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 인 서울 ②] 연극 '헤다 가블러' 공연 리뷰

by 데일리아트

헤다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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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다 가블러 포스터 ⓒ LG Arts Center


5월의 두 번째 주말, 연극 '헤다 가블러'를 보기 위해 LG아트센터로 향했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릭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의 '헤다 가블러'는 그동안 국내에서는 자주 공연되지 않는 작품이었다. 관객들이 헤다라는 인물의 난해함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아서다. 또한 '헤다 가블러'의 이야기가 어쩌면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불편한 진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헤다 가블러'를 처음 공연으로 접했던 것은 2009년 가을이었다. 러시아 극단의 내한 공연이었는데, 첫 공연을 보고 연속해서 사흘 동안 공연장을 찾을 만큼 강렬함과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이번 공연은 입센의 원작에 리처드 이어의 현대적 해석을 덧입힌 각색본을 바탕으로 전인철 연출가가 연출을 맡았다고 한다. 또한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다양한 캐릭터의 매력을 보여주었던 배우 이영애가 연극 무대에 도전해 표현하는 헤다였기에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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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다 가블러 무대 ⓒ LG Arts Center


공연장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독특한 무대장치였다. 출구가 없는 듯한 기하학적인 회색 벽의 구조물과 함께 원형으로 뚫린 천장만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는 듯했다.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 위에 가구들이 하나씩 배치되면서 헤다의 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도 어딘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듯한 피아노와 전신 거울, 디오니소스(Dionysos, 포도주의 신이자 전통적인 사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호자)의 초상화와 바닥에 놓인 생화들 그리고 헬륨 풍선 다발이 보였다. 무대는 무채색으로 생기를 잃은 차가운 모습이다. 바닥 위에 놓인 꽃들은 공간에 생기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산소가 부족한 환경에 금새 비명횡사할 것처럼 느껴진다. 무대 위에서 색을 가진 것은 헬륨 풍선들뿐인데, 그것은 마치 헤다의 꿈 혹은 이상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을 향해 부유해 있지만 현실은 발이 묶인 채로 언젠가는 날아갈 것을 희망하는 상태로 존재하는 풍선에서 헤다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무대는 헤다에게 닫힌 공간, 소통의 단절, 질식할 것만 같은 헤다의 내면세계를 상징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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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다의 집 ⓒ LG Arts Center


헤다는 학자인 조지 테스만과 결혼해 6개월간의 긴 신혼여행에서 돌아온다. 하지만 신혼여행은 그의 연구를 위한 여행이었고, 헤다는 결혼과 동시에 시작된 지극히 세속적인 현실에 대한 실망감이 역력하다. 남편 테스만은 학자라는 타이틀에 비해 독립적이지도, 능력이 있지도, 부유하지도 않지만 헤다는 그로부터 어느 정도의 품위 유지와 함께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테스만은 수많은 남성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던 헤다를 쟁취한 것을 유일한 자랑으로 여기면서도 헤다의 내면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섬세하지 않다. 헤다의 집에는 헤다의 의사와 상관없이 줄리아나의 가정부로 일했던 베르테가 자리하고 있다. 헤다의 내밀한 감정이 드러날 때마다 베르테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헤다를 관찰한다. 또한 조카 테스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연금을 바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헌신적인 고모 줄리아나까지 등장하며 헤다는 결혼과 동시에 테스만이라는 올가미에 갇힌 듯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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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나와 테스만 ⓒ LG Arts Center


테스만의 친구인 브라크 판사는 테스만과 라이벌 관계이자 헤다의 전 연인이었던 에일레트의 소식을 가지고 헤다의 집에 찾아온다. 오래전부터 헤다를 흠모해 왔던 브라크는 헤다의 권태감을 마치 꿰뚫기라도 한 듯이 헤다에게 은밀한 삼각관계를 제안해 오기 시작한다. 헤다는 그의 가스라이팅에 순응하듯 유혹적인 태도로 반응하지만 그는 사실 헤다가 가장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하는 질서와 통제를 상징하는 대상이었다. 헤다는 브라크로부터 전 연인 에일레트가 자신의 이름을 건 창작물을 성공적으로 내놓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알코올 중독에 방탕한 그와의 스캔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그를 떠났던 헤다는 자신의 동창이었던 테아가 에일레트를 성공으로 이끈 주체이자 공동 저작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급격한 혼란에 휩싸인다. 테아는 헤다가 가지지 못한 용기와 주체성을 가진 여성이었기에, 헤다에게는 학창 시절부터 질투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헤다는 패배감으로 인해 에일레트를 지배하고 통제하고 싶은 뒤틀린 욕망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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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다와 테아 ⓒ LG Arts Center


헤다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에일레트에게 신혼여행 사진을 보여주며 그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헤다에 대한 감정이 아직 남아있는 에일레트는 헤다에게 왜 스스로를 내던지는 충동적인 결혼을 했는지 물으며, 자신에게 헤다는 모든 것을 털어놓게 만들었던 유일한 존재였음을 고백한다. 헤다는 흔들리는 에일레트를 보며 자신의 통제력을 재확인한다. 헤다는 테아에게 길들여진 모습이 아닌, 과거의 거침없고 자유로운 열정을 지닌 에일레트로 되돌려놓기 위해 그의 충동성을 부추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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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레트와 헤다 ⓒ LG Arts Center


1막과 2막 사이의 단상


헤다는 가블러 장군의 딸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규율과 통제가 강한 아버지로부터 자라났을 가능성이 높다. 헤다는 무의식적으로 규율이나 통제에 속박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있어 보였다. 어쩌면 억압된 자율성과 제도의 통제 사이에서 분열해 버린 내면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벽에 걸린 디오니소스의 초상화처럼 자유와 충동을 더더욱 갈망하기도 하고 무채색의 무대배경과 어우러지지 못하는 컬러풀한 풍선처럼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기도 하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제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듯이, '헤다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뿌리내리고 적응하지 못한 채 고립되어 버린 한 인간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2막

헤다의 바람처럼 에일레트는 다시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테스만과 브라크 판사가 주최한 파티에 합류했던 에일레트는 결국 술에 취해 자신의 소중한 원고를 잃어버리고 만다. 테스만이 우연히 원고를 주워 집으로 가지고 오자 헤다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에일레트와 테아의 합작품인 원고를 몰래 숨긴다. 에일레트가 절망하며 헤다의 집에 찾아오자 헤다는 에일레트에게 자신이 보유하던 권총을 건네며 에일레트의 자살을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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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을 겨누는 헤다의 클로즈업 화면 ⓒ LG Arts Center


헤다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표현될 때마다 헤다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화면이 벽면 가득 채워졌다. 그것은 헤다를 관찰하고 감시하는 느낌을 주는 한편, 헤다와 공명하며 고립된 헤다를 관객과 소통시키는 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클로즈업 영상 중 헤다가 권총을 겨누는 장면과 광기에 휩싸여 투명한 유리 화로에 에일레트의 원고를 불에 태우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또한 헤다의 내면을 구현하는 데 있어 피아노 현을 이용한 사운드가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음과 음 사이가 긴 간격으로 연주되는 피아노 선율은 헤다가 가진 고립과 불안을 더해주기도 하고, 미세한 흔들림 속에 감추어진 내적 폭풍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헤다와 브라크 판사가 서서 각자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만들어지는 불안정하고 낯선 소리의 에너지들은 이야기가 점점 통제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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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다 그리고 에일레트의 원고를 태운 화로 ⓒ LG Arts Center


결국 테아는 위기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해결 방법을 찾아낸다. 자신이 메모해 두었던 원고의 내용을 바탕으로 에일레트의 원고를 다시 살려내는 작업에 이번에는 헤다의 남편 테스만을 동원한다. 테스만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작업이 정리와 분류라고 말하며, 테아와 함께 원고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작업이 잘 되어 가는지를 묻는 헤다에게 테스만은 벌써 테아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 같다고 대답하며 무대 위의 헤다를 또 한 번 철저히 고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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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다와 브라크 ⓒ LG Arts Center


에일레트의 소식을 가지고 헤다의 집에 찾아온 브라크 판사는 에일레트가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했음을 헤다에게 알려준다. 그의 멋진 죽음을 기대했던 헤다는 에일레트의 소식에 다시 한 번 좌절한다. 어쩌면 에일레트는 헤다가 만들어낸 환상 속 인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브라크 판사는 에일레트가 가지고 있던 권총에 대해 추궁하며 헤다의 약점을 이용해 심리적 압박을 가해오기 시작한다. 이제는 헤다의 집에서 유일한 수컷이 되겠다고 선언하며, 헤다가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음을 자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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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만과 헤다 ⓒ LG Arts Center


하지만 헤다는 에일레트가 마무리하지 못한 이상적 죽음을 자신이 실행해야 할 때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현실과의 타협이 아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한 탈출을 선택한다. 헤다가 권총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댄 순간, 좀처럼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회색 벽의 구조물이 들어 올려지며 엑스자의 형태로 무대 위에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면은 무대가 하나의 상징적인 설치 미술 작품이 되어 관객에게 의미를 건넨다. 헤다의 죽음은 헤다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던, 헤다를 가두었던 세속적인 욕망과 제도, 관념의 현실 세계로부터 비로소 해방된 것이라고 무대는 말해주는 듯했다.


헤다를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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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다와 피아노 ⓒ LG Arts Center


헤다 가블러를 보면서 배우 이영애가 왜 그토록 헤다를 연기하고 싶어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극은 순간의 예술이기에 영상과는 달리 수정이 어렵고 마치 삶이나 인생처럼 돌이킬 수 없는 매체이다.


자유로운 스크린을 떠나 어쩌면 제한된 공간인 무대라는 프레임 안에 자신을 가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배우로서 내면의 여러 모습을 끄집어내고자 하는 열망, 좀 더 깊어지고자 했던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선택이 충분히 가치 있는 도전이라 느껴질 만큼 그녀의 연기에는 용기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 연극은 헤다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헤다의 심리적 서사는 극중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펼쳐지고 드러난다. 테스만 역의 김정호 배우와 줄리아나 역의 이정미 배우, 베르트 역의 조어진 배우는 테스만 가의 이방인인 헤다에게 일상의 권태와 고립을 가중시켜 주는 존재들이었다. 테아 역의 백지원 배우는 헤다가 가지고 있지 않은 용기와 주체성을 바탕으로 헤다에게 질투와 선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자 진정한 뮤즈였다. 브라크 역의 지현준 배우는 헤다를 가장 잘 이해하고 헤다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헤다의 남성적 화신이었으며, 에일레트 역의 이승주 배우는 디오니소스처럼 헤다가 자유와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이었다. 헤다는 테스만 가의 사람들과 자신에게 거울 역할을 하는 타자들로 인해 점점 더 고립되며 극단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리고 이 극적인 구성은 모든 배우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자신만의 빛을 내주었기에 가능했다.


마지막 커튼콜에서 헤다 가블러를 무대에 구현해내기 위해 애쓴 스텝들과 배우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또한 한달 동안 어김없는 발걸음 쌓아가며 더욱 완성도 있는 무대를 만들어 갈 그들의 모습이 기대되었다.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쯤 헤다를 한 번 더 찾아와도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헤다가 던져 놓은 물음표를 간직한 채 공연장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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