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낙인, 나쁜 낙인, 피해자를 괴롭히는 낙인
스티그마 효과에 대해 알고 있는가. 과거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행위, 모습으로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면 그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속되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낙인이라는 키워드는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과 같은 미디어매체에서 거론되지는 않아도 하나의 클리셰처럼 사용되는 요소다. 한 아이의 행실과 평판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고, 그 아이가 사회구성원으로 함께하지 못하고 겉돌게 되다가, 실제로는 나쁜 아이가 아니었음에도 탈선을 하게 되는 이야기, 혹은 탈선을 하려는 순간에 다른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금 사회구성원이 되는 이야기.
그렇다면 나쁜 낙인만 존재하는가. 착한 낙인은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 착한 낙인이라고 표현하니까 말이 조금 이상해져서 단어를 풀어보겠다. 집단을 옹호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묶은 좋은 말이 오히려 거북한 시선을 만들거나, 집단 내부에서도 그 표현을 거부하는 경우가 생기지는 않는가.
생각해보면 나는 어린 시절에 ‘A와 같이 노는 학생들은 전부 착해.’라는 말을 듣는 걸 정말 싫어했다. 나는 지나가는 학생들을 속여보자고 복도 중앙에 돈이랑 유사하게 생긴 상품권을 뿌려놓고 구석에 숨어서 구경을 하던 아이들이었고 학교 뒤뜰에 있는 벌집에 신발주머니를 던지는 학생이었는데. 학원을 몰래 빠져나와 PC방에 가던 아이였고, 새벽에 기숙사 담벼락을 타고 나와 당구 치러 가던 학생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싫어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착한 무리의 착한 학생’이라는 꼬리표는 끊임없이 따라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이야기한다. 개처럼 살고 개처럼 행동한다고, 입이 꽤 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 말조심하는 편이라고. 나는 내게 찍힌 좋은(사실은 좋아 보이는) 낙인을 부정하기 위해 오히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과연 모두가 그럴 수 있을까.
이태원에는 뿌리 깊은 낙인이 박혀있다. 문란한 이들이 모이는 장소, 질 나쁜 외국인들이나 모이는 장소, 마약의 근원지, 한국 에이즈 발원지. 사실 이는 이태원이라는 지역의 문화 특성을 나쁘게 재해석한 이야기다. 이태원은 서울시 관광특구 1호였다. 다양한 외국인들이 모일 수 있도록 국가단위로 유도를 했던 관광지였고, 실제로 이를 기반으로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발전했다. 다양한 이들이 모이는 만큼 밤문화도 발전했고 클럽, 술, 음식 문화와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같이 섞이면서 다문화 사회, 성소수자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문제는 이에 대한 국가 단위, 언론 단위의 낙인이었다. 2010년대 후반 이후로 heterosexism(이성애적 차별주의)이 심화되는데 국가, 언론이 박차를 가했다는 이야기다. 한국 에이즈 문제의 중심지는 이태원이며 성소수자들이 이태원에 모이게 되면서 사회에 문제가 될법한 물건들을 가져오고 범죄를 조장한다. 개신교 기반의 단체는 이런 불분명한 통계자료를 기반으로 기사를 꾸준히 올리며 지역을 압박했고, 결과적으로 202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태원에 가서 논다는 사실 자체를 타인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사회가 되었다.
내가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태원을 향한 사회의 시선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 지리멸렬하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도 이와 접점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의 장애, 차별부터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 피해자들의 이야기라는 진주를 ‘낙인’이라는 실로 꿰어내고 공감이 아닌 대답을 찾는 응답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공감이 아닌 응답으로 대화를 이어간다는 방식은 근래에 보이는 고통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는 책 치고는 특별한 전개 방식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책에서는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대전제를 세우며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을 공감한다는 말은 이제 인터넷 냉소주의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비판받는 표현이 되었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 고통을 안다고 감히 네가 고통을 아는 체하냐. 이제는 모두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학자로서 이성으로 접근한다. 고통 받는 이들과 고통 주는 사회 문화, 그리고 미래를 향한 고민.
세월호 사건 당시 자신을 ‘인터넷 냉소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학생들에게 던진 돌이 무엇인지 기억하는가? ‘그 학생들은 놀러가다 사고가 나서 죽은 건데 어째서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지원해줘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형태를 한 돌이었다.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이런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는 물론이고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도 큰 지탄을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인륜적으로 아이들에게 던질 말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지났고 피해자의 집단이 바뀌었다. 이태원에서 참사가 발생했을 때 이번에는 많은 이들이, 과거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지탄하던 사람들까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인터넷 냉소주의가 2010년도 중반에 비해 크게 심화된 점도 있었고 사회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서는 과거부터 뿌리 깊게 박힌 낙인이 있었다.
이태원에 놀러간 이들은 문란한 이들, 인터넷문화를 대표하는 베타메일과는 다른 알파메일들,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성소수자들과 다문화 가정들, 모든 혐오가 과거부터 쌓여온 낙인의 한 획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돌은 많았다. 그들을 향한 추모탑이 세워질 때 옆에 혐오로 돌탑을 세워도 될 만큼 많았다. 그리고 이런 혐오를 막기 위해 무분별하게 던져진 긍정의 키워드는 그들의 투석 행위를 가속시켰다. ‘그들은 문란하지 않고 문화를 즐기는 착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이었다.’ 이 착한 낙인을 찍으려는 시도는 사건 당시 구급차 인근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이들의 영상과 더불어 큰 파급력을 일으켰고 인터넷 냉소주의자들은 피해자를, 더 나아가 잠재적 피해자를 모두 비웃었다. 놀러가서 죽은 게 뭐가 자랑이냐고, 이제는 놀러가서 죽어놓고, 사건이 난 이후 다른 곳에서 춤추다가 집에 가놓고서는 보상금까지 타려고 하냐고.
국가, 언론이 찍은 나쁜 낙인과 피해자들을 옹호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고통에 잘못 공감한 –혹은 척한- 이들의 착한 낙인 덕분에 피해자들은 입을 열기를 포기했다. 수년간 반복해서 찍어온 이 깊은 낙인을 피해자 한 명의 입으로는 지워낼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이 낙인을 지울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이 낙인을 계속 찍고 있을까. 선한 낙인과 나쁜 낙인은 구별할 수 있는 것일까. 잠재적 피해자, 2차, 3차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사회로 나올 수 있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확실한 것은 지금은 저자의 방식이 가장 정답에 가깝다는 점이다. 고통을 향한 공감이 아닌 응답으로.
올해 초, 오랜만에 중학교 시절 후배를 만났다. 성년이 된 이후로 쭉 군 생활을 했다보니 얼굴을 자주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전역하면서 다시 경기도로 오게 되었으니 예전처럼 자주 보고 지내자는 의미에서의 연락이었다. 오랜만에 본 후배는 예전보다 조금 어두운 얼굴이었다. 조금의 고민이 있고, 조금의 압박감이 있고, 조금의 불안함이 있는 그런 얼굴. 그 후로 우리는 두어 번 더 커피를 마시며 회포를 풀었고, 후배는 긴 고민 끝에 내게 커밍아웃했다. 그때 나는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반응했고(그렇게 했다고 믿고 싶다), 이 몇 번 내가 먼저 연락했으니 다음에는 언제든 네 쪽에서 먼저 연락하라는 말을 꺼냈다. 상관없으니 다음에 또 놀자고.
이후로 후배를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누나와 다시 연락하고 친밀한 관계가 되면서 그를 향한 집안의 분위기를 어렴풋하게 느끼고는 있다. 나와 연락을 한 이후에 집을 나가 자취하고 있다던가, 집안에서 붕 떠버린 위치에 있다던가.
나는 아직도 그가 내게 연락을 먼저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저녁 커피나 한잔 하자고 부르기를 바라고 있다. 안타깝지만 내가 그를 기다려도 사회는 그를 기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회가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그들을 향한 시선도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으니까.
참사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어떤 사회가 만들어져야 할까.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장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일단 내 후배를 위한 시선이 둥글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 후배를 위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다문화 가정을 위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축제 문화에 대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둥글어지고….
이태원 참사 관련 캠페인에서 작성했던 첫 서평이었다. 이전에 캠페인에 앞서서 적었던 일상적인 글도 있었는데 그 글 없이 서평을 따로 떼어놔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평을 하나씩 올려놓으려고 한다.
캠페인 활동을 할 때 이태원에 취재삼아 방문하기도 했었고, 다양한 책을 읽기도 했으며, 마지막에 이야기한 후배에게 우연히 연락을 받아 같이 저녁에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어찌보자면 내 세계가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내가 이런 사회과학적인 이야기를 적는 쪽으로 가까워지는 길이 열린 거 같다고 해야하나.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생각보다 내 삶에 영향을 적지 않게 준 거 같다.
이 글을 쓸때 가장 주의했던 점은 용어의 정리였다. 국내에서 호모포비아라고 표현되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한 학술적인 용어가 heterosexism인데 호모포비아라는 표현이 비하적인 의미가 담겼다는 이야기를 기억해서 이 표현을 어떻게 바꿔볼까 한참을 고민하면서 찾아봤던 거 같다. 사실 우리가 쉽게 쓰는 단어들에도 의식적인, 무의식적인 비하의 표현이 섞여있다. 이 단어를 정제하고 고르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이 해야하는 가장 최소한의 노력이 아닌가, 늘 생각해왔는데 이번에 다시금 몸으로 겪게 되었다.
이 캠페인에서 준비한 3편의 서평에 대한 컨셉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피해자' - '피해자의 목소리를 삼키는 가해자와 인터넷 냉소주의' - '이런 분위기를 부추기는 언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첫 책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다음 책은 『인싸를 죽여라』, 마지막 책은 과거에 한번 서평을 적었던 『고통 구경하는 사회』로 선택하면서 부수적으로 『저널리즘 선언』이라는 책의 내용을 더해봤다.
다음 서평에서 또 이 서평에 대한 개인적인 후기를 적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