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결과 문학의 뼈대 사이에 깃든 득량의 여운, 보성 여행
3월 14일, 봇재를 넘었다. 보성읍에서 회천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그 옛날 보부상들이 무거운 봇짐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던 곳이라 하여 봇재다. 주변은 차밭이다. 간간이 바람만 지날 뿐 고요했다. 다음 달 중순 지나 곡우 전후가 되면 굽이굽이 연초록 싱그러움이 곱게 융단처럼 펼쳐지고, 찻잎을 따는 아낙들의 손길로 분주해질 터이다.
고개를 내려서니 삼거리길. 곧장 나아가면 율포해수욕장. 우회전하여 차 한 모금 마실 정도 되었을까. 야트막한 산 아래 기와집 몇 채가 보인다. 판소리 성지다. 좌측으로 방금 넘어온 봇재가 하늘처럼 높아 보이고, 우측으로는 득량만의 바다가 옅은 안개처럼 비친다. 앞 들녘에는 감자를 심은 멀칭 비닐이 다른 모습의 차밭처럼 펼쳐져 있다.
성지라는 무거운 이름에 비해 시설은 단출했다. 득음문을 들어서니 보성군립국악단이 사용하는 건물과 박유전 선생의 기념비가 맞이할 뿐, 낯선 방문객의 발소리에 놀랐는지 개만 짖어댔다. 전시관은 문이 닫혀 있다. 정응민 생가라고 다르지 않았다. 적막한 성지가 아쉬워 정응민이 득음을 했다는 득음정을 찾아 나섰다. 뒷산 깊은 골짜기 폭포 앞이라 했다. 그곳도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지난해 수해를 입어 공사 중이니 들어갈 수 없다는 안내판 앞에서 돌아 나왔다.
선친께서 좋아하셨던 보성소리다. 강산제라고도 하는데, 서편제의 애절함에 동편제의 웅장함을 더했다. 그 비조(鼻祖)가 박유전이다. 출생지는 순창이나 이곳 강산마을에서 자라고 명성을 얻었다 하여 강산제라고도 하고, 흥선대원군이 그의 소리를 듣고 “네가 바로 천하 제일강산(天下 第一江山)이다”라고 극찬한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정응민이 꽃피우고, 조상현‧성창순 등 당대 최고의 명창들이 그 맥을 이었다.
성창순 국창 추모비 앞에서, 문득 소리에 맞추어 무릎장단을 치시던 선친이 그리웠다. 박유전은 말년이 빈곤했고, 그 무덤조차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성지를 나오는 발걸음에 득음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소리꾼들이 쏟아냈을 땀과 눈물이 무겁게 얹혔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상설 공연이 있다는 펼침막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차나무에 새순이 피어나면 이곳을 찾는 이가 늘어날까. 그랬으면.
성지를 나와 바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득량만이다. 고흥반도와 보성 해안이 감싸안은 바다는 호수처럼 평온했다. 우측으로 바다를 두고 득량면으로 향했다. 길 따라 멀칭 비닐이 이어졌다. 군데군데 마늘밭과 쪽파밭이 여정에 양념처럼 맛을 더했다. 율포해수욕장 솔숲이 지나고 공룡알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해변이 물러서고 낚시공원이 스친다.
득량역에 들어서니 시간이 뒷걸음질 친다. 하루 일곱 번 주말엔 여덟 차례, 통일호 기차가 서는 간이역이다. 역 앞은 추억의 거리다. 득량, 얻을 득(得)에 양식 량(粮).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군량을 조달하였다 하여 얻은 지명이다. 이런 연유로 장군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간판과 벽화들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역사에 거리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적막했다. 역 마당엔 개인택시 한 대가 오지 않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간판도 건물도 낡았다. 지나는 이도 없다. 진짜 추억의 거리다. 역전슈퍼에서 식당을 물으니 백여 미터 거리에 있는 농협 앞 송죽식당으로 가라고 한다. 한 상에 9천 원 하는 백반을 먹었다. 넉넉한 고향 밥상 같았다. 좋았다. 나 홀로 주방과 홀을 지키는 할머니 모습이 거리처럼 쓸쓸해 보였다.
문을 연 가게가 세 곳, 남은 하나를 지나치면 섭섭할 것 같아 행운다방 문을 열었다.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이다. 1977년 문을 열어, 최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는데, 노래도 박제가 된 듯 ‘봄날은 간다’가 추억처럼 흘렀다. 테이블 위 재떨이 겸용으로 쓰이던 행운을 점치는 뽑기가 옛 추억으로 이끌었다. 주인도 손님도 모두 옛날처럼 늙었다. 젊은 날 사랑을 속삭이던 낭만의 장소로, 기차를 기다리는 떠남의 장소로 찾았을 공간이, 하얀 머리가 되어 사랑방이 된 듯했다.
쌍화차를 주문했다. 통들깨, 대추, 견과류 사이로 우아하게 뜬 선명한 달걀노른자. 견과류를 먼저 건져 먹고 노른자를 터뜨리라는 주인장의 설명 속엔 50년 세월이 담겨 있었다. 쌍화차 한 잔에 여유와 추억이 달콤하게 녹아들었다. 옛것이 건네는 즐거움이었다.
다방에서 듣기로, 뜻밖의 인물이 득량의 너른 품과 인연을 맺었다. 멀지 않은 쇠실마을에 백범 김구 선생 은거 기념관이 있었다. 밖에서 잘 보이지 않고 들어가는 길도 휘어지고 좁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항아리처럼 오목한 동네였다. 아늑했다. 숨어 살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을 성싶었다.
백범이 일본군 중위 살해죄로 체포돼 사형이 확정됐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됐다. 인천 감옥에서 탈옥하여 유랑하던 중 친족인 안동김씨 집성촌을 소개받고 김광언 집에서 50여 일간 은신하였다. 머물며 주민에게 시대상과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후 문풍(文風)이 일어 많은 인재가 나왔다고 한다. 해방 후 숨겨준 고마움을 잊지 않고 다시 찾았으나 김광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어 찾은 강골마을. 너른 들판을 내려보는 나지막한 산 아래 자리 잡았다. 돌담과 골목길에서 세월이 느껴졌다. 마을 중앙을 이진래 가옥이 차지했다. 조선 헌종 때 상량을 올렸다 한다. 양옆으로 이진회와 이정래 가옥이 담을 붙이고 있다. 모두 대문이 굳게 닫혔다.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집구경이다. 그 지역의 인문과 지리와 문화를 가늠할 수 있어서다. 유럽 도시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성당도, 한양 도성 구경에서 궁궐도, 비싼 값을 내고 찾는 멋진 카페도, 따지고 보면 다 집구경이다. 닫힌 문 앞에서 지붕만 보고 돌아서는 마음이 카페인 없는 커피를 마시는 심정이랄까.
아쉬움을 열화정(悅話亭)에서 달랬다. 이진래의 고조인 이진만(李鎭晩)이 세운 정자다. 마을 뒤쪽 경사지에 계단과 기단을 높게 쌓고, ㄱ자 형태로 누마루를 갖추었다. 사랑채 같다. 앞과 좌측은 언덕이 가로막았고, 우측은 마을 사이로 좁게 시야가 트였다. 시야가 트인 쪽은 담장을 낮게 둘러 시선을 멀리 이끌었고, 막힌 쪽은 담장 없이 연못을 두어, 앞쪽 언덕을 마당으로 끌어들인 듯한 효과를 내어 답답함을 없앴다. 설계자의 안목에 감탄이 절로 났다.
경관이 좋아야만 정자 터는 아니라는 듯, 평범하게 여겨질 수 있는 자리에서도 멋진 건물을 앉힐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정래 가옥의 설계자이기도 한 이진만, 이런 안목을 가진 분은 집을 어떻게 꾸몄을까. 그래서 닫힌 대문이 더욱 아쉬웠다.
여정의 종착지는 벌교읍이다. 득량에서 뜻하지 않게 쌍화차에 홀려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해가 서산마루에 가까웠다. 벌교읍 초입 작은 공원에 이 고을이 낳은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다. 대종교의 나철, 작곡가 채동선, 그리고 머슴살이(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은 안 의병장에서 나왔다. 장터에서 일본 헌병이 조선인에게 횡포를 부리는 걸 보고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몇 대 쳤더니 쭉 뻗어버리더란다. 그의 기개를 상징한 듯 불끈 주먹을 쥔 동상이 강렬했다.
곧바로 향한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건축가 김원이 소설이 땅속에 묻혔던 진실을 길어 올렸듯 산자락을 파내어 세웠다. 1만 6,500장의 육필 원고가 압도적이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필사했다는 원고지 더미는 경외심마저 일었다. 작가의 손때 묻은 취재 수첩과 카메라를 보며, 문학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 이바지해야 하는지 새삼 되새긴다.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답사에 나섰다. 문학관 바로 앞에는 현 부자네 집과 무당 소화네 집이 있다. 중도방죽과 철다리와 김범우집과 홍교를 지나 ‘태백산맥 문학 거리’ 앞에 차를 세웠다. 거리는 현대와 과거가 공존했다. 술도가와 보성여관과 금융조합 등 소설 속 공간이 펼쳐졌다.
거리의 끝에서 만난 조정래 얼굴 조각상. 음각으로 조각된 모습이 양각으로 보이며, 움직이는 듯도 했다. 이용덕이 창안한 역상(逆像) 조각 기법이란다. 그 요술 같은 모습에 가까이 또는 멀리, 좌로 또는 우로 오가며 마법에 빠져들었다.
땅거미가 내리는 벌교천, 소화다리(부용교) 위에 섰다. 건립 당시 일본 국왕 연호를 딴 이름이다. 여순사건의 회오리로부터 시작해 6‧25 대격랑의 아픔을 간직한 다리다. 양쪽에서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 위에서 숱한 총살형이 이루어졌다. 이를 조정래는, 소화다리 아래 갯물 갯바닥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는 문장으로 묘사했다.
건너편 다리에 걸린 “나, 벌교 살아요!”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묘하게 자부심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벌교 사람이 들으면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읽혔다. “나, 보성 살아요!” 어쩌면 저 한마디가 벌교를 아니 보성을 잘 표현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고, 다리 아래서 바다오리들이 갯바닥을 뒤지며 저녁 만찬을 즐긴다. 하나둘 불빛이 켜지는 다리 위에서 오랫동안 바다오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 어쩌면 이런 게 여행일지도 몰라.
- <화순매일신문>과 <오마이뉴스>에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