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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요커 May 11. 2020

[어머니]의 조리법, 영원히 기록되다

벌써 1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고 먹먹해진다. '50년 뒤에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말이다. 나의 어머니는 늘 내게 '동생과 많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부모와는 반 평생이지만 형제는 한 평생이니까'라며, 형제간 우애를 강조하셨다.


부모와는 반평생...


이때의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셨을 것이고, 내겐 그 '반평생'의 반은 이미 흘러가 버리지 않았나를 생각해보면 가슴이 더 먹먹해지곤 한다
그 말이 어릴 적에는 참 와 닿지 않았다.
그저 내 부모님은 꼭 영원히 나와 함께, 그리고 내 곁에 계셔줄 것만 같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것 같다.


언제부턴 인가 그 말이 참 가슴 아프게 와 닿은 순간부터 나는 부모님께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변하게 된 것 같다. 문득 아버지의 카톡에 업데이트 소식이 뜨면서 들어가 본 카카오스토리와 페북에 아버지 혼자 쭉 일상을 기록하신 내용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다가, 문득 1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 50년 후에 봉인 해제되어 공개될 어머니의 전주 음식 조리법이 타임캡슐에 담아져 기록된 행사 사진들을 발견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생각에 잠기게 되었고, 부모님이 행하고 계셨던 나눔의 삶에 대해 새삼 자랑스러워진 하루였다.


어머니의 조리법이 다음 세대를 위해 기록되었다


나의 부모님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시고는, 얼마 전 SBS 골목식당에서 다녀갔던 군포에서 (역전시장은 아니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 분식집으로 요식업을 처음 시작하셨다.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부모님은 할머니가 고향인 전주로 귀향을 하고 싶어 하셔서 모든 살림을 접고 전주로 내려오셨고, 그곳에서 장사를 시작하셨다. 전주에 있는 서부시장 인근에 5층 건물 지하를 빌려 당시에 '울릉도'라는 상호로 식당을 시작하셨고, 매일 아침을 직접 남부시장에서 장을 보며 신선한 식재료로 음식을 준비해서 꽤나 많은 단골손님들을 확보하셨다. 내가 한참 어릴 적이라 또렷이 기억들이 나지는 않지만, 어머니는 그때부터도 가게 영업이 끝나면 주방에서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연구해보시면서 빼곡히 무언가를 적어오셨던 것 같다.

무엇인가 연구해야 하고 알아내야 하면 끝까지 파고드는 나의 성격은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와 판박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열심히 악착같이 장사하시고 모으시고는 전주 효자동에 당시 새로 개발하는 조그마한 주택 단지에 3층짜리 집을 짓고 1층에 가게를 오픈하셨는데, 그것이 어느덧 22년이 된 것 같다. 내 흐릿한 기억에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쯤 (1998년) 가게를 여셨던 것 같아서 햇수로만 보면 22년이 맞는 것 같다. 집을 짓는 동안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공사장을 방문하며 꼼꼼히 공사하는 것도 살피시고 애착을 많이 가지셨던 것 같다. 당시 부모님은 개인의 상호를 등록하지 않으시고 '연기나는마을' 효자점이라는 생고기 구이 전문점의 프랜차이즈를 시작하셨다 (연기나는마을 효자점). 당시에는 '녹차 먹인 돼지 삼겹살'이 유명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정보를 찾아볼 수도 없지만 전국에 1~2개 남은 유일한 '연기나는마을'이다.

2012년 눈 쌓인 어느 날, 부모님께 받은 가게 사진


장사 초반에는 가게에 줄을 설 정도로 손님이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내 부모님께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내 사춘기 시절에 얽힌 기억이다. 나는 왜 그렇게 사춘기 시절의 반항심이 크게 왔었는지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어머니와도 사소한 의견 충돌이 있으면, 가게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반항하기 일쑤였고, 부모님 가게가 손님이 줄어들게 된 것이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하다.


가게가 그렇게 바빴을 때, 내가 좀 더 거들고 열심히 도왔다면 어땠을까


그런 후회가 항상 맴돈다. 왜 부모님을 돕지 못하고, 계실 때 잘하지 못한 후회는 늘 그런 것들을 만회하기 힘들 때가 되어서야 밀려오는지 그저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래도 내가 군대를 가고,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오는 그 사이에도 부모님은 특유의 성실함과 노력으로 많은 단골손님들을 만들었고, 여러 위기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들이 다 그런 감사한 단골손님 덕분이라고 몇 번이고 말씀하곤 하신다. IMF, 각 종 식료품 관련 질병,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까지 가게를 운영하시면서 휘청할만한 위기를 많이 겪으셨음에도 그저 살아남아 있음에 늘 감사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곤 한다.


작년 3월에 우리 부모님께는 아주 의미 깊은 행사가 있었다. 바로 음식의 고장인 전주시에서 선정한 전주 음식 조리법에 어머니의 양념 조리법이 선정되어 50년을 봉인할 타임캡슐에 봉인이 되었던 것이다. 음식 장사하기 쉽지 않고, 어디든 들어가도 소위 평타는 친다는 치열한 전주 요식업의 세계에서 어머니의 조리법이 뽑혀 봉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또 한 번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명언을 믿게 되었다. 작년 9월,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부모님을 미국으로 초청을 했을 때 도란도란 처음으로 가게 운영에 대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어머니가 처음 전주에서 가게를 시작할 때의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내 열정 어디에서 왔나?'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많이 표현 못해드렸지만, 정말 자랑스러워요! (나의 부모님은 내 모든 글을 읽고 계신다)


당시 어머니는 전주에 가게를 오픈하기 전에 경기도의 한 음식점을 주구장창 상주하다시피 방문하며 한 조리장인에게 노하우를 전수받으려 무던히도 애를 쓰셨다고 했다. 그 조리장인의 기본 비법에 어머니만의 연구와 노하우를 지속적으로 연구하여 많은 단골분들께 사랑받는 당신만의 조리법을 만들었고, 그런 영광스러운 노력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열린 전라북도 음식 대전에서도 아쉽지만 그래도 당당히 2위를 차지하시는 등 30년가량을 요식업에 올인해서 노력하신 것들이 이제야 인정받으시는 것 같아서 정말 기뻤다.


2위 차지하신 전북 음식문화대전! 나는 엄청나게 아쉬운데, 부모님은 그 자리에 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셨다
그런데 정작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그러한 영광들보다, 단골손님들이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찾아와 주시며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할 수 있음에 더 큰 영광과 감사를 느낀다고 하신다.

내 기억 속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늘 맛있는 것을 해주셔서 내가 먹고 있으면 단골분들이 '아들은 무슨 맛있는 것을 먹여요?'라고 물으시면 지체 없이 나를 위해 해 주신 요리의 여분을 만들어 두신 것을 손님께 드리거나, 자신 있게 '손님 드시는 것도 맛있어요! 저는 제 아들들에게 못 먹이는 것 손님들에게 절대 드리지 않아요'라고 말씀하신 것이 귓가에 맴돈다. 그러한 장사 철학과 연구,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부모님이 계신 것 같아서 나 스스로는 정말 자랑스럽고 멋진 부모님이시다. 또한 지역의 노인 공경 캠페인의 일환으로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식사 대접에도 어르신들을 초대해서 식사 대접을 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계셔서 무척이나 자랑스럽기도 했다.

벌써 몇 해째 이어서 하고 계신 어르신들을 위한 식사 나눔


그리고, 가게에서 일한 분들께도 얼마나 잘 대해주셨는지, 이제와 서야 느낄 수가 있었다. 늘 가족을 위해 먹을 것이라도 하면 꼭 나눠 드실 수 있게 더 준비해서 드리기도 하고, 감이나 밤이라도 따오면 늘 한 보따리 챙겨주시거나 김장을 하면 몇 통씩 나눠드리는 등 '경영'을 생각하면 손익을 망치는 일명 '퍼주기'를 해오시던 부모님이셨기에 그러한 부분도 참 자랑스럽고 따듯한 분들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직접 산소에 매실나무와 뽕나무를 심고 키워서 재배해서 손님들께도 나눠드리거나 특별한 반찬을 만들어 대접하기도 하신다. 나무들을 키우실 줄이야!


그런 자랑스러운 부모님을 생각하다 보니 어머니의 음식과, 그리고 그 사랑이 몹시도 그리워지는 하루였다. 50년이 지나면 나는 지금의 내 부모님보다도 더 나이가 많아져 아마도 내 인생의 끝자락에서 어머니의 조리법을 손에 쥐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음식을 맛보고 눈감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정말 오늘 하루만큼은 기분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슬프기도, 그리고 벅차기도 한 하루였다. 그렇게 그런 마음으로 아버지의 카카오스토리와 페이스북으로 사진들을 보니 오늘만큼은 내가 작가로 활동하는 브런치에 다 가라도 부모님 자랑 시원하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노력 못지않게, 아버지는 사회 공헌 활동에 앞장서 계셨다. 처음 의용소방대 활동을 하신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의용소방대에 총무로 활동하시며 봉사활동이나 수해복구, 실종자 찾기 등 각 종 사회에 필요한 분야에 앞장서서 활동하시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력을 하고 계셨다.

제복 입은 아버지의 사진이 나와 아내의 눈에는 너무나 멋져 보였다!


늘 사진을 올리시면 '좋아요'만 누르고 뿌듯하긴 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고 계셨다는 생각은 깊이 하지 못했던 것 같아서 오늘 사진들을 보면서 참으로 뿌듯했고, 정말 멋진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참 자랑스럽습니다! 쑥스러워서 표현을 잘 못해서 죄송해요!



세상 누구에게나 자신의 부모님만큼 존경스럽고 멋진 분들이 계실까 싶지만 나는 그래도 내가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고 이렇게 자라고, 부모님께 이런 큰 감사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부모님께서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인정받고 살아오셨음에 큰 행운이 함께 했다고 느낀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비록 어버이날 두둑한 용돈이나 선물을 드렸더라도, 한 번쯤은 더 전화를 걸어서, 한 번쯤은 집에 들어와서 내 방에 들어가기 전에라도 부모님과 한마디 대화를 더 나눠보면 어떨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내게 너무 가슴 시린 말이었던 '부모는 반평생'에서 얼마의 시간이 남았는지 생각해봤으면, 혹은 이미 떠나보내신 이들에겐 생전의 부모님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를 다시금 새겼봤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이번 글을 마친다.


* 저도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고, 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니 혹시라도 이 글을 읽으시고 전주 효자동에 있는 저희 부모님 가게인 '연기나는마을 효자점'에 오시면 꼭 브런치 글 보고 왔다고 말씀해달라고 하시네요!

전주 방문하시면 한 번 들러보세요 ^^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며 글을 쓰다보니, 이성을 중심으로 잡고 글을 쓰는 것이 쉽지가 않았지만 그래도 부모님들만 생각하며 진솔된 글을 적고자 노력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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