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꽂힌 곳
영화 〈파워 오브 도그〉 리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의 결말 혹은 반전을 예상할 수 있었다. 폭압적인 과잉 남성성에는 거의 언제나 숨겨진 비밀이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이 영화는 관객과 두뇌 싸움을 하려 드는 영화가 아니기에 결말을 짐작하든 말든 영화를 감상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파워 오브 도그〉는 예정된 결말을 향한 과정의 디테일이 압권인 영화다.
1925년 미국 몬태나. 마초적인 목장주 필 버뱅크는 남동생 조지가 결혼한 여성 로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로즈가 데려온 아들 피터는 더더욱 그렇다. 그가 로즈를 꽃뱀으로, ‘여성스러운’ 피터는 자기 집안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로즈는 필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짓눌려 점점 술에 빠져 망가져간다. 조지는 로즈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필의 분노는 더더욱 커지는 악순환만 반복된다.
반전은 피터가 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부터 서서히 전개된다. 필은 자신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쳤던 근육질의 남성 브롱코 헨리의 안장과 그의 사진이 실린 잡지를 무척 소중히 간직한다. 또한, 다른 카우보이들과 함께 목욕하지 않으며 늘 혼자 씻는다. 폭압적으로 군림하려 드는 필이 게이였음을 알아챈 피터는 필에게 조심스레 접근한다. 자신의 여성스러움과 필의 비밀이 둘 사이의 연결점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필 버뱅크와 그의 동생 조지 버뱅크필은 피터와 가까워지며 두 가지 기쁨을 얻는다. 첫째는 로즈의 철저한 고립에서 오는 기쁨이다. 피터가 필과 가까워지는 걸 본 로즈는 더 빠르게 무너진다. 자기 아들마저 필과 어울린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필은 피터와 관계 맺음으로써 로즈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를 확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는 지금껏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자기 내면의 은밀한 비밀을 피터와 공유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기쁨이다. 필이 과거에 죽을 뻔했던 자신을 헨리가 구해준 후 안아주었다고 이야기하자 피터는 둘이 발가벗은 상태였냐고 묻는다. 피터의 질문을 받은 필의 표정이 묘하다. 필은 당황, 기쁨, 설렘, 긴장이 함께 어우러진 묘한 표정으로 피터를 바라본다. 평생 혼자만 간직하려던 비밀을 피터와 나누게 된 상황에 걱정과 환희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피터의 조심스러우면서도 도발적인 접근에 필은 점차 자기 내면의 비밀을 둘러싼 빗장을 하나둘씩 벗겨나간다. 그럴수록 피터에 대한 애정도 더욱 커져간다.
그러나 끝내 모든 것이 피터의 정교한 계략이었음이 드러난다. 피터가 필에게 접근한 것은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피터는 이를 위해 자신이 목격한 필의 비밀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여성스럽고 남자답지 못하단 이유로 필의 동료들로부터 ‘호모’라 모욕당하던 피터가 굳게 닫혀 있던 게이 마초인 필의 내면을 열어젖힌 후, 비수를 꽂아버린 것이다.
긴장의 연속인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로즈피터와 필은 각각 서로 다른 위계에서 유리한 지점에 서 있다. 피터는 여성스러운 남자라는 이유로 젠더 위계의 하위에 있지만, 섹슈얼리티 위계에서는 게이인 필보다 상위에 있다. 마초적인 필은 동료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수치심과 아무도 달래주지 못할 외로움을 갖고 있다. 서로 다른 유리한 지점을 토대로 한 두 남자의 파워 게임을 미묘한 심리를 더해 펼쳐내는 〈파워 오브 도그〉의 솜씨는 굉장히 섬세하면서도 기묘하다.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얼마나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며 구성되는지, 개별 인간은 이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이처럼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흔치 않다.
영화의 설정과 재현도 마찬가지다. 게이들은 흔히 ‘비자연적’ 섹슈얼리티를 가졌단 이유로 배척당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자연’에 가까운 자는 게이인 필이다. 필이 진흙과 강물로 목욕하는 장면, 장갑도 없이 어린 수소를 거세하는 장면은 세련된 교양을 갖춘 다른 등장인물과 대비된다. 〈파워 오브 도그〉에서는 이성애적 질서와 이를 바탕으로 구축된 질서가 인공이고, 게이가 자연이다.
퀴어만이 사물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필은 황량한 산을 가리키며 피터에게 브롱코 헨리만이 저 산에서 다른 것(개 모양의 그림자)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피터는 단번에 헨리와 똑같은 대답을 내놓아 필을 놀라게 한다. 이 장면은 필이 피터에게 마음을 여는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다. 헨리와 같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사랑했던 자신과도 교감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것이다. 비록 필의 확신은 피터의 치밀한 계획 안에서만 가능했던 것이었지만, 피터 역시 색다른 시선을 지닌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피터가 이 능력을 통해 필의 ‘약점’을 알아보고 그를 공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자주 모욕당하는 피터피터가 엄마와 계부 조지의 행복, 즉 이성애 가족 규범을 재확립하기 위해 필을 죽게 만들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악역’이었던 필이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마냥 통쾌하지만은 않은 이유다. 젠더 위계의 하위에 자리한 피터가 게이의 치명적 약점인 외로움을 포착하고 도달하고자 한 곳이 이성애 가족 규범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남들과는 ‘다른 것을 보는’ 퀴어들이 오랫동안 삭제되고 배제당해 온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닐까? 남들과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퀴어들 사이에서는 갈등과 긴장, 애정과 구원이 뒤섞인 관계가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정작 이 관계에 기대어 사는 규범적 존재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 〈파워 오브 도그〉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여러 질문을 계속 떠오르게 한다. 이 모든 복잡다단함을 연기한 배우들의 연기력(그중에서도 베네딕트 컴버배치)과 더불어 모든 면에서 박수를 칠 수밖에 없는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