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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an 20. 2021

예술가는 왜 시민과 불화하는가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트리스탄·베니스에서의 죽음》

너처럼 그렇게 파란 눈을 하고 온 세상 사람들과 정상적이고 행복한 관계 속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토마스 만의 작품에는 두 세계가 길항한다. 시민의 세계와 예술가의 세계. 전자는 법·도덕·질서·문명·남성·유럽을, 후자는 시·감정·사랑·여성·남미를 상징한다. 토마스 만 작품의 주인공들은 두 세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그들이 두 세계 모두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들보다 세상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것을 저주받은 축복이라 여긴다. 자신의 예술적 재능과 감수성을 사랑하면서도 ‘반듯하고 균열 없는’ 시민의 세계를 동경하는 것이다.


  두 세계 사이에는 위계가 존재한다. 세계는 시민의 원리로 건설되었고, 시민의 논리로 작동한다. 예술가는 세계와 불화하지만, 시민은 세계를 편안히 여긴다. 예술가가 시민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이유다(반면 시민은 예술가에게 무관심하다). 시민을 향한 예술가의 동경은 이 책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의 추동력이다.


  최면술처럼 부지불식간에 인간을 사로잡는 파시즘에 대한 탁월한 은유인 〈마리오와 마술사〉를 제외한 모든 수록작(〈토니오 크뢰거〉, 〈타락〉, 〈행복에의 의지〉, 〈키 작은 프리데만〉, 〈어릿광대〉,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핵심 정서는 열등감과 동경이다. 두 세계의 위계가 항상 ‘시민’과 ‘예술가’의 관계로 표상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등장인물은 자신이 속한 세계와 속하고 싶은 세계 사이의 괴리에서 괴로워한다. 


  세계와의 불화로 괴로워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탄탄한 구조와 수사적이고 예리한 문장으로 주류 세계와 불화하는 자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 토마스 만의 소설에 매혹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토마스 만이 두 세계가 맺는 위계적 관계와 이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예술가의 내면을 탁월하게 포착하여 형상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종종 단조롭다.


  이 단조로움은 ‘우리가 소속된 세계를 과연 두 개로 한정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생겨난다. 점점 복잡해져 가는 세상에 맞춰 예술가가 조율해야 하는(혹은 열등감을 느껴야 하는) 세계의 개수 역시 늘어나고 있기에 하나의 대립으로만 예술가 내면의 불안을 설명하는 소설의 구도가 단순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만 소설의 낭만적 순진함은 세계와 불화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빛을 잃지 않는다. 온 세상에 ‘시민’만 남게 되지 않는 이상, ‘예술가’들이 시민의 세계와 불화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사랑·동경·열등감을 갖는 걸 멈추지 않는 이상, 토마스 만의 작품은 단순함을 넘는 선명함으로, 오랫동안 읽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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