바뀌니 내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더 이상 1만 엔으로 한 달을 버티지 않는다. 나의 당당함과 경제적 성장을 실감하기 위해 거침없는 소비를 행하려 한다. 하지만 나의 DNA엔 절약이 배어 있다. 언제고 절약해야 한다는 유전자의 명령을 받든다. 절약을 누구보다 갈구한 자신을 발견한다.



가격을 들으면 여행의 만족도가 오른다. 인간은 감각보다 관념에 영행을 받는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만족하는 정도가 다르다. 친구가 구상한 가성비 료칸 여행의 경비를 떠올리니 한없는 기쁨이 몰려온다. 일본 온천은 비수기다. 친구는 각종 할인 혜택에 빠삭하다. 우리 뇌에 가성비를 담당하는 영역이 있다면, 친구는 그 영역이 누구보다 발달했을 것이다. 교통비, 식비, 숙박비 모든 것을 합친다. 오옷? 대만족이군.



총경비는 대략 19,000엔이다. 숙박비 12,500엔 (2인실 25,000엔), 석식 조식 숙박비에 포함, 1박 2일 교통패스 2,100엔, 전철 400엔, 반주 곁들인 중식 2회 2,700엔, 노래방 550엔 등이다. 료칸의 백미는 음식이다. 숙박 한 번에 2회의 식사를 제공한다. 대게, 사시미, 회, 스테이크 등의 고급 식재료 100가지 이상을 구비했다. 온천과 숙박 시설, 2회의 만찬을 단돈 12,500엔에 누렸다. 호주에선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다. 비수기를 맞은 호텔이 노동자 일감 제공하기 위해 사실상 수익을 포기한 서비스를 제공한 셈이다. 일반적으론 1박이 50,000엔으로 위 가격의 2배다.



교통비도 대단히 저렴하다. 일반적으로 신주쿠에서 키누가와 온천이 있는 토치기 현까지 편도 4,500엔이 든다. 왕복으로 9,000엔을 내야 한다. 친구는 외국 관광객을 위한 특별 여행 패키지를 이용했다. 1박 2일 여행 패스를 단돈 2,100엔에 구매했다. 그 외 출발지인 아사쿠사 역으로 가기 위해 400엔 정도를 추가로 썼으니 총 여행비 2,500엔이다. 얼추 1/ 3.5 값으로 구매했다. 그 외 부대비용도 합리적이었다. 관광지 노래방이 한 시간에 550엔, 근처 식당 한 끼 식비가 1,000엔가량으로 바가지도 없었다.




온천 숙박을 12,500엔에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일반 식당에서 료칸 석식에 제공하는 대게만 몇 개 먹어도 1만 엔이 훌쩍 넘는다. 호주 달러 100불 남짓 한 돈에 모든 시설과 어메니티, 식사를 즐길 수 있다. 호주에선 상상할 수 없는 최고의 가성비다. 일박 이일의 여유와 즐거움의 모든 패키지를 200불 안 되는 돈에 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만족이 배로 커진다. 이 돈으로 이게 가능하다고? 현실을 부정하고, 이내 받아들이고, 사이클 한 번에 행복이란 부산물이 생긴다. 이렇게 비싸서 못 간 료칸을 싸게 갔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내 근본은 바뀌지 않을 듯하다. 물론 지금 '아무리 돈이 많은 상태'와 관계는 없다. 이 돈에 이게 가능해?라는 질문이 행복을 불러온다. 역시 감각보다 관념이다.




12월 9일



1. 시골 입성



일본 시골에 도착했다. 왜 시골이냐면 즐길 거리를 제한한 상태로 독서와 글쓰기만으로 생활해 보고 싶었다. 굳이 외국에서 그러고 싶냐는 물음엔 그렇다고 대답한다. 오늘부터 며칠간 머물 곳은 신주쿠에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카마쿠라다. 챗GPT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도쿄에서 가깝고, 시골이고, 조용하고,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고, 특색 있는 카페가 몇 개 있고, 물가가 저렴한 곳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 결과가 카마쿠라다. 친구 덕에 일본 여기저기를 다녔다. 진짜 시골도 그중 하나였다. 신주쿠에서 3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온천 마을엔 놀라울 정도로 뭐가 없었다. 온천과 편의점, 오래된 식당 몇 곳이었다. 진짜 시골을 목격하고 시간을 보낸 내게 카마쿠라는 대도시였다.



카마쿠라역 앞은 사람으로 바글거렸다. 여러 외국인이 관광을 왔다. 역 앞엔 대형 마트가 있다. 8층짜리 마트로 각종 식재료는 물론, 의약품, 생활 소품, 옷, 가전 일체를 판매했다. 백화점 같았다. 내가 생각한 조용한 시골 마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것은 시골이 아니다. 스타벅스도 있고, 분위기 좋은 양식당도 있다. 도쿄의 일반적인 마을이라고 봐도 부족함이 없다.



숙소는 카마쿠라 역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위치했다. 다행히 숙소로 가까워지면서 머릿속에 그리던 조용한 일본 시골의 모습이 등장했다. 주위엔 집밖에 없다. 숙소는 작은 골목에 위치했는데, 산을 등지고 있는 것인지 한기가 올라왔다. 방과 공용 공간은 온라인에서 보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친절한 호스트는 집 구경을 시켜주고, 15분가량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긴 왜 왔는지 등등을 물었다. 드립 커피도 제공했다. 핸드폰을 충전하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이 외딴 공간에서 내가 시골에 왔음을 실감했다.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기대한 정도의 심심함을 마주해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다시 도쿄로 가고 싶다는 마음. 저자극 여행을 추구했으나 지난 일주일 자극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다. 도쿄에서 유명한 관광지를 거닐며 인파 속을 해치고 다녔다. 상품과 선전의 홍수가 알게 모르게 정신에 침투했다. 그 자극이 디폴트가 되었다. 염원하던 고요한 삶으로 들어온 지금 자극의 소용돌이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인간은 자극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나는 인간이다. 자극 디톡스가 필요하다. 무료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관광은 하지 않을 예정이다. 특별히 보고 싶지 않다. 봐야 한다는 가성비의 명령을 거부한다. 단지 오래 앉을 수 있는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정이다. 개인 카페, 특색 있는 카페면 다할나위 없다. 안타깝게도 카페가 6시 즈음 문을 닫는다. 유일하게 10시까지 운영하는 곳이 스타벅스다. 번화가인 역 앞으로 다시 돌아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낼까 한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파는 스시와 각종 도시락을 구매할까 한다. 감사하게도 숙소에서 식사 및 간단한 취사가 가능하다. 먹고 싶은 음식 실컷 고른 뒤 미각이라도 자극에 살 수 있도록 안배할 생각이다.



내일은 바닷가 쪽 카페에 갈 예정이다. 가볼 만한 카페가 세 군데 정도 있다. 호스트의 추천을 받았는데, 세 곳 다 분위기가 좋다. 아침부터 카페 투어, 일본식으로 카페 메구리를 할까 한다. 하루 종일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숙소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일찍 들 예정이다. 지금 숙소에는 2박을 예약했다. 모레는 역 근처로 숙소를 옮겨 동선을 최소화할까 한다.



일주일 일본 생활을 하며 느낀 점은 내가 관광지에 크게 흥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거대한 자연,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일본 가옥, 성, 절 등. 보는 재미가 있었지만 크게 감동하지 않았다. 행복을 느낄 때는 어떤 활동이 더해졌을 때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아시유(발 욕탕)가 있는 카페에서 보낸 시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맨발을 욕탕에 담근 채, 토치기현의 명물인 딸기를 활용해 만든 딸기우유를 마시며, 친구와 삶과 인생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현실 밖의 이야기를 나눌 때 행복을 느낀다. 내가 감각의 동물이 아니구나, 현실 밖에 시선을 던지고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자각이 생긴다. 사유의 즐거움, 세계관 확장의 즐거움을 얻는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과 쇼펜하우어의 쾌락에 대한 태도에 공감하는 지점이 많다. 기대하는 게 많아지면 불행이 는다. 삶에 바라는 것을 줄이면 만족이 쉬워진다. 누군가는 행복의 기준이 100이고, 누구는 10이다. 관광지를 가거나, 흥건히 취하거나, 쇼핑을 하거나 등등의 특별한 활동이 없으면 100인 사람은 본인 행복 기준을 달성할 수 없다. 10인 사람은 그냥 숨만 쉬고 사는데 음악을 듣거나 명상을 하거나, 누워있거나 하는 등의 언제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행복을 느낀다. 행복 역치를 낮추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자극의 홍수를 벗어날 필요가 있고, 덜 행복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일본의 먹거리와, 저렴한 술과, 친구와 저렴한 일본 브랜드의 중고 제품이 있으면 덜 행복할 수가 없다. 최소한 시골에서는 덜 행복하기로 한다.



슬슬 스타벅스로 향해볼까 한다. 핸드폰의 충전이 충분히 됐다. 저녁 늦게까지 밖에 있어도 버틸 수 있다. 자 그럼 스타벅스에서 다시 보죠.



2. 한 밤의 산책



호주 지인을 일본에서 만났다. 멜번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친구인데 나이답지 않은 총명함에 감탄한 기억이 있다. 이내 시드니로, 한국으로 주거지를 옮겨 이후론 볼 수 없었다. 나는 총명한 사람을 좋아한다. 현실에선 총명하고 어린 사람에게 똘똘하다는 표현을 쓴다. 똘똘은 내가 하는 최고의 칭찬이다. 지식 습득에 대해, 일상 밖의 세상에 대해, 지적 대화와 논리에 관심을 갖고 배우려는 자세를 높게 산다. SNS를 통해 똘똘한 친구의 일상 부스러기를 봤다. 그러다 일본 여행 일정이 겹침을 알게 됐다. 식사 약속을 잡고 전날 만났다.



지적 허영을 가진 상대와의 대화는 즐겁다. 비일상적인 이야기, 삶의 태도, 가치관, 사회 이슈, 특히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는 이득 보는 플레이어와 손해 보는 플레이어 얘기를 나눴다. 이런 대화는 귀하다. 이런 얘기를 즐기는 사람이 많지 않고, 해도 핑퐁이 되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 그냥 해도 재밌는 얘기다. 전혀 새로운 나라에서, 일본 음식을 먹으며, 저렴한 가격의 레몬 사와를 곁들이니 즐거움이 복리로 불었다. 버핏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복리는 대단하다. 보통 대단함을 마법이라 단어로 강조한다. 복리의 마법을 받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대중교통이 없는 시간이다. 내가 머무는 친구 집까지 소요 택시비는 15불 남짓으로 부담스럽지 않다. 구글맵이 말하길 도보로 55분이 걸린다. 날도 좋겠다, 건강도 챙기겠다, 기분도 좋겠다, 걷기로 정했다. 한 가지 깜빡하고 있던 사실은 내 핸드폰의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친구 집 주소를 외우는 것이 아니다. 잔여 배터리가 5%가 될 즈음 사력을 다해 배터리를 아꼈다. 대략적인 방향만 보고 발길을 옮겼다. 한참 가다 멈춰 다시 방향을 보고 걷기를 반복했다. 20분 즈음 남은 시점에 핸드폰이 사망했다. 구글맵과 친구에 의존해 길을 찾았다. 친구도, 구글맵도 내 곁에 없다. 집을 도저히 찾을 길이 없다. 길을 우회하며 소요 시간이 늘었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 3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러다 날이 밝을 때까지 정처 없이 걷겠다 싶었다. 12월의 도쿄는 포근했다. 이대로 길가에 철퍼덕 앉아 잠을 청해도 입이 돌아가지 않겠단 확신이 있었다. 방랑 시인 김삿갓 형님의 기행에 감명받았다. 이것이야말로 무소유의 삶, 진정한 지적 탐구의 길, 디지털 디톡스의 전형, 낭만의 행군이다. 하늘을 이불 삼아 이 세상 어느 곳이든 침소로 여기는 김삿갓삿갓 형님. 그의 배포에 감탄한 홍서범 형님께서 그를 추앙하는 노래를 만들었다. 진정한 입싸움꾼(아가리 파이터라는 착 감기는 말이 있으나 위인에 존경을 표할 필요를 느낀다)으로서, 새로운 동네를 찾을 때마다 훈장들과 논쟁을 펼친다. 그리스에 소크라테스가 있다면 동방예의지국엔 김삿갓이 있다. 아버지 욕하는 폐륜을 저지르고 평생 하늘을 보지 않고 살았으며, 훈장에게 훈장질하는 풍운아. 지금이야말로 김삿갓의 정신을 이어받을 때가 된 것인가!



이내 길거리 숙박을 포기했다. 입이 돌아가지 않겠다는 믿음 만으론 길거리 숙박이 가능하지 않았다. 김삿갓은 하늘을 이불 삼아 잠을 청했고, 나는 와이파이를 이불 삼아 잠을 청한다. 말인즉슨 와이파이가 안 잡히는 곳에선 잠을 잘 수 없다. 와이파이 수신 받을 기기가 없다면 더더욱. 노숙은 가능하지만 인터넷 세상과의 단절은 불가다. 와이파이 없인 팟캐스트도, 이북도 들을 수 없다. 나의 자장가다. 자장가 없이 잠 못 잔다. 눕기 좋은 곳을 찾기를 포기하고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걸어봤자 집을 찾을 수 없을 거란 비관이 찾았다. 슬램덩크의 안 선생님은 말했다. 포기하면 그것으로 경기는 끝이다. 일단 걸으면 가능성은 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자꾸 걸어 나가면 친구 집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이 먹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나이와 함께 융통성, 더 감기는 말론 유도리가 생긴다. 유도리를 갈라 보면 나이테가 35개나 있다. 임기응변 능력이 생긴다. 이렇게 해도 죽지는 않아-라는 믿음이 공고해진다. 걷다가 한 가정집의 정원에 털썩 주저앉았다. 김삿갓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고, 현대인으로 남기 위함이다. 낮은 조명이 반 평 남짓한 정원을 비추고 있다. 조명은 전기가 공급이 되어야 빛을 발할 수 있다. 어딘가 전기가 통하지 않을까? 내 옆에 짧은 전깃줄이 눈에 들어왔다. 안으로 파고 들어간 구멍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전기 콘센트를 발견했다. 만약을 대비해 친구에게 일본 충전기를 빌렸다. 더듬거리며 충전기를 꽂았다. 라이트닝 케이블을 핸드폰에 연결했다. 액정에 배터리 표시가 뜨며 충전이 시작됐다. 전기 도둑과 노숙자 중에 전기 도둑을 골랐다. 10분 정도 앉아서 전기를 훔쳤다. 대략 2원 정도의 전기를 핸드폰에 옮겨왔다. 노숙을 해도 귀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무한한 기다림과 불안 속에 남을 것인가, 전기를 도둑질할 것인가!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 남을 아낄 수 있다. 착한 도둑이 되기로 정했고, 지금도 잘한 결정이라 평한다.




핸드폰 배터리가 10% 정도가 됐다. 구글맵에서 방향을 찾았다. 집까지 소요 시간은 대략 15분, 10% 면 지도 어플 15분은 사용할 수 있겠단 판단이 섰다. 대략적인 방향을 보고 걷고 다시 맵을 확인했다. 일본 동네는 구불구불하고 교차점이 많아 초행자 입장에서 길 찾기 까다롭다. 착한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그쪽이 동의하진 않았으나) 무사히 집을 찾을 수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성취감과 피로가 함께 몰려왔다.




두 평 남짓한 방에 남자 셋이 잔다. 친구 둘을 깨우지 않도록 살금살금 발을 옮겼다. 헬스 어플을 보니 오늘 만 보를 걸었다. 어플 기준 오늘은 자정이다. 한 밤의 산책에 만 번의 발걸음과 한 번의 도둑질이 있었다.








12월 10일


1. 한끗 차이




한끗 차이로 변화가 생긴다. 내 삶의 굵직한 결정에도 한끗이 작용했다. 무언가를 하고자하는 의지와 그에 필요한 행동력이 저마다 다르다. 이를테면 하루 10시간 독서하고 독후감을 쓰고 싶다는 의지가 100이다. 하지만 요구하는 행동력이 500이다. 그럼 의지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반면 침대에 머물며 유튜브 보고 싶은 의지가 20이다. 요구하는 행동력은 1이다. 의지가 요구 행동력보다 높기 때문에 언제고 할 수 있다. 너무 오래 누워 있으면 죄책감이 생긴다. 책이라도 한 자 읽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해진다. 하루 10시간 읽는 것은 무리지만 30분 정도 차 마시며 책 읽는 정도는 할 수 있다. 독서 의지가 150으로 오르고, 30분 독서에 필요한 행동력은 130으로 낮아진다. 그럼 독서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상황에 따라 필요한 행동력이 달라진다. 나는 이를 한끗 차이라고 말한다.





카마쿠라에 왔다. 특별히 해야 할 것은 없다. 카페에서 글이나 쓰고 근처 산책이나 하는 일정이다. 가능하다면 슬램덩크 오프닝의 배경이 되는 선로와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엔딩 장면의 배경이 되는 바닷가 정도는 보고 싶다. 슬램덩크를 인생 만화로 꼽기도 하며, 슬램덩크 영화판을 2023년 올해의 영화로 꼽는다. 그러니 작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선로 정도는 봐주는 게 강호의 도리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카마쿠라 여행에 맞춰 최근에 한 번 더 시청했다. 모든 곳을 갈 순 없지만, 중요한 배경 한 곳 정도는 보고 싶다. 문제는 필요한 행동력이 너무 높다는데 있다. 슬램덩크 선로와 바닷마을 다이어리 해변을 보고 싶은 의지는 50인데, 그곳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행동력이 100이다. 카페에서 글 쓰고 숙소 오가는 길 산책으로 충분하다며 의지를 뒤로 했다.





필요 행동력이 높은 이유를 두 가지 꼽자면, 교통편과 숙소의 위치다. 도쿄에 비해 교통이 편리하지 않다. 숙소는 카마쿠라 역에서 도보 20분 거리에 있다. 카마쿠라 역에 가서 대중교통을 타고 촬영지 근처 역에 내려 둘러볼 생각을 하니 귀찮음이 밀려온다. 시간 낭비하러 온 것이니 애써 보지 말자는 결론에 이른다. 지난 일주일 평균 1만 7천보를 걸었다. 다리가 욱신거린다. 도쿄의 별천지에서 며칠, 깡시골 온천에서 하루 머물고나니 관광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다. 애초 여행 테마도 시간낭비기도 하다. 카마쿠라 관광 의지가 100이었다면 그 모든 곳을 갔을 터다. 못 가는 거리도 아니다. 도보로 1시간 이내, 대중교통으로 45분이면 유명한 장소에 갈 수 있다. 그러니까 여러 요소로 인해 의지가 내려갔고, 필요한 행동력은 올라갔다. 결국 가지 않는다는 잠정 결론에 이르렀다.





상황이 변했다. 한끗 차이가 변화를 만들었다. 한끗은 전동자전거다. 도쿄의 친구가 말하길 일본은 전동 킥보드를 아무나 탈 수 없다. 면허가 필요하다. 외국인의 경우 국제면허증을 발급 받은 사람만이 탈 수 있다. 안전에 관한 법률이 좀 더 까다롭다. 게다가 아무데나 주차를 해도 안 되고 지정된 곳에만 주차할 수 있다. 아, 전동 이동수단은 사용할 수 없구나- 판단했으나 전동자전거는 예외였다. 일본 관광 중인 친구가 전동자전거로 이동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전동 시리즈는 일본에서 이용할 수 없음을 언급했다. 잘못된 정보를 줄 수 없으므로 게스트하우스의 오너에게 물었다. 그는 검색을 하더니 전동자전거의 경우 면허 없이도 이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새로운 가능성이 생겼다.





일본의 전동 자전거는 대단했다. 일단 외딴 동네라고 생각했던 게스트하우스의 입구에 전동 자전거 주차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늘 방문할 예정이었던 근처 바닷가 카페 바로 옆에도 주차공간이 있었다. 게다가 전동자전거 이용료는 30분에 130엔이다. 호주의 경우 기본 이용료 1불에 30분 이용료 4.5불이다. 그러니까 30분 기준으로 4배 이상 차이가 난 셈이다. 30분 130엔이면 대중교통 보다 저렴하고 빠르다.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에 갈 필요 없이 근처 아무 곳에나 주차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첫 30분은 무료다. 자전거를 이용해 바닷가 카페로 왔다. 도보로 30분 넘는 거리를 힘 하나 안 들이고 노래 두 곡 들을 시간에 도착했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자전거라는 옵션이 한끗이다.





전동 자전거라는 한끗 차이로 인해 슬램덩크 선로와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해변가까지의 길이 가까워졌다. 자전거 페달 몇 번 밟고 소정의 이용료를 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 두 곳을 보고 싶다는 의지 50과 이동에 필요한 행동력 30이 만나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번 글을 마치면 슬램덩크의 성소로 향할 예정이다. 그 가격, 그 입지, 그 편리함이 모여 기꺼운 사용으로 이어진다. 자전거라는 이용하기 편한 수단이 생기자 나의 하루 계획이 변했다. 좀 더 다채로워지고 시간을 덜 낭비하게 됐다. 뭔가 여행에 가까운 행동을 하게 된다. 카페에 앉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의 인생을 구성하는 많은 중대한 요소들이 이런 한끗의 도움을 받아 생겼다고 새삼 실감했다. 호주에서 쉐어하우스를 구할 때 신중하지 못 했던 것부터 그렇다. 집을 확인하기 전에 미리 살기로 결정했는데, 현관문을 열자마자 노숙자 쉘터같이 더럽고 정신없는 곳을 보게 됐다. 그러다 그곳의 삶에 적응하고 1년을 버티게 되고, 같이 사는 형의 소개로 너사와를 만났다. 결혼하게 되고, 마침 영주 비자가 들어간 시점에 코로나가 터지며 나라의 지원금을 받게 됐다. 그 덕에 몇 년을 걱정 없이 살게 됐다. 그 외에 내 재산 형성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주식투자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가능했다. 이는 과거 글에 정리했다. 한끗이 모든 것을 바꾼다.





일본 여행 중이다. 일본 땅에선 일본 노래를 자주 듣는다. 일본 곡 중 특히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 선호의 이유는 가사다. 도쿄 러브스토리란 일본 드라마의 주제가로 쓰였다. 러브스토리와 도츠젠니(러브스토리는 돌연히)란 곡이다. 사비의 가사는 ‘그 날, 그 순간, 그 장소에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본 적 없는 둘인 채’다. 사람 사이의 인연도, 사람과 공간의 인연도, 사람과 직업의 인연도, 사람과 취미의 인연도 모두 한끗의 영향 아래 있다. 이 한끗이 달랐을 다중 우주엔 오만 낯선 곳에서 오만 낯선 일을 하고 사는 내가 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알기 쉽지만 한 걸음 떨어져 보면 수수께끼 덩어리다.



2. 바닷마을 다이어리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슬램덩크의 배경이 된 철로에 가고 있는 도중에 바닷마을 다이어리 촬영지도 지나쳤다. 전동 자전거의 단점을 발견했다. 30분 기본 요금이 있다는 것이다. 1분을 타든 30분을 타든 내야 하는 돈은 130엔으로 동일하다. 그렇기에 절약을 하고 하루 동안 쓸 에너지를 고려했을 때 선 슬램덩크 후 바닷마을이 적합하다. 슬램덩크 배경이 가장 멀리 있고, 그 사이에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이 있다. 마지막을 먼저 찍고, 카마쿠라로 돌아오는 여정이 돈도 아끼고 체력적으로도 좋다. 에너지가 떨어지는 여행 말미에 결승점에 가까운 편이 마음이 편하다.





무수한 30대 한국, 중국 관광객 사이에서 슬램덩크의 한국판 ost를 들었다. 가슴 뜨거워지는 전주, 슬램덩크를 연상시키는 박상민 형님의 호쾌한 목소리, 마지막 ‘슬램덩크!’란 외침. 음악과 공간의 조화란 이런 것이다. 전동 자전거를 근처 주차공간에 세우고 도보로 이동했다. 사이사이에 있는 바닷마을 다이어리 촬영지를 천천히 감상하기 위함이며, 자전거 요금을 절약하기 위함이다. 걷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되 발이 아팠다. 역시 자전거 타는 편이 낫다. 130엔, 그러니까 호주돈 1.3불은 작은 돈이다. 그 작은 돈을 아끼기 위해 뚜벅뚜벅 걷는 나의 비합리성에 아연했다. 아연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니얼 카너먼 형님께서 요놈 봐라 비합리 사례로 제격이군!이라 말할 듯하다.





아야세 하루카가 카마쿠라에 머물기로 정하며 남자친구와 이별했던 바닷가 돌계단에 앉았다. 이미 먼저 와서 자리 잡은 중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왕언니의 책임감을 상기했다. 사실 그보다 카마쿠라 플리마켓에서 구매한 바라쿠타 g9 자켓의 정품 여부를 감별하는데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 멋쟁이 아저씨가 1만 엔에 판매한다는 자켓을 소매의 오염과 보유 현금이 부족한 것을 이유로 8천 엔에 구매했다. 본인이 직접 5만 엔을 주고 구매한 자켓인데, 사이즈가 큰 감이 있어 판매한단다. 바라쿠타의 기술력을 즐기다가 지퍼가 한 개밖에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지퍼 1개여도 정품일 수 있는지 확인하느라 바빴다. 결국 GPT와 구글이 정품 중에도 한 개인 제품이 있음을 알려줬다. 안심하며 다시 아야세 하루카의 책임감에 시선을 돌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카마쿠라 해변도 쇼핑 상품 정품 확인 후다.





돌계단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자, 정품 확인도 끝.. 아니 하루카 짱의 책임감도 느꼈으니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자. 나가사와 마사미가 사카구치 켄타로와 데이트를 즐겼던 해변가 식당이다. 식사는 물론 음료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3시 즈음 도착했다. ‘이 곳이 나가사와 마사미의 그 곳 맞죠? 헤헤’ 외국인 관광객스러운 말을 읊으며 자리를 잡았다. 마사미가 앉았던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테이블의 가로 세로 배치가 바뀌긴 했지만 그녀가 앉았던 위치다. 식사하기엔 이른 시간이므로 커피 한 잔을 시켰따. 커피가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가격을 보지 않고 주문했다. 비싸긴 했다. 마사미가 주문한 시라스 토스트를 추가로 주문할까 했으나 메뉴에서 찾을 수 없었다. 직원이 말하길 “그건 여기가 아니에요” 머쓱하게 아~ 그렇군요라는 말을 건넸다.





가격대가 비싼 식당이고, 인기 식당이다 보니 커피 한 잔 시키고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게 송구스럽다. 현대 사회의 당당함은 소비에서 나온다. 내가 이 가게에서 이 정도 돈을 썼으니 당당하게 머물러도 괜찮죠? 하는 느낌이다. 아이고 달랑 커피 한 잔 시킨 제가 이 좋은, 나가사와 마사미가 앉은 창가쪽 테이블에 앉아서 40분이나 시간을 보내다니 이 어찌 염치 없는 행동인가요. 저는 인간실격입니다. 인간실격도 일본 작품이죠? 일본 문학 최고입니다. 아부와 아양을 떨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맥주 한 잔을 시켜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내 체면과 염치를 어느정도 챙길 수 있다. 온실효과로 인해 꽤나 덥기에 맥주 한 잔 하면 기분이 좋을 것같다. 맥주도 비싸다. 호주 물가를 생각했다. 오, 다시 보니 선녀다.




관광지를 거닐으며 예술과 공간의 접점에 대해 생각했다. 공간이 작가의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재료가 된다. 그 공간을 그대로 가져오기도 하고, 새로운 이름을 붙여 재조합하기도 한다. 카마쿠라의 경우 분명한 레퍼런스가 있는, 작품 내에 의미있는 공간이다. 화면과 실물을 비교하며 내게 이런 자극을 준 공간이 타인에겐 저런 자극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시간 낭비하며 이런 감상이나 경험을 하지 않으려 했다. 전동자전거 탓에 어쩔 수 없이 보람있는 관광을 해버렸다. 뭘 느끼고 배우지 않으려 해도 저렴한 자전거 이용료와 빠른 속도가 경험을 이끈다. 안타깝게도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온몸으로 다시 감상해버렸다.





12월 11일


일본 여행 중 선진국 실감




일본 여행에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일본은 선진국이다. 시민성, 인프라, 도시의 청결, 문화재 관리 능력, 문화 자본, 모던함. 필터 버블이 생긴다. 장기적으로 한 의견에 노출되면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나는 실제 일본에 거주했던 사람이고,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이런 나도 영향을 받는다. 오랫동안 한국 커뮤니티를 통해 일본을 조롱하는 게시글을 목격한다. 일본 사람들의 제멋대로인 치열, 가족이 돌려쓰는 목욕 문화, 오타쿠 문화, 니트 문화, 달관 세대 등등. 1인당 GDP를 따라잡은 시점에서 일본은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라는 잘못된 인식이 생긴다. 사실 일본이 쌓아둔 부, 다른 나라에게서 받을 돈을 생각하면 이런 말 하기 어렵다. 전세계에서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로, 보유한 미국채의 가치만 원화로 1500조가 넘는다. 월세 사는 월급 350의 직장인이 한남동 유앤빌리지 소유한 월급 300 직장인을 우습게 보는 것과 같다. 일본 여행 10일 차다. 다른 나라에 빌려준 돈을 차치해도 우습게 볼 수 없는 나라다. 선진국으로써 역사가 깊은 나라다.



선진국을 실감한 사례를 몇 가지 얘기하자면, 우선 문화재 관리 능력에 있다. 토치기현 닛코에 위치만 동조궁에 갔다. 기린 맥주의 기린이 그려진 곳이기도 하며, 우리가 흔히 쓰는 현명한 세 원숭이 이모티콘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동조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인데, 그의 손자가 조상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존경하는 마음을 엄청난 돈과 인력, 시간으로 표현했다. 거대한 스케일의 궁이 탄생한 배경이다. 놀라운 점은 완벽에 가까운 관리다. 건축 후 400년 이상 지났다. 여전히 궁전의 금박은 반짝반짝하고, 엊그제 그린 것처럼 색이 빛을 발한다. 보수를 해야 하는 곳에는 전체적 미관을 해치지 않게, 각별히 소재와 색, 모양을 염두에 둔다. 자세히 봐야 후에 보수한 곳임을 깨닫는다.



동조궁에 한하자면 과할 정도로 많은 인력이 안내와 상품 판매를 위해 노동하고 있다. 한국과 호주 출신인 내가 보기엔 과할 정도의 인력 낭비다. 다소 불필요해 보이는 역할, 예를 들면 굳이 깨끗한 바닥을 닦거나, 크게 파손 염려가 없어 보이는 곳에 관광객 안내와 문화재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 저것이야말로 돈 낭비, 인력 낭비다 싶다가도 저런 과할 정도의 세심함이 이런 쾌적하고 잘 관리된 문화재를 만든 게 아닐까 싶었다.



온천 방문을 위해 도쿄에서 왕복 7시간을 써서 시골로 향했다. 그야말로 구축 집과 동네 편의점 하나, 그 외에 영업을 거의 하지 않는 오래된 가게 몇 개가 있는 시골 중 깡 시골이다. 이 정도로 한가한 곳에서 장사를 할 수 있어? 가게를 영업할수록 적자를 보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지역에 대한 의리로, 아니면 관성을 버리지 못 한 이유로 그 지역에 남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세수 확보가 어려운 동네임에도 도로가 깔끔하게 구비되어 있었고, 보수 공사를 위해 많은 인부를 투입했다. 길가에 쓰레기 하나 보기 어려웠다. 한국의 시골과는 인상이 다르다. 사람이 없고 세수 확보가 안 되는 동네라면 지자체에서 쓸 돈이 충분하지 않다. 다소간의 불편은 납득해야 한다. 일본은 어딜 가도 이 정도의 생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선이 분명하다. 그 선이 우리나라 보다 훨씬 높다. 특히 바퀴 달린 기구가 이동할 수 없는 곳이 없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더 밖으로 나오기 수월하다. 인간다운 삶, 기본적인 삶에 대해 더 오랜 기간 생각해왔던 결과지 않을까.



일본은 개인주의가 강하다. 음식을 결제할 때 각자 결제하는 게 일반적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기꺼이 자신의 개성을 표출한다. 온라인에서만 봤던 파격적인 패션을 실제로 보니 감동스럽다. 저 사람은 정말 저 사람이구나. 취향이란 건 저런 게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멋진 옷차림은 멋진 옷을 입는 사람군, 그들이 멋지다 평가하는 헤리티지 제품을 선택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니 진정한 취향이 아니라 고상하다고 믿는 취향을 선별하는 셈. 진정한 나만의 취향은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의 선택의 반영이다. 눈에 띄는 사람이 있어도 절대 시선을 건네고 쑥덕거리고 키득거리는 게 없다. 한 개인으로 존중한다. 오지랖도 없다. 내 답을 남에게 강요하는 행동을 좀처럼 보기 어렵다. 이를테면 지하철에서 훈계하는 할아버지, 양보를 강요하는 누군가,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 등이다.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내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뭘 해도 괜찮다는 입장이다.



일본의 부촌이자 유행의 첨단인 긴자 주변을 돌아다녔다. 특히 많은 자본이 투하된 건물, 긴자식스, 각종 브랜드의 플래그 스토어, 오모테산도 힐즈 등을 돌아다녔다. 유정수 씨의 '있는 공간, 없는 공간'을 읽으며 좋은 상업 공간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인테리어에 대해 문외한이다. 책 덕에 좋은 공간의 기준을 잡았다. 일본의 상업 공간이 얼마나 그 기준에 부합하는지 확인했다. 의식적으로 인테리어를 구석구석 뜯어봤다. 어느 하나 훌륭하지 않은 게 없다. 넓은 유휴공간과 컨셉을 하나 고르고 밀고 가는 뚝심(선택과 집중), 색과 소재의 전체적 조화, 공간이 주는 곡선미, 세련된 원더(와우 포인트) 등이다. 책에선 한정된 자본이기에 눈을 사로잡는, 핵심이 되는 오브제와 공간에 돈을 밀어주고 나머지는 가성비 자재를 쓸 것을 조언한다. 일본의 경우 나머지 또한 돈질 제대로 한다. 개인은 돈이 없을지언정, 기업은 부자다. 일본은 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기업의 수익을 올리는 구조다. 그 덕에 한정된 자본이 기득권으로 몰린다. 그들이 돈부림을 하니 삐까뻔적하다.



일본은 오랫동안 선진국이었다. 양질의 교육을 훨씬 긴 시간 받아왔으며, 새로운 문화를 접할 충분한 자본이 있었고, 큰 내수 시장으로 인해 세분화된 취미 생활을 즐길 여건이 됐다. 츠타야에 가보면 잡지 종류에 놀란다. 아니 이런 시시콜콜한 분야에 대한 잡지가 있단 말이야? 생전 듣도 보지도 못 한 연예인의 사진집도 있고, 한 공간을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사진집도 있다. 더 좁고 깊게 들어간다. 중국이나 신생 부자 국가들이 엄청난 자본을 다소 세련되지 못 한 방식으로 쓰는 사례를 본다. 일본은 대다수의 업종에 세련미가 있다. 공간 디자인이나 거리 디자인, 인테리어 디자인 등의 미감이 훌륭하다.



이것은 취미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의 미래가 이러지 않을까 싶다. 일본은 1970년대부터 선진국으로 지내온 나라다. 2차 대전 말미에 미국에 대량의 폭탄과 두 방의 핵폭탄을 맞았다. 쌓아놓은 인프라와 경제력이 리셋됐다. 그리고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일본 경제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성장 시기를 거친다. 70년대부터 선진국 반열에 올라 선진국 취급을 받았다. 80년도는 모두가 알다시피 최고의 호황으로 세계 제일의 부국이 됐다. 말인즉슨 한국의 경우 최근 선진국 시민으로서 다양하고 고상한 취미를 갖게 됐다. 지금의 2,30대가 자신의 취미와 소비를 4,50년 이어가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기호를 선별하고 강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소비도 특정 방향성을 갖게 된다. 소유 물건을 보면 그런 오랫동안 갈고닦은 취향이 드러난다.



전날 카마쿠라 플리 마켓에 방문했다. 바닷가에서 일반인들이 개인 소장품을 들고나와 물건을 판매했다. 스톨 하나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깜짝 놀란다. 5,60대 아재들의 세련된 취향에 감탄한다. 가장 유명한 남성 패션 잡지인 뽀빠이가 1970년대 창간됐다. 최대 편집샵인 빔즈도 70년대 오픈했다. 아메리칸 캐쥬얼, 프레피룩, 데님, 워크웨어, 바이커, 모즈룩 등등이 인기를 끌게 된다. 높아진 소비로 전세계의 헤리티지를 일본 시장으로 들여온다. 본인 취향을 갈고닦아온 아재들이 판매하는 물건을 보면 마니악 하다. 한 아저씨/할아버지의 스톨에서 재킷 하나를 샀다. 바라쿠타의 G9 재킷인데, 해링본 자켓의 근본이자 헤리티지다. 그 아저씨는 바라쿠타 자켓만 4,5개를 판매했다. 다른 제품들도 잘 모르는 어딘가의 헤리티지였다. 아재들의 스톨에서 오랜 선진국 역사가 보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누군가의 말과 평가를 자신의 것으로 삼기 전에 직접 경험하는 편이 낫다. 상대 말에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고, 나와 상대가 같은 상황을 봐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나라에 오랫동안 쌓인 부와 문화 자본과 취향을 엿본 열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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