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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Sep 14. 2021

아빠의 첫 차, 엘란트라

자동차 이름을 잘 몰랐다.

부끄럽지만 동그라미 네 개가 겹쳐져 있는 마크와 동그라미 안에 찌그러진 세모가 새겨져 있는 마크의 차가 그렇게 비싼 차인 줄도 모르고 살았더랬다. 물론 지금은 알고 있다. 신랑이 자동차 회사에 다니면서 신랑네 회사에서 만든 차가 아닌 다른 브랜드의 차가 무엇인지 관심이 생긴 후부터다. 신랑이 자동차 회사에 다니지 않았다면 언제 깨우쳤을지 모를 일이다. 지금도 브랜드 이름은 알고 있지만, 차종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자가용을 바꿀 때 신랑은 나를 데리고 대리점으로 가서 “ 이 차 멋지지?” “이걸로 할까?”라고 열심히 내 의견을 모으려 애쓰지만 나는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고, 차이점조차 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나에게도 잊히지 않는 차 이름이 하나 있다. 바로 ‘엘란트라’  나의 어릴 적, 우리 가족의 첫 차였다.



1990년대 엘란트라

당시 내가 살던 동네에서 군청이 있는 시내까지 나가려면 주로 버스를 이용했다. 내가 어릴 적에는 그곳까지 가는 길이 비포장도로에다 산을 깎아 만든 도로여서 고불고불 고부랑 길을 스를 타고 덜컹 거리며 가야 했다. 그래도 우리 삼 남매는 엄마와 한 달에 한 번씩 나가는 시내 나들이가 참 좋았다.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나가서 들르는  첫 코스는  목욕탕이었다. 막둥이 남동생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당연히 여탕으로 함께 들어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 셋은 서로 눈치 게임을 시작했다. 그 누구도 첫 타자로 엄마의 손에 맡겨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첫 희생 제물로 신탁 위에 올라갈 수 없었다.


초록색 이태리타월을 양손에 낀 엄마는 전문 세신사보다 더 강력한 포스로 우리 몸의 때를 한 꺼풀씩 거침없이 벗겨 나갔다. 당연히 시간이 갈수록 엄마의 손아귀 힘은 빠졌고, 우리는 그 타이밍을 노려 가장 마지막 순서에 때를 밀고 싶어 했다. 결국, 정정당당한 가위바위보로 결론이 나곤 했지만, 그전까지 우리는 서로를 설득하고 협박하면서 처음 순서는 절대 안 하겠노라고 우기곤 했다. 때를 미는 순간만 잠깐 눈감았다가 버티면 이후로는 신나는 일만 기다리고 있었다.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가면서 물살을 가르며 수영을 하면서 놀았는데 그 당시에 어른들은 우리의 방정맞은 놀이를 눈감아주곤 하셨다.


목욕탕을 나오면 엄마는 서울우유 초코맛을 사주다. 보송보송 매끈한 피부를  만져보며 초코우유를 들이켜는 개운함은 이 전의 떼밀었던 악몽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즉시 사라지게 만들어줬다.  목욕탕을 나와서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경양식 돈가스 집으로  갔다. 집에서도 엄마가 종종 돈가스를 손수 만들어서 튀겨주곤 했지만, 그곳은 분위기와 멋 돈가스와 함께 먹을 수 있었다.  가게 이름도 시골에서 홀로 튀었던 독일 도시 이름인 ‘슈바벤’이었다.  수프와 갓 구워 나온 빵, 샐러드, 그리고  탐스런 캐러멜색 소스가 듬뿍 얹어져 있는 돈가스까지 코스로 먹고 나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들로 둔갑해 있었다. 그런데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매연을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고, 또 덜컹거리는 고부랑 길을 달리는 버스 안에 앉아서 오는 동안 보송했던 몸이 다시 구정물로 뒤덮인 듯했다.



그랬기에 우리 가족의 이동 수단이 버스에서 자동차로 바뀌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빠는 생애 첫차를 사기 전에 시골집 대문을 수리했다. 당시 좁은 대문으로는 차가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대문을 넓히고 집 안에 헛간처럼 버려져 있던 공간을 개조해서 주차장으로 바꿨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아빠는 자동차를 끌고 집으로 오셨다. 은빛 색깔 엘란트라였다. 아빠는 ‘엘란트라’라는 자동차 이름을 수십 번 반복해서 말해줬다. 나는 그 이름을 홀로 되뇌면서 내 생에 들어본 가장 근사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 엘란트라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 일은 더더욱 근사했다. 시내로 나가는 비포장 꼬부랑길이  포장 도로로 바뀌는 매직은 없었지만, 버스와 자동차의 승차감은 비행기와 스쿠터 급 차이로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는 시내에서 목욕하고 근사한 코스 요리를 먹고, 이제는 아빠가 직접 운전하는 자동차에 올라탄 채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외출의 피날레를 완벽하게 해주는 그 엘란트라가 참 좋았다.



깎아지른듯한 가파른 시골길을 굽이굽이 운전하기는 쉽지 않다. 남매 셋이 뒷좌석이 꽉 차게 앉아서 창밖을 보면 그 아래로 낭떠러지 같은 길에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며 심장이 바싹 졸리기도 했다.  그러나 총각 때 오토바이 운전을 했다는 아빠는 거침없 폭주족마냥 운전하셨다. 몇 번 그 롤러코스터 길을 오 가면서도  우리는 안방에 누워 자듯 편안하게 뒷좌석에서 꿈나라로 곯아떨어지곤 했다.



서울로 이사를 해서 잠깐은 아빠는 계속 차를 가지고 계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빠는 좀처럼  서울에서는 운전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24시간 열어야 하는 점포들을 운영하면서 주말의 개념이 모호해진 것도 있었지만 겨우 가족이 시간이 맞아서 근교에라도 놀가려고 해도 아빠는 운전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서울 길은 8차선 직선 대로로 시골길과 다르게 굽이굽이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직선으로 쫙  이어진 대로를 거침없이 가로질러 속도를 높여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서울 도로에는 수없이 많은 차와 버스, 택시, 트럭들이 제각기 더 빨리 달리려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아빠의 인생을 위협하는 그 실체가 마치 도로의 자동차라는 되는 것처럼 아빠는 서울에서 운전을 거부했다.


딱 한 번, 아빠가 차를 처분하기 전에 나를 태우고 장거리 운전을 다녀온 적이 있다. 고3 수험 생활을 마치고 대학 입시 원서를 쓸 때였다. 원 없이 최선을 다했노라 고백할 수 없던 수험 기간이었다. 아빠가 우울증잠식당해 계속 삶의 의지를 상실한 채, 겨우 편의점을 지키는 시간 이외에는 계속 누워만 계시던 시기였다. 더욱더 모질게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리 독한 애는 되지 못했다. 수능을 보고 당연한 순서로 1지망부터 3지망까지 대학을 지원했다. 그중 한 학교가 지방에 있는 교대였다. 점수와 상관없이 무조건 면접을 봐야 하는 전형이었다. 그전부터  서울에서 아빠가 운전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기에 가능하면 혼자 버스를 타고 내려가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면접 시간이 가장 이른 시간에 잡혔고, 학교는 터미널에서도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다. 결국 아빠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탔다.




그날따라 새벽안개가 짙었던가. 가시거리가 환하지 않았다. 아빠가 고속도로 톨게이트까지 가는 동안 난 계속 아침잠을 보충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떴는데 어느새 차는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차 옆으로 덤프트럭 두 대가 마치 우리를 호위하듯 함께 달리고 있었다. 앞에서 운전하는 아빠는 등을 의자 붙이지 못한 채, 핸들을 두 손으로 꽉 부여잡고 잔뜩 긴장한 것이  뒷모습에서도 여실히 느껴졌다. 액셀을 확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가도 또 주저하고 속도를 줄이는 것이 반복됐다. 참으로 답답하고 불안한 형국이었다. 도무지 앞으로도 옆으로도 빠지지 못하고 두 트럭에 끼인 채로 한참을 달렸다. 그때 그 위협감과 공포가 아빠를 뒤엎고 그 뒤에 앉아 있는 나까지 내내 긴장하게 했다. 결국, 무사히 대학교까지 도착했다. 주차를 마치고 그제야 아빠는 등을 의자에 기댄 채로 나지막하게 “휴”하고 긴 한숨을 쉬셨다.




고향의 꼬부랑 길과 서울의 8차선 도로. 그 차이가 얼마나 컸길래 아빠는 그렇게도 어깨가 자꾸자꾸 움츠러들기만 했던 걸까. 그 뒤로 결국 아빠는 차를 처분하셨다. 골리앗처럼 느껴졌던 서울살이에서 아빠는 그 왜소한 몸에 유일하게 지니고 다녔던 무기인 물맷돌마저 버린 꼴이었다. 그는 그렇게 싸울 의지를 상실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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