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이전, '신카이 월드' 역주행 안내서

'나'와 '대상'으로 가득한 세계, 신카이 마코토의 대표작 4편

by 오늘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은 대상화의 세계다. 거기에는 '나'라는 이름의 주체가 있고 '내가 대하는 것'으로서의 대상이 있다. 주인공이 보고, 느끼고, 상상하고, 꿈꾸지 않는 존재들은 끼어들 틈이 없다. 여성과 남성, 청소년과 성인은 '나'에게 있어 각각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한 개인으로 귀결된다.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나 하늘 위로 흐르는 뭉게구름, 느릿하게 떨어지는 벚꽃이나 눈발은 '내'가 밟고 선 세계 위에서 아스라이 빛난다. 매일같이 지나는 전철역도, 공원도, 학교도 마찬가지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그 세상이 '나'를 규정한다.


최근 국내에 개봉한 <너의 이름은.>이 300만 관객을 돌파한 건 이러한 '신카이 월드'가 일본을 넘어 우리나라에서도 보편적 팬덤을 획득했다는 증거다. 이는 사랑하는 이를 구하는 것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작은 주인공'의 이야기란 점에서 '중2병'적 서사의 승리로도 비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녹록지 않은 현실에 지쳐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목말라하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너의 이름은.>은 '신카이 월드'의 가장 첨단이자, 15년여간 이어진 그 세계를 돌아보는 기점이 될 만한 작품이다. 이 즈음해서 다시 꺼내어 볼 만한 신카이 마코토의 이전작 4편을 추천한다. 이건 신카이 마코토의 과거이자 <너의 이름은.>의 과거이기도 하다.


<별의 목소리>(2002) "우주 너머까지 가 닿는 그리움의 세계"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유엔군에 선발돼 우주여행을 떠나게 된 소녀 미카코와 지구에 남은 소년 노보루의 교감을 다룬 작품이다. 휴대폰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던 두 사람 간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문자가 전송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점점 길어진다는 설정이 큰 줄기다. 화성, 명왕성, 시리우스를 거치며 1일에서 1년, 8년까지 늘어나는 둘 사이의 간극은 '영원'으로 수렴하는 그리움으로 애틋하게 다가온다. "세계란 휴대폰 전파가 닿을 수 있는 곳"이라거나 "우리는 아마 우주와 지상으로 찢어진 연인의 첫 세대"라는 대사는 화룡정점이다.


<별의 목소리>는 첫 단편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로 두각을 드러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7개월여 만에 만든 작품이다. 성우 더빙과 음악 이외의 모든 작업을 혼자서 도맡은 만큼 최근 작품들에 비하면 만듦새는 조악하다. 그런데도 두 주인공이 함께하는 해 질 녘 풍경이나 푸른 하늘, 우주 공간과 외계 행성에 대한 묘사에서는 감독 특유의 감성이 그대로 묻어난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 "같은 꿈을 약속한 이들의 세계"

남북으로 분단된 가상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중학교 동창생인 히로키와 타쿠야가 바다 건너에 있는 거대한 미지의 탑을 동경하고, 그곳에 가기 위해 남몰래 비행기를 만드는 게 영화의 시작이다. 함께 탑에 가기로 약속한 여학생 사유리가 갑작스레 행방불명되면서 두 사람의 꿈 또한 멈춰지고, 각각 아오모리와 도쿄에 떨어져 살게 된 이들이 3년 만에 재회하면서 밝혀지는 사유리와 탑에 대한 비밀이 이야기의 정점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꿈에서 현실로, 고향에서 타지로 향하는 주인공들의 서사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 등장하는 '꿈'과 '평행우주' 등의 모티브는 <너의 이름은>이 연상되는 지점이다. 특히 사유리를 지키는 것과 세계를 지키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는 히로키와 타쿠야는 망각과 상실 사이에서 적지 않은 시사점을 남긴다. 특히 후반부 서로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남녀가 같은 공간에서 마주하는 에피소드는 <너의 이름은>의 클라이맥스 장면과 놀랄 정도로 닮았다.


<초속 5센티미터>(2007) "현재와 과거의 첫사랑을 대하는 세계"

독립된 세 단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작품이기도 하고 세 챕터로 연결된 중편 영화라고 할 수도 있는 작품이다. <벚꽃초>는 중학생이 되면서 멀어진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소년, <코스모나우트>는 짝사랑하는 남학생에게 고백할 날만을 기다리는 소녀의 이야기다. 마지막 단편 <초속 5센티미터>에서는 어른이 된 남자와 여자가 각각 현실에서 잠시 멈춰 선 채 어린 시절 풋사랑을 추억한다. 영화는 세 이야기에 모두 등장하는 주인공 다카키를 중심으로 각각 중학생, 고등학생, 성인으로서 대하는 첫사랑을 세심하게 조명한다.


<초속 5센티미터>는 신카이 마코토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애잔하다. 상대방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한 '나의 마음'에 방점을 찍는 태도가 그렇고, 아련한 아름다움과 슬픔으로 가득 채워진 장면 장면이 그렇다. 시골과 도시를 넘나드는 배경, 밤과 낮, 모든 계절을 아우르는 풍경들은 인물들의 감정을 비추는 데에 특히 주효하다. 철로를 사이에 둔 남녀가 서로 돌아보는 순간 열차가 이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장면, 이루어질 수 없는 두 남녀가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로켓을 함께 바라보는 장면은 영화가 지닌 감성 그 자체다.


<언어의 정원>(2013) "소년과 여자가 만난 세계"

열다섯 소년 타카오와 스물일곱 여자 유키노의 이야기다. 비 오는 날 도쿄 한복판 공원 정자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이루어지는 교감이 영화의 큰 줄기다. 구두 디자이너를 꿈꾸는 타카오가 유키노에게 자신의 꿈을 투영하고, 남모르는 상처를 지닌 유키오가 타카오에게 위로받는 전개는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특히 조심스레 서로를 향하던 두 사람의 마음이 마침내 서로에게 전해지는 클라이맥스 신은 내내 여유로웠던 영화의 템포 속에서 돌연 가슴을 치며 '필살기' 역할을 톡톡히 한다.


<언어의 정원>은 신카이 마코토의 이전작들에 비해 한결 힘을 뺀 듯한 작품이다. 흔히 등장하던 교외 지역에 대한 묘사 없이 오직 도쿄를 배경으로 했고, 두 주인공이 만나는 곳은 한 장면을 제외하곤 공원이 전부다. 이들이 각자 따로 등장하는 로케이션이라고 해봤자 학교나 집, 전철역 정도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공원 로케이션은 이 영화의 정수라고 할 만하다. 장마철 내내 비 오는 날마다 정자에서 만나는 타카오와 유키노는 <너의 이름은> 속 타키와 미츠하처럼 둘로만 이어진 세계를 만들어 냈다.


자의식과 대상화로 점철된 '신카이 월드'를 두고 흔히 '세카이계'로 통칭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계보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여중생이 전투요원(?)으로 차출되는 <별의 목소리> 속 설정에서는 <최종병기 그녀>나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흔적이 느껴지고, <초속 5센티미터>의 주인공 타카키에게선 자의식 과잉으로 정작 교감이 불가능한 히키코모리의 모습마저 엿보인다. 그럼에도 신카이 마코토가 매니아층을 넘어 일반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건 그의 세계가 멈추지 않고 성장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우주 멀리 떠난 여자친구의 문자메시지만 기다리던 소년(<별의 목소리>)은 어느새 '그녀'에게 남다른 청사진을 제시했고,(<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폭설이 내리는 밤 수도 없이 연착되는 열차를 타고 그녈 만나러 가기에 이르렀다.(<초속 5센티미터>) 그리고 마침내는 그녀의 상처를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한 데 이어(<언어의 정원>) 그녈 구하고 재난까지 막았다.(<너의 이름은.>) 그렇게 '신카이 월드'는 신카이 마코토 개인의 세계에서 우리 모두의 세계로 조금씩 팽창하고 있다. 아직 불완전할지언정, 끊임없이 한 발짝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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