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기능, 관계

by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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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말은,

사람이 언제나 바르고 완벽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의 핵심은 성취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있습니다.

무엇을 잘하느냐, 얼마나 유능하냐, 얼마나 도덕적으로 살았느냐로 사람의 값어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보다 더 앞에 있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상태라기보다 정체성에 가깝습니다.

무언가를 잘 해내야 얻는 것도 아니고, 실수하거나 넘어졌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할 때

존재, 기능, 관계라는 세 가지 관점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존재가 먼저이고, 기능은 그 다음이며, 관계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존재가 왜곡되지 않도록 드러나고 회복되는 자리입니다.


먼저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점에서 이미 형상입니다.

이 형상은 삶이 흔들리고, 인생이 무너졌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이 죄인에게도 회개를 요청하면서 동시에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다음은 기능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돌보고 책임지는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능은 언제든 흔들리고, 실패하고, 왜곡됩니다. 기능을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지금 그 역할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일 뿐입니다.


그리고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날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성경에서 인간은 홀로 존재하도록 지음받지 않았고, 서로를 향해 책임지고 응답하도록 부름받은 존재로 묘사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간 존재의 근원이라면, 사람과의 관계는 그 형상이 세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릴 때 사람과의 관계도 함께 어그러지기 쉽습니다.


관계가 깨질 때,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증명하려 애씁니다.

그 때 이런 질문을 품게 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할까."


신학적으로 보면, 그 질문 자체가 이미 기준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형상이 완전히 사라진 존재라면 그런 물음을 품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은 자기 부정이라기보다, 관계 속에서 길을 잃고 있다는 정직한 인식에 가깝습니다.


이 구조는 머리로 이해할 때보다 아이를 키우며 훨씬 분명하게 다가옵니다.


아이는 그저 사랑스럽습니다.

그저 무사히 거기에만 있어 주어도

그 자체로 감사한 존재입니다.


기능을 잘 수행하지 않아도 예쁩니다.

아무것도 해내지 않아도, 아직 어떤 역할도 맡지 못해도, 그냥 제 아이이기 때문에 사랑스럽습니다.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잘 웃고, 잘 자고, 제 품에 안겨 있는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물론 바람은 있습니다.

부모 말도 잘 듣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덜 상처받고, 자기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건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그래야 사랑받는다는 기준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는 존재이기에 품게 되는 바람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로 힘들어하면 결국 부모가 개입합니다.

작게는 옷을 입는 문제부터, 크게는 관계의 환경을 조정하는 선택까지. 아이를 고치기보다, 아이를 둘러싼 조건과 관계를 살피려 합니다.


신학은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고,

그 형상은 훼손되었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고.

그 형상의 온전한 모습은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기능으로만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를 회복시키며

다시 살게 하십니다.


아이를 보며 그 말이 이해됩니다.


관계를 서툴게 맺을 때도,

자기 조절이 잘되지 않을 때도,

그래서 실수하고 넘어질 때도,

그래도 저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능이 미숙하다고 해서

사랑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그저 "내 아이니까"라는 이유 하나로 품습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이렇게 보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ㄷㅂ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졌다고 느낄 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 실패한다고 느낄 때,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답지 못하다고 판단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내 자녀"라는 이유로

우리를 관계 안으로 다시 부르고 계시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육아는 저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제가 아이에게 보여 주는 인내와 기다림, 보호와 개입이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닮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방향을 어렴풋이 이해하게는 만듭니다.


존재가 먼저이고, 기능은 그 다음이며,

관계는 그 존재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식이라는 것.


이 단순한 구조를 저는 아이를 품에 안고서야 비로소 몸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저 자신을 바라보는 눈도 조금씩 바꾸어 놓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내지 못해도, 지금 제 기능이 멈춘 것처럼 느껴져도,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존재라는 자리로 돌아오게 합니다.


육아는 아이를 키우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을 함께 다시 배우는 시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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