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슴벌레식 문답> 도주할 수 없는 자아의 체념
피투(Facticity)는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조건 속으로 던져지는, 즉 억지로 주어진 삶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피투는 자유를 옥죄는 굴레이다. 태어난 곳, 얽힌 관계들, 벗어날 수 없는 환경 모두가 여기에 속한다. 이 조건들은 숨 막히도록 단단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자신의 삶을 찾아 나가야 한다.
권여선의 단편집 《각각의 계절》(2023)에서 <사슴벌레식 문답>은 피투를 차가운 방식으로 비추어준다. 낯선 서울에서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네 명의 인물. 그들은 힘겨운 삶을 견디며 자신이 어떻게든 여기에 도달했음을 받아들인다.
30년 전 여행, 방충망이 있는데도 들어왔던 사슴벌레는 방 안을 헤맨다. 나갈 길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도는 모습을 현재의 화자가 회상한다. 잘못 들어와 어딘가에 갇혀버린 사슴벌레,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들. '어디로든 들어왔겠죠'라는 주인의 대답 속에, 이들도 자신이 놓인 자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피투의 상태임을 은유한다.
대학 시절의 관계는 이제, 고통과 상처로 얽히며 깊은 간격을 만들었다. 좁고 어두운 터널 속 기차 안의 소음처럼, 과거에 갇힌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 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정원의 죽음과 경애의 배신은 되돌릴 수 없는 고통을 각인시키며, 이들은 트라우마 속에서 자신들만의 체념에 묻힌다.
<사슴벌레식 문답> 속 피투의 굴레는 회상하는 현재성을 넘어선다. 얽히고설킨 과거의 상처들이 현재를 조여 오고 그들은 자아를 정의할 공간을 점차 잃어간다. 반복된 고통과 한계는 사슴벌레의 문답으로, 주어진 조건을 담담히 수용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붙잡고자 한 힘마저 현실에 눌려 사라져간다.
영화 <비닐하우스>(2023)를 보자면, 여기서 피투의 메시지는 처절하게 새겨진다. 주인공 문정은 경제적 곤궁 속에서 소년원에 있는 아들을 돌봐야 한다. 그녀의 삶은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강요된 결정의 연속이다. 돌봄의 책임과 빈곤의 무게가 겹겹이 그녀를 옥죄고, 문정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과 제약 속에서 살아간다.
비닐하우스 속 문정은 한계를 껴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다. 그녀의 삶은 얇고 투명한 비닐에 둘러싸인 식물처럼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환경에 갇혀 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다. 한정된 선택지에서 자아를 붙들려는 힘겨운 투쟁을 이어간다. 문정의 삶은 피투가 인간을 구속하는 깊이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무게 속에서도 존재를 지키려는 인간의 고단한 의지를 증명한다.
권여선의 소설, 그리고 영화에서 인물들은 자신을 둘러싼 제약이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맞닥뜨린다.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주어진 현실 속에서 생존하려 애쓰지만, 피투라는 굴레는 언제나 한계로서 존재한다. 서로가 지닌 기억과 상처로 과거의 자신을 되새긴다. 이런 과정에서 피투의 고통은 점점 뚜렷해지고 고뇌하며,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지탱해나간다.
이들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악조건 속에서의 자유다. 그러나 절망과 체념의 순간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을 수용하고, 한편으로는 덤덤히 위치를 지킨다. 비닐하우스의 문정과 '사슴벌레식 문답' 속 인물들은 피투의 깊이를 체득하며, 무력한 현실에서 자신을 놓지 않는 내면적 강인함을 증명해 낸다.
피투의 굴레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를 엿보게 된다. 비록 한계와 고통이 그들을 옥죄지만, 영화와 소설은 끈질기게 살아가려는 인간의 모습이 곧 존재의 힘임을 깨닫게 한다. 엉킨 기억, 끝없는 무력. 이들은 탈출구를 잃고 묵직한 현실에 잠식되지만, 살아간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많은 선택을 허락하는 듯하다. 실상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조건과 환경 속에 던져진다. 피할 수 없는 질병과 결핍,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삶의 무게를 감내하며, 체념과 허무에서도 작은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가 아니라 제한된 삶에서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려는 작은 몸짓들이다.
영화에서 문정은 "여기서 나갈 수는 없겠지"라며 체념하고, 소설에서 준희는 "이렇게 되어버린 게 어디서부터일까"라며 얽힌 현실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부여된 현실을 온전히 수용하며, 그 안에서 자기만의 작은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리하여 체념을 강박하는 피투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 현실을 묵묵히 감내하며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이다.
피투는 던져진 존재를 인식하면서도 기투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기투는 피투를 뿌리로 삼아야 제약을 넘어설 힘을 얻고, 피투 또한 기투와 공존할 때 비로소 삶을 지탱할 수 있다. 이 둘이 함께할 때 인간은 현실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이루어 나가며 삶의 의미를 세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