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산』, 『검은 꽃』, 『봄날』로 읽는 민주주의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한국 현대 문학이 집요하게 추적해온 궤적은 조금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그것은 찬란한 영웅의 승전보가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기꺼이 소멸을 선택한 이름 없는 개인들의 이야기다.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김영하의 『검은 꽃』을 거쳐 임철우의 『봄날』로 이어지는 서사의 흐름은 개인이 역사 속에서 지워지는 세 가지 단계를 보여주지만, 역설적으로 그 소멸의 끝에서 한국적 민주주의의 정수가 발견된다.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혁명은 실패하지만, 주인공 장길산은 끝내 관군에게 잡히지 않는다. 그는 안개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물리적 실체를 잃는 대신 '전설'이라는 영속성을 얻는다. 개인이 상징으로 남는 이 단계에서 민중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장길산은 죽지 않았고, 그가 살아있는 한 압제받는 이들의 꿈은 언제든 다시 점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하의 『검은 꽃』은 국가라는 울타리를 잃고 멕시코로 팔려 간 이들의 삶을 다룬다. 장길산이 신화적 아우라를 입었다면, 에네켄 농장의 이들은 공식 역사에서 누락된 채 흑백사진처럼 희미해져 간다. 이들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기억'을 붙들지만, 시간은 무심하게 그들을 지워낸다. 하지만 이 망각에 맞선 생존의 투쟁은 역사가 단순히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버림받은 개인들의 숨결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임철우의 『봄날』은 1980년 광주, 패배가 예정된 죽음 앞에 선 이들을 비춘다. 여기서 개인의 죽음은 처절할 정도로 고요하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두 사람이 죽었을 때도 아무 일도 없었다.
열 사람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어디에서도 어둠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지만.
— 『봄날』 2권 중 박주관 『몇 사람이 없어도』(1986년)에서
작품 속에서 인용된 이 시구처럼,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서 개인의 죽음은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인공 윤상현과 시민군들은 그 '아무 일도 없는 듯한' 소멸의 자리를 끝까지 지킨다. 그것은 영웅이 되기 위한 결단이 아니라, 곁에 있는 동료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인간다운 부끄러움과 공동체에 대한 마지막 책임감이었다.
이 지점에서 한국 서사는 인접 국가들과 결을 달리한다.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 서사가 대체로 체제를 수호하는 초인이나 지도자의 서사에 머물 때, 한국 문학은 평범한 시민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소멸의 골짜기'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장면을 끊임없이 재발명해 왔다.
열 사람이 죽어도 아무 일 없던 세상은, 그 소멸을 기꺼이 선택한 이들이 남긴 '부재의 기록'을 통해 비로소 뒤집히기 시작한다. 민주주의라는 형식은 서구에서 왔을지 모르나, 그 안을 채운 뜨거운 온기는 거리에서 스스로 씨앗이 되어 사라진 평범한 이들의 연대에서 온 것이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영웅이 아니라, 소멸을 무릅쓰고 끝내 자리를 지킨 우리 곁의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