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의 자체 행사 시대
CES는 오랫동안 기술 산업의 새해를 여는 의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1월이면 라스베가스에 전 세계 기업들이 모여 앞다퉈 신기술을 공개했고, 그 흐름만 살펴도 한 해의 기술 방향성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CES의 위치는 분명히 흔들리고 있다. 한국 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대기업들까지 전시 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불참을 선언하며, CES를 바라보는 시선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이는 CES 자체가 쇠퇴해서라기보다, 기술 산업의 무대가 본질적으로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빅테크의 무대 이탈: ‘공용 발표’에서 ‘생태계 독점’으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빅테크의 발표 전략이 CES라는 공용 행사에서, 자사가 설계한 전용 무대로 완전히 이동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전 세계가 한자리에 모이는 CES가 ‘공식 기술 발표의 장’ 역할을 했으나, 지금 기업들은 굳이 경쟁사와 주목도를 나눠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애플은 WWDC에서, 구글은 I/O에서, 메타는 Connect에서 자신들만의 설계된 서사를 펼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Build를 통해 개발자 생태계를 직접 붙잡고, 엔비디아는 GTC를 통해 AI 시대의 핵심 논의와 개발자를 독점하는 데 성공했다. 메시지 통제권을 스스로 확보할 수 있고, 기술을 실제로 사용하는 개발자 커뮤니티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기술 발표의 중심은 더 이상 ‘모두가 모여 함께 보는 공용 무대’가 아니다. 이제 무게 중심은 기업이 전적으로 연출 가능한, 폐쇄적이지만 영향력 높은 전용 무대로 이동했다.
기술의 성격 변화: 하드웨어 쇼에서 ‘국가 전략 플랫폼’으로
CES가 빛났던 시절은 기술이 주로 하드웨어와 기기 중심일 때였다. 새로운 TV와 스마트폰, 혁신적인 가전제품이 일제히 공개되는 장면은 CES만이 제공할 수 있는 장관이었다.
그러나 지금 기술은 제품의 범위를 넘어 플랫폼, 나아가 국가 전략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AI는 산업 전체를 재편하는 인프라가 되었고, 반도체는 국가 안보의 핵심 자원으로 격상됐다. 로봇과 모빌리티, 에너지 기술은 각국 정부의 장기 전략과 결합하며 기술의 ‘단위’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이처럼 기술이 국가적·산업적 전략과 결합하는 흐름 속에서 기업들은 당연히 메시지를 정교하게 통제할 수 있는 비공개 무대를 선호한다. 삼성전자가 CES의 메인홀을 떠나 호텔 단독관이라는 독자 무대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CES라는 대중적이고 혼합된 공간은 더 이상 정밀한 전략 메시지를 전달하기엔 구조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프리미엄 쇼케이스’의 약화: 중국 기업의 물량 공세
CES의 성격을 변화시킨 또 다른 요인은 중국 기업의 공격적 진입이다. 글로벌 세트 시장에서 중국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CES는 자연스럽게 중국 기업의 대규모 전시장을 닮아가고 있다.
센트럴홀은 이제 TCL과 하이센스가 최대 규모로 차지하며, 로봇청소기/가전 브랜드들이 물량전을 벌이듯 부스를 확장하고 있다. 한때 CES의 품격을 높이던 ‘혁신상’ 역시 범주가 지나치게 세밀하게 쪼개지면서 상징성이 옅어졌다. 한국 기업이 수백 개의 혁신상을 수상해도, 그것이 실질적으로 브랜드 파워나 기술 패권에 미치는 영향은 예전보다 훨씬 제한적이다.
결과적으로 CES는 ‘기술의 프리미엄 무대’라는 이미지를 점차 잃어가며, 오히려 ‘글로벌 소싱 및 구매 박람회’에 가까운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한국 기업의 피로도: 투자 대비 효율의 차가운 현실
한국 기업들은 오랫동안 CES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해왔다. 하지만 그만큼 피로도도 높아지고 있다. 대형 부스를 꾸미는 데 투입되는 비용과 인력은 천문학적이며, 실제로 성과가 발생하는 지점은 CES 전시장 자체가 아니라 호텔 스위트룸에서 이루어지는 비공개 미팅이나 파트너십 논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SK가 내년 CES 합동 전시관 운영을 중단하고, HD현대가 2년 연속 불참을 선택한 것은 결국 “투자 대비 비즈니스 효율이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CES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대형 쇼케이스’에서 ‘비공개 네트워킹 허브’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포스트 CES 시대, 기술 무대는 ‘분산된 네트워크’로 이동한다
CES의 위상 변화는 CES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 산업 전체의 재편을 반영한다. 기술 발표와 패권 경쟁의 중심이 CES 같은 글로벌 집합 행사에서 벗어나, 각 기업과 플랫폼, 그리고 국가가 직접 설계한 전용 무대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판이 커질수록 CES는 상대적으로 작은 무대가 된다. 하지만 CES가 사라질 일은 없다. 여전히 세계 최대의 기술 전시회이자 소비자/투자자/파트너십을 만나는 중요한 시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CES는 더 이상 “기술의 미래를 처음 공개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 역할은 이미 빅테크의 전용 무대로 이동했다.
포스트 CES 시대의 기술 생태계는 더 이상 ‘모두가 한 곳에 모이는 중앙 집중식 무대’가 아니다. 이제 기술의 중심은 각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창조하는 다중 무대, 분산된 네트워크의 형태로 펼쳐지고 있다.
신승호 컬처테크 칼럼니스트 shshin@kmjourn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