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제주 밤 가을

나는 누구인가

by 꾸깃글

25.10.19

오랜만에 여행 일기장을 펼치고, 조금 답답한 심정을 펜으로 눌러 담았다.

‘너무 많은 연결, 너무 많은 책임, 너무 많은 데드라인과 너무 많은 외로움과 그만큼의 감사함’

시월이 또다시 반으로 접히고도 며칠 지났다.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와 시차를 느끼는 여행자가 아쉬울까 싶어, 흩날리는 가을 낙엽이 이 시간을 알려주었다.

이제, 연말이구나, 다시, 이렇게.

달라진 게 없다.

봄에 이박삼일 음악 들으러 갔던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잘 사니 친구들, 근황을 세 줄로 요약해. 한 명은 그 때와 다른 취미와 라이프 스타일을, 다른 한 명은 여기저기 아프다고 했다. 나는.. 나는 그대로네. 여전히 바쁘고, 해야 할 게 많고, 일정이 빡빡하고, 애인은 없고, 계획이 없으면 불안하고, 건강을 가장 큰 장점으로 밀고 있고..

타인에게 자기소개를 해야 할 때마다, 내 모습 중 어느 부분을 공개할지 잠시 머뭇거린다. 어느 부분은 숨기고, 어디까지 말해야 놀라지 않고 그냥 네, 하고 넘어갈까, 아니 어느 부분은 너무 자랑 같으려나, 어 사실 자랑 맞긴 해. 이런 나 저런 나 사실은 다 같은 ‘나’인데, 다 닮은 ‘나’이고 그냥 피할 수 없는 ‘나’인데 무엇을 고민하는 거야. 모자라고 부족한 모습은 보정해서 알려주고 싶은 그저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나’를 인정하고 넘어간다.

혼자 여정을 시작한지 10시간이 넘어가면 마음 속의 말이 밖으로 나오는 편이다. 방금은 엄청난 바람 앞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도를 보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누가 나 지켜보면 진짜 재밌겠다. 요즘은 몸의 변화에 예민해져서 더 의미없이 나이와 시간 탓을 해보곤 한다. 헛헛함과 동시에 길을 지나가는 여럿 옆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몇몇 단어는 또 참지 못하고 입밖으로 나왔다.

“아 됐어, 이 순간도 언젠가의 내가 그리워할 감사한 조각이야.” 또 말로 나왔다.

사실 오늘 처음으로 혼자 고기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오겹살을 구워 먹으며 맛에 감탄하는 어른이 되었다. 또 어둑어둑한 조용한 길을 겁내지 않는 씩씩함도 꽤 생겼다. 아주 예전에 혼자 온 제주에 찾아온 밤은 정말 정말 무서웠는데 말야.

“이거 봐, 파리가 안전해진 것도 있지만 내가 성장한 게 맞았어!” 혼자 여행이 주저되지 않는 이유를 찾았다. 또 발견할 내 모습이 남아 있구나.

그것도 잠시, 혼잣말보다 조용해진 메시지창을 들락날락하는 나를 본다. 좋아요와 댓글 수를 확인하는 나를 본다. 비 오는 제주의 일요일 가을밤 만큼 마음 한 켠이 고요 속에서 눅눅해졌다.

한 방울 씩 스며드는 외로움에 충분히 젖어 들었지만 이 깊이에서는 잠수할 수도, 헤엄칠 수도, 반신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냥 내가 제일 잘 하는 ‘빠르게 흘러가기’ 버튼을 누르고, 앞에 놓여진 것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해야 할 일과 해내야 하는 역할과 해야만 하는 과정들에 대해서 떠올린다. 그것들은 또 시차가 없이 다가온다.

또 어떻게든 하겠지. 또 잘 했다고 옆에서 많은 친구들이 말해주겠지. 또 나는 감사해 하며 그만두고 싶던 순간을 잊고 다음 스케줄을 채우겠지. 나는, 다시 다르지 않음을 반복하겠지.

내년 즈음에 다시 느끼겠지, 사실은 많이 달라졌지만 “나는 참 그대로야”라고 말하겠지.

매거진의 이전글영하의 온도에도 나뭇가지에 걸린 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