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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연대 Aug 26. 2020

시민력은 연기론이다

[시민력을 찾아서⑤] 청소년문화공동체 품 심한기를 만나다

시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꾸어 갑니다. 국가와 자본에 동원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변화에 참여하고 협력하는 힘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시민들은 언제나 자기 삶의 가치를 표현하고 소통하며, 사회적 감각을 진화시키고 갈등을 해결할 잠재적인 능력을 키워왔습니다. 시민자치문화센터는 <시민력을 찾아서> 프로젝트를 통해서 시민력을 위해 활동하고 협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시민력을 찾아서> 다섯번째 인터뷰이로 청소년문화공동체 품과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심한기를 만났다. 심한기는 20대 때 친구 셋과 청소년문화공동체 품을 꾸린 이래 현재까지 운영에 함께 하고 있다. 거의 30년을 활동하고 있지만, 지루하거나 정체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최근에는 서울시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운영도 시작하며, 거버넌스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인터뷰 당일, 품과 마을배움터는 학교 대신 공간을 찾는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신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협력을 품다 : 운동과 거버넌스

1992년에 품 청소년놀이문화연구소를 개소한 이래, 30년 가까이 청소년 관련 일을 해오셨다. 활동을 하시며, 재단 내외 혹은 관과의 관계 등 다양한 분기점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두 분기점에 대해 여쭤보고 싶다. 먼저 ‘사업에서 운동으로 시각의 변화'라고 말씀하신 2004년 무렵이다.

시작은 단순했다. 청소년을 만나고 싶은데 청소년을 만나는 조직이나 환경은 경직되고 획일화되어있었다. 청소년 활동이라는 게 공교육이 획일화되어있어서 시작된 활동인데, 그것 역시 획일화되어있었다. 나도 청소년수련관에 입사한 첫날, 노조 가입하지 말라고 사인하라길래 점심도 안 되어 바로 퇴직했다. 이후 맨손으로 청소년 활동을 시작해서 노는 문화, 생태, 역사 등 우리 안에서 관심사가 진화해왔는데, 하고 싶은 것만 해서는 세상이 바뀌는 건 없더라. 아이들을 만나며 많은 걸 해왔는데 각각 의미는 있지만 ‘사업'을 해왔더라.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이 지났지만, 아이들이 집과 학교로 돌아가면 똑같은 세상이구나 싶더라. 그래서 운동적인 관점을 갖고 움직여보자고 생각해 싸움을 시작한 게 그 무렵이다. 여기서 싸움이란 나가서 하는 투쟁이 아니라, 청소년 환경에서의 싸움이다. 청소년 학자나 교사, 부모가 갖고 있는 관점이나 정부의 입장에 대해 반론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 지향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한창 때는 싸움만 했다(웃음). 정부 공모 사업을 받았다가도 부당한 요구를 당하면 항의하고 돌려보내기도 했다.


서울시 제1호 동북권역 마을배움터를 개소하게 된 것도 분기점 중 하나로 보인다.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하자는 철학이었다. 거기에 끌려서 후원하시는 분도 많았다. 그간 수련관이나 문화예술교육기관을 위탁운영해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자치구청장이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자율성을 위해 단칼에 거절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동북권역 마을배움터를 운영하고 있다. 우선 경제적으로 유지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자체적으로 공간이 없으니 여러번 이사를 하게 되고, 열악한 공간에서 청소년을 만나야했다. 한편, 활동가들이 훌륭한 뜻을 갖고 품에 함께하더라도 결혼을 하면 떠나야만 하는 현실도 안타까웠다. 

이후 공공성에 대해 스터디하며, 우리가 지향하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공공의 자원과 공간을 자유롭게 쓰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고 내부적 합의를 만들어냈다. 공공의 자금으로 하고 싶은 걸 잃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사례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컸다. 다행히 서울시와도 뜻이 잘 맞았다.

여기도 공공시설이지만, 공공시설 같아보이지 않는다. 설계부터 아이들과 함께 참여해 자율성을 가진 공간을 만들었다. 운동을 시작하며 또다른 시도와 방식을 만들기 위해 배움터를 만들었다. 


내부적인 반대는 없었나?

후원자들이 300여 명 되는데, 큰 반대나 충돌은 없었다. 갑자기 선택했더라면 그랬겠지만, 지난 10년간 내부적으로 토론해오며 합의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거버넌스’를 위해선 내부적인 합의도 중요하지만, 외부적인 환경도 중요한 듯 하다. 마을배움터의 경우 어떤 조건이 갖춰져서 가능했다고 판단하나?

서울시의 변화가 컸다. 민간 전문가들이 서울시에 들어가며 현장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특히 마을공동체과가 생기고, 서울시와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에서 마을학교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3년간 마을학교 프로젝트를 같이 하며 물꼬가 트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유지될까? 가만히 있어선 안 될 것 같다. 시장이나 정치적 지형이 바뀜에 따라 공공시설과 현장은 물타기하듯 바뀌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향을 지켜가는 와중에,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협치를 만들어갈지 고민하고 있다.


거버넌스 경험을 통해 느낀 바가 있다면?

행정에서 공공성, 효율성, 투명성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신뢰하지 못하는 관계에서 얻는 불필요한 작업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다. 불신이 오래간 쌓여와서, 행정 절차로 만들어진 것 같다.

독립적으로 할 땐 감사나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1,500원짜리 물건을 산다면 진짜 샀어? 영수증 줘봐, 사진 줘봐 하는 식으로 행정이 만들어져있다. 물론 투명성도 중요하지만, 이런 절차 자체는 불신 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현장에서 하지 말아야할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피곤함이 누적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잘 해나가고 있다.


좋은 제도를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상 우리가 거버넌스를 할 때는 거대한 제도 뿐만 아니라 한 명의 담당자와 소통해야 하기도 한다. 제도 외적으로, 관과 신뢰를 쌓아본 방법이 있다면 소개하달라.

신뢰와 소통이 가능하다고 확신한 계기는 강북청소년문화축제 ‘추락'이었다. 23년 전, 처음 ‘추락’을 진행할 때만 해도 강북구에 축제할 만한 공간이 많지 않아, 구청 앞마당과 주차장을 막아서 했는데 구청에서 비협조적이었다. 왜 애들이 공부 안 하고 이런 걸 하냐고 한마디씩 하곤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꾸린 축제기획단에서 구청 직원들이 음료수도 선물하고 박수도 쳐주는 게릴라를 했다. 왜 이런 기획을 했냐고 물으니, 공무원들은 민원만 받았지 응원 받은 적이 없으니까, 우리가 놈팽이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더라. 이렇게 꾸준히 진행하다보니, 시스템과 제도 외에 보이지 않는 신뢰감이 생겼다. 공무원들이 추락을 다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잘 협조해주고 응원까지 하러 나와준다. 하나의 사안을 두고 설득하고 조율하고 협상하는 것 뿐만 아니라, 관계와 생각을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되었다. 신뢰는 쌓여가고 이어져가는 거니까. 우리도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발견을 했다. 아이들의 힘이 컸다.


꾸준히 했기에 힘이 생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많은 비영리단체가 후원만으로는 운영이 힘들어, 공모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배움터 수탁 운영 이전에 지속성을 위해 무엇을 고민했었고, 독립적인 활동을 위해 어떤 노력이 있었나?

우리는 후원자를 주주라 부른다. 우리 가치에 투자하면, 의미와 가치라는 배당으로 돌려주겠다는 의미다. 공모사업으로 조직이 생존한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 말이 안 된다. 그러나 방법이 없으니, 가치와 의미로 버티게 된다. 저도 28년간 활동하며 답을 찾진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죽지 않았고, 힘이 남아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가치, 집단이 갖고 있는 가치가 흔들려선 안 되고 이게 쌓였을 때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활동가 한명 한명이 여기서 성장하고 있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게, 조직 운영이 되어야 한다. 사명감으로 1~2년을 버틸 수야 있겠지만 오래 갈 수는 없더라. 그 다음이 경제적인 부분이다. 품도 그 힘을 유지해왔기에 후원자도 줄지 않고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우리도 30명의 후원자에서 시작했는데, 현재 300며에 달한다. 후원자 분석을 해보니 15년 이상 후원자가 많더라. 우리 단체가 지향했던 힘이 아직 살아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 힘이 활동가에게 전달이 되어야 한다.

공모사업을 할 때, 우리가 지치는 사업은 받지 않았다. 우리가 꼭 해야하는 사업인데 세금으로 하면 더 좋겠다는 사업에만 참여했다. 궁핍했지만, 굶을 정도는 아닌 상태를 유지해왔다.

아무튼 큰 해답이 될만한 것들은 아직 찾지 못했고, 현재 단계에선 협치와 민간협력을 통해 비영리 단체의 정신을 유지하는 게 공공성의 재해석이라 생각한다. 공공의 자원을 시민이 공유하고, 이에 대한 신뢰를 만들어가는 게 좋은 운동과 싸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청소년을 품다 : 교육과 시민력

올 2020년은 ‘코로나’로 기억될 것 같다. 다양한 활동들에 제약이 걸려 있는데, 그간 이어온 청소년문화축제 <추락>은 어떻게 진행할 계획인가?

추락은 너무 좋은 행사지만, 하루 행사를 위해 일년을 소진하기에 다들 너무 지쳐있다. 변화와 쉼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작년까지만 하고 내려놓기로 했다. 그랬는데 마침 코로나19가 터졌다.

올해에는 추락이란 이름을 안 쓰고, 이 공간에서 현 상황에 맞는 축제를 진행할 예정이다.


오랜 기간 강북지역 대표 청소년 축제로 자리잡은 '추락' (2017)


요즘 어떤 친구들이 품을 찾고 있나?

옛날에 품 기획단을 꾸리면 공부 잘하는 애, 싸움잘하는 애 등 다양한 친구들이 왔다. 학원 땡땡이 치더라도 참여했는데, 지금은 잘 모이지도 않을 뿐더러 기획단 활동을 하면서 학원 시간이 되면 학원으로 간다. 사회에의 복종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에서 뭔가 움틀거리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


현재 진행 중인 <십만원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해달라.

<십만원 프로젝트>는 청소년들이 자기 힘을 갖고 시도해보는 힘을 키우기 위해 기획하였다. ‘우리가 너를 믿는다'는 게 핵심이다. 십만원을 줄테니, 뭐든 해봐. 너는 한 인간으로서 실패할 권리가 있어라는 생각으로 기획했다. 작년부터 시작해, 올해엔 18개 팀이 참여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윗층에서 만나고 있다.

내가 친구에게 4만원을 꿨는데 갚겠다고 참여 신청한 친구도 있고, 나이키 신발을 사고 싶다며 참여 신청한 친구도 있다. 이것까지 줘야할지 긴 회의를 가졌다(웃음). 그 친구들과 미팅을 갖고,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걸 해보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냐고 설득하기도 했다. 이게 그래도 국민들이 낸 세금인데 하며(웃음).

이외에, 대한민국에서 하나 뿐인 티셔츠를 만들겠다는 청소년, 자해하는 청소년에게 관심을 갖자는 캠페인을 하겠다는 청소년, 길에 사는 고양이들과 공존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하겠다는 청소년 등 다양한 청소년이 참여하고 있다.

고3인 친구는 고3이 되고선 영혼이 없어진 것 같다며, 3일만 열심히 놀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단 한시간이라도 다른 친구들이 쉴 수 있게 하고 싶다고 했다. 계획서를 쓰면서부터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한다. 공부나 수능을 포기하지 않아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지 않나.

향후 <십만원 프로젝트> 출신 끼리 청년 그룹을 만들어보고 싶다. 우리가 하나 하면 10년 이상 하는 게 체질이라(웃음).


2020년 온라인 화상회의를 통해 첫 만남을 가지는 <십만원 프로젝트> 참가자들


시민력은 교육될 수 있는 것인가? 가능하다면 단순히 지식 전달의 형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깨쳐가는 것일 텐데.

우리가 시민력을 고민하게 된 건 청소년들을 만나왔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에겐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힘이 없었다. 처음엔 교육으로 될 줄 알았다. 사례 조사해보니 프랑스에선 중학교 때부터 시민사회에 대해 교육하더라. 학습으로 가능할까 싶어 시도도 해봤다. 그런데 분과항목처럼 하나의 주제에 대해 교육하는 걸론 가능하지 않고, 모든 문화와 모든 교육과정 안에 스며들어 발현되어야 쌓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캠프를 가거나 상담을 하거나 놀거나 기획을 하는 모든 과정에서 시민력에 대해 생각한다. 캠프를 가도 생태에 대해 생각하고, 자기가 사는 환경에 대한 비교를 하는 식이다. 과목으로 한 게 아니라, 스스로 경험하고 부딪치면서. 결국 시민력에 있어 교육이 중요하지만, 지금 교육 방식은 시민력에 도움이 안 된다. 활동과 교육과 경험을 나누지 말고, 이 안에서 골고루 시민력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통찰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10대 뿐만 아니라 청년과 주민 대상으로도 마찬가지다.

자기 힘을 갖지 못한 친구들이 품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청년이 되었을 때 잘 사는 사례들이 많다. 여기 활동가의 반이 중고등학교 때 품에서 놀다가 다시 온 경우가 많다. 대기업에 간 친구, 시골에서 사는 친구 등 다양하지만, 많은 친구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거나 함께 하려 노력한다. 장사를 해도 공동체를 생각하려 한다. 이런 사례들을 보며, 크게 드러나진 않지만 우리가 시민력 공부를 잘 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 협의의 공동체와 생각과 지향을 공동체의 차이를 강조한 바 있다. 공동체성과 시민력은 어떻게 다를까?

비슷한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한 개체의 존재감과 다른 개체의 존재감이 존중되고 인정받는 게 공동체라면, 시민력도 마찬가지다. 자기 목소리를 낼 뿐만 아니라 타인과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한편, 가끔 공동체성이 지구적인 생각을 갖히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마을 관련해서 그렇다. 행정구역으로 묶인 마을이 하나의 우주라면, 마을 공동체 사업을 통해 다른 우주와 만나는 일이 오히려 줄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그래서 시민력이 공동체성 안으로 들어가면, 공동체가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질문과 답이 다 추상적이었나?(웃음)


우문에 현답으로 답해주셨다(웃음). 시민력은 ㅇㅇ이다라고 정의하면?

시민력은 연기론이다. 연기론은 ‘모든 것은 연결되어있다'는 사상으로, 네팔에서 티베트 불교 스님들을 만나며 많이 들었던 말이다. 정치도 나와 무관하지 않고, 기후도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우리동네 길냥이도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죽이고 싶은 미운 사람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아는 게 시민력이 아닐까. 


품이 어떤 공간으로 기억되길 바라나?

예전에는 자유로운 공간이라거나 멋있는 공간이라고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5년 전부터는 아이들이 느끼는 만큼 느끼고 갔으면 좋겠고, 아이들이 무언가를 느낄 때 거기에 잘 반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목표가 있는 건 중요하지만, 하지 않아도 될 것을 만들어가기도 하니까.


. . .

2020. 8. 26. 박이현∙이두찬. 시민자치문화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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