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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편백 Dec 29. 2022

여름 계획

계획을 무너뜨려도 얼마든지 용인됐던 존재에 관하여


 여름이란 어떤 계절이었나. 그 정열이 나를 태울 수 있다면야 황홀감에 몸이 붕붕 뜰 것 같다. 반면 어떨 땐 여름에 겪은 상실들이 떠올라서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땅까지 힘없이 가라앉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운 게 너무 싫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여름과 좋음이라는 감정이 공존한다는 건 적어도 내 계획에는 없었던 거다.      


 한 평범한 새벽에 나누었던 대화. 그 아이는 여름이 되면 잎이 푸릇푸릇 익는 게 좋고, 집에 나른히 누워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보는 게 좋다고 했다. 여름 특유의 서술도 낭만적이라면서. 심지어는 실내를 벗어나면 느껴지는 후덥지근함까지 좋아한댔다. 그건 내가 여름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였는데. 말이라는 건 참 힘이 있어서, 순식간에 여름에 대한 애정을 후덥지근히 달구어 버리고 내 마음까지 둥둥 떠올렸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여름을 싫어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사실 ‘어쩌다 보니’는 아니고, 나의 무수한 시도 끝에 새벽의 주인공과 여름 바다를 다녀왔다. 사실 기대한 모습은 아니었다. 모래알이 햇볕에 반짝 반사된다거나, 파도가 희게 부서지는 풍경 같은 거. 그날 우리가 보았던 바다는 태풍이 간신히 멎은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하늘은 흐렸고, 파도가 꽤 높았고, 해변에는 안개가 서려서 눈부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후덥지근했다. 비 오는 레스토랑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데, 참 이상했다. 어쩐지 여름이 너무 좋아져 버리는 것이었다. 잠시 비가 멎을 때면 우리가 날 좋은 여름날을 고른 것 같아 좋았고, 비바람이 몰아칠 때면 이마저 추억이 된다는 게 좋았다. 우산에 의지한 채 용감하게 돌아다니다가 무작정 어떤 카페에 들어갔다. 그렇게 고즈넉하고 아늑하며 커피까지 맛있을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토독토독 미끄러져 내렸다. 나는 필름카메라를 꺼냈다. 바보처럼 플래시도 안 터뜨리고 찍었다는 걸 인화하고서야 알았지만, 어둠까지 너무 잘 어울렸다. 모든 게 다 푸르고 여름 같았다. 여름이 뭐라고.     


 여름을 정의하자면 새벽의 대화와 그날 바다가 생각난다. 그건 내 모든 계획을 산뜻이 무력화하고, 엇갈림마저 청춘 영화처럼 만들어 버린다. 여름이 영원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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