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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는 예술 22]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있습니다

by 데일리아트 Feb 06. 2025


불꽃처럼 살다간 저항시인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브런치 글 이미지 1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표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돌아 /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으냐 누가 부르더냐 / 답밥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웁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윤동주, 이육사와 함께 일제 강점기 대표 저항 시인으로 활동했지만, 대중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시인. ‘이상화’라는 이름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문장으로 더 잘 알려진 시인. 어쩌면 대중들이 시인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화(尙火)’라는 그의 호처럼 그가 ‘불꽃’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은 아닐까. 오늘은 추운 겨울 거리에서 봄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불꽃 시인 이상화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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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화 시인의 초상


이상화 시인은 1901년 대구의 명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학문과 문화를 숭상하는 명문가였고, 가족들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시인의 큰아버지는 신분과 관계없이 신식 학문을 가르치는 ‘우현 학교’를 운영했고, 그의 어머니는 ‘달서 여학교’와 ‘애국부인회’의 회장이었으며, 그의 형 이상정과 동생 이상백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시인은 이런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무장한 부모님으로부터 뛰어난 학식과 애국정신을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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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화 시인의 고택 전경.(출처 : 대구교통공사 공식 블로그)


이상화 시인은 대구에서 ‘백기만’과 ‘현진건’과 함께 어울렸다. 셋은 자주 교류하며 1917년에 함께 <거화>라는 동인지를 창간했다. 거화(擧火)는 횃불이라는 의미로 나라에 대한 문청들의 소망을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 백기만은 이후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으로 활동했고, 「운수 좋은 날」로 잘 알려진 현진건은 소설가로 활동하며 이후 이상화와 함께 서울에서 <백조>라는 문예지를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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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화의 등단작 「말세의 희탄」이 실린 '백조'의 표지.


19살 이상화는 친구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에서 전개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거사가 끝나자, 이상화는 일제의 눈을 피해 서울로 피신한다. 서울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시인으로의 활동을 시작한다. 고향 교우 현진건의 권유로 문예지 <백조>에 「말세의 희탄」이라는 시를 발표한 것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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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현진건의 초상.


“저녁의 피 묻은 동굴 속으로/ 아, 말 없는 그 동굴 속으로/ 끝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나는 꺼꾸러지련다./ 나는 파묻히련다./ 가을의 병든 미풍의 품에다/ 아, 꿈꾸는 미풍의 품에다/ 낮도 모르고/ 밤도 모르고/ 나는 술 취한 몸을 세우련다./ 나는 속 아픈 웃음을 빚으련다.”(이상화, 「말세의 희탄」)


그의 초기 시에는 ‘저항’이라는 키워드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는 프랑스 유학을 위해 향한 일본에서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끔찍한 ‘대학살’을 목격한다. 일본 정부는 대지진으로 인한 자국민의 분노를 조선인 탓으로 돌리기 위해 “혼란을 틈타 불온사상을 가진 조선인들의 폭동이 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식의 조작된 보도를 내놓았고, 이를 접한 일본인들은 분노하며 조선인들을 끔찍하게 학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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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대지진 자료사진(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이후 1년 만에 조선으로 귀국한 시인은 시 짓기에만 전념하며 ‘저항’을 시의 전면에 내세운다. 이때 쓰인 시들이「가장 비통한 기욕」,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동경에서」와 같은 시다.


“오늘이 다 되도록 서울을 헤매어도/ 나의 꿈은 문둥이 살 같은 조선의 땅을 밟고 돈다./ 예쁜 인형들이 노는 이 도회의 호사로운 거리에서/ 나는 안 잊히는 조선의 하늘이 그리워 애달픈 마음에 노래만 부르노라/ (중략) / 색채와 음향이 생활의 화려로운 아롱사를 짜는/ 예븐 일본의 서울에서도 나는 암멸을 서럽게-달게 꿈꾸노라.”(「동경에서」)


“아, 가도다, 가도다, 쫓겨 가도다./ 망각 속에 있는 간도와 요동 벌로/ 주린 목숨 움켜쥐고 쫓아가도다./ 자갈을 밥으로 해채를 마셔도/ 마구나 가졌으면 단잠을 얽을 것을/ 인간을 만든 검아 하루 일쯕/ 차라리 주린 목숨을 뺏아 가거라./ 아, 사노라, 사노라, 취해 사노라./ 자포속에 있는 서울과 시골로/ 멍든 목숨 행여 갈까 취해 사노라.” (「가장 비통한 기욕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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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 있는 이상화 시인의 동상(출처 : "재봉틀의 국어방" 네이버 블로그)


이후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해오던 시인은 1927년 고향으로 내려간다. 고향에서 시인은 출판부 간사, 학교 강의, 항일 독립운동 인사들의 자금 모금 활동, 조선일보 경상북도 총국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지속하다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마흔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사후에 이상화 시인에게는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하늘을 우러러/ 울기는 하여도/ 하늘이 그리워 울음이 아니라/ 두 발을 못 뻗는 이 땅이 애달파, 하늘을 흘기니/ 울음이 터진다./ 해야 웃지 마라,/ 달도 뜨지 마라”)(「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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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수립 기념 축하 사진(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혹자는 시인의 시작 활동이 ‘적극적 저항’은 아니었다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검열이 난무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 볼때 시로 저항의 목소리를 내었다는 것만으로도 시인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상화 시인의 시편들은 피로 쓰인 저항의 기록이다. 그는 꽁꽁 얼어붙은 들판에 봄이 오기를 바라며 일생을 ‘저항의 불꽃’으로 살았다. 비록 시인은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세상 구석구석에 심어 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불꽃(火花)’과 같은 물음이, 오늘까지 살아남아 불의한 시대를 향해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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