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중심의 디지털 질서가 서서히 한계에 다다르는 지금, XR은 더 이상 ‘차세대 실험 기기’가 아니다.
지난해 안드로이드 XR의 비전이 제시된 데 이어, 올해 공개된 삼성 갤럭시 XR은 새로운 플랫폼 전쟁의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번 Android Show: XR Edition에서 공개된 기능들은 XR이 어떻게 생활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AI·XR 결합이 만드는 포스트-스마트폰 시대의 실루엣이 드디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PC를 넘은 ‘공간 컴퓨팅’ 작업 환경: PC Connect의 진화
가장 큰 변화는 단연 PC Connect다. 윈도우 PC 화면을 XR 안으로 그대로 불러오고, 옆에는 구글 플레이의 네이티브 앱을 배치한다. 더 이상 모니터 크기나 해상도가 작업 효율을 결정하지 않는다. 공간 전체가 무한한 데스크톱이 되는 경험이 구현된 것이다.
대학생은 리포트 문서 옆에 강의 영상을 띄워 학습 흐름을 이어갈 수 있고, 게이머는 PC 게임을 XR로 스트리밍하면서 Gemini에게 실시간 공략을 물어볼 수 있다. “스크린은 기기가 정한다”는 30년 가까운 관성이 XR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
이동 중에도 ‘정상 작동하는 XR’: Travel Mode의 의미
XR의 일상성은 집·사무실을 벗어나 이동 환경에서도 확장되고 있다. Travel Mode는 비행기처럼 흔들리고 좁은 공간에서도 화면이 사용자 시선 기준으로 안정적으로 고정되도록 돕는다.
이 기능 하나는 XR이 ‘특정 공간에서만 쓰는 기기’라는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기내 영화 감상, 출장 중 문서 검토, 고정된 디스플레이가 없는 이동 환경에서의 콘텐츠 소비 등 모바일 라이프스타일 중심 디바이스로의 변신이 본격화되고 있다.
‘나를 닮은 디지털 휴먼’이 주는 존재감: Likeness
이번 발표에서 가장 상징적인 기능은 Likeness다. 사용자가 회의에 참석하면, 나를 닮은 디지털 휴먼이 표정·입 모양·손동작을 실시간 반영하며 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아바타가 아니다. 현실의 나와 가상 공간의 존재감을 연결하는 새로운 인터페이스다. 원격 근무에서는 거리감을 줄이고, 원격 교육에서는 참여도를 높이며, 가상 이벤트에서는 실재성의 경험을 강화한다. XR은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를 확장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다중 디바이스 시대: 안경·헤드셋·유선 글래스의 공존 전략
구글은 XR을 하나의 기기 형태로 제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헤드셋·안경·유선 글래스가 역할을 나누어 공존하는 다중 디바이스 생태계를 지향한다.
AI 글래스: ‘화면 없는 스마트폰’ 시대의 전조
Gentle Monster, Warby Parker와 함께 개발 중인 AI 글래스는 그 핵심이다. 스크린 없이 Gemini와 대화하며 정보를 받고, 필요하면 시야 한쪽에 번역이나 길안내 같은 조용하고 자연스러운 정보 층을 띄운다. 스마트폰을 꺼내는 행위가 점차 사라지는 생활형 인공지능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유선 XR 글래스: 데스크톱을 대체할 새로운 작업 환경
XREAL의 프로젝트 오라(Project Aura)는 헤드셋과 안경 사이의 새로운 중간지대다. 현실을 그대로 보면서 그 위에 70도 시야각의 AR 콘텐츠를 덧씌운다.
요리를 하면서 레시피 영상을 함께 보고, 고장 난 가전에 단계별 AR 안내를 띄우는 등, 모니터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개인형 오피스 경험을 구현한다. 개인 컴퓨터의 다음 형태가 무엇인지 XR 글래스가 첫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
개발자 생태계의 본격 개방: XR SDK 프리뷰 3
새로운 플랫폼은 도구 없이는 확장될 수 없다. Android XR SDK 프리뷰 3 공개는 XR·AI 복합 경험을 만들기 위한 개발 인프라를 전면적으로 개방했다는 의미다. 특히 AI 글래스용 API가 공개되면서 Uber, GetYourGuide 등 글로벌 서비스들이 현실 세계 기반의 공간 경험을 XR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지도, 내비게이션, 여행, 로컬 정보, 음식점 추천, 쇼핑 등의 일상형 앱들이 XR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동작하는 변화가 본격화될 것이다.
스마트폰 이후의 질문은 바뀌었다
지금까지 우리의 질문은 “XR을 어디에 쓸 것인가?”였다. 이제는 훨씬 근본적으로 변한다.
“AI와 XR이 결합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인가?”
삼성과 구글이 협력하는 안드로이드 XR 생태계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빠른 실험장이 되고 있다. 디바이스는 등장했고, 생태계는 열리고 있으며, 개발자들은 무대를 준비 중이다. 스마트폰 이후 시대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결정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