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제색도' 톺아보기 2

by 데일리아트

<인왕제색도>의 내용 – 왜 그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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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인왕제색도, 1751, 지본수묵, 79.2×138.2cm,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와 관련하여 가장 다양하게 논의되는 것은 그림을 그린 계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림의 공간이 정선의 교유 장소이자 자신과 친우들의 거주지였기 때문이다. 고유섭 선생이 심환지의 발문을 제시한 이래 이 그림의 첫 소장자로 알려져 있는 심환지의 주문으로 그린 작품이라는 주장, 오랜 벗이자 시인인 사천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린 것이라는 주장, 정선이 자신을 위해 그린 작품이라는 주장,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정선 그림의 주요 고객이었던 이춘제(李春躋, ?-1748)의 주문으로 그렸다는 주장 등이 제기되었다. 이 의견들은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 있는 기와집 주인이 누구인가와도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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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제색도’ 부분


먼저 심환지는 그림이 그려진 1751년에 22세였다. 당대 최고의 원로 화가 정선에게 약관의 젊은이가 그림을 주문한 셈이 되니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다음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최완수 선생이 제기하고 오주석 선생이 구체화한 해석으로 오랜 벗인 이병연의 쾌유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렸다는 것이다.『승정원일기』에는 1751년 윤5월 초하루부터 18일까지 이삼일 간격으로 비가 오락가락하다가, 19일부터 25일 아침까지 이레 동안 장맛비가 내리더니 윤5월 25일 오후가 돼서 완전히 개었다는 기록이 있다. <인왕제색도>는 이날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제목처럼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그친 직후 갠(霽色)’ 인왕산의 모습은 바로 친구 이병연이 쾌차하기를 기원하는 정선의 마음이었다. 따라서 그림 속의 집은 북악산 밑에 있는 이병연의 집 취헌록을 인왕산 쪽으로 옮겨와 그렸고, 정선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이병연은〈인왕제색도〉를 완성한 5일 후인 윤5월 29일 81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와집이 이병연의 집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태호 교수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은 이병연의 한산 이씨 족보를 보면 그의 죽음이 윤5월 29일이 아니라 그해 1월 4일로 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친구가 타계한 지 6개월쯤 지난 시점에 그림이 그려졌다는 얘기이므로 이병연과 그림의 연관성은 희박해 보인다.


<인왕제색도>의 집은 정선의 자택인 인곡정사(仁谷精舍)를 그렸다는 의견도 있다. 정선이 인곡정사와 그 주봉인 인왕산의 경관을 남기기 위해 제작한, 자신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본 것이다. 그 증거로 <인왕제색도>의 집이 정선의 집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 <인곡정사도(仁谷精舍圖)>(1746)를 떠올리게 하며, 정선의 사후에도 <인왕제색도>가 집안에 보관되어 있었음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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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인곡유거도, 종이에 수묵담채, 27.4×27.4cm, 간송미술문화재단.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정선의 인곡정사는 지금의 옥인동인 인왕산 아래 골짜기로 그림의 집과 위치상 상당히 아래쪽에 있었다. 그리고 정선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사적인 그림에는 ‘천금물전(千金勿傳)’이라는 인장을 찍어 자손들에게 천금과도 바꾸지 말라고 알렸는데 <인왕제색도>에는 그 인장이 찍히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정선 자택을 그린 그림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로 제기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18세기 경화세족이었던 이춘제 가문의 문집이 발굴되면서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이춘제의 주문에 응해 그렸고 그림 속의 집은 이춘제의 소유라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춘제 가문은 정선의 작품을 10점이나 가지고 있을 정도로 정선에게 중요한 주문자였다. 이춘제의 집이 나타난 그림 <서원소정도(西園小亭圖)>(1740)의 가옥과 담장 위치는 <인왕제색도>의 집과 유사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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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서원소정도, 1740, 견본담채, 40×67.5cm, 개인 소장.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서원소정도>는 옥류동과 세심대 사이의 인왕산 자락 아래가 배경으로, 오른쪽 하단의 기와집과 그 뒤에 있는 소나무, 담벼락 등의 지형적 특징이 <인왕제색도>에도 나타난다. 또한 김가희 선생은 정선이 이춘제의 주문으로 그린 <옥동척강도(玉洞陟崗圖)>(1739)에서 인물들이 서 있는 골짜기가 <인왕제색도>의 화면 오른쪽의 둔덕 뒤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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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선, 옥동척강도, 1739, 견본담채, 34.5×34cm, 개인 소장.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한편 이춘제는 정선이 자신의 저택을 그린 <오이당도(五怡堂圖)>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춘제가 쓴 제시(題詩)에는 “필운산(인왕산의 옛 지명) 아래는 연기와 안개로 가려졌지만 경물인 은자의 가옥은 의연하다”는 구절이 있다. 이러한 기술은 <인왕제색도>의 경물(景物)이 연상될 정도로 유사하다. 이와 같이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에 대해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존재해 왔고 새 자료가 나타나면서 다른 주장들도 제시되고 있다.

한편 정선은 『도설경해(圖說經解)』라는 저서를 지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역학에 밝았던 인물이다. <인왕제색도>의 ‘제(霽)’는 성리학에서 대상의 명징성(明徵性)을 드러내는 단어다. 정선은 회화에도 이러한 철학을 투영하여 대부분의 산수화에 역학 사상이 표현되어 있다. <인왕제색도> 역시 음양오행론의 관점에서 거론될 수 있다. 그림을 왼쪽 안개 낀 부분에서 시작하여 대각선으로 보면, 대각선 위쪽은 솟아오른 바위가 많은 것으로 양을 의미하며 큰 이상을 가진 외면적 인간상을 상징한다. 대각선 아래는 음으로 습한 안개와 텅 빈 집은 화가 자신의 마음속 이상, 즉 내면성을 표현한다. 비가 내린 것은 엉켰던 천지의 기운이 풀려 음양 두 기운이 교감하고 형통하는 것이라 본다.


<인왕제색도>에 표현된 화풍


<인왕제색도>는 보통 정선 만년의 완숙한 필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정선의 초기 화풍이 확인되는 <금강내산총도>(1711)와 비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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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금강내산총도, 1711, 견본담채, 36.0×37.5cm, 국립중앙박물관.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연대가 밝혀진 정선의 작품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왼쪽의 흙산을 표현하기 위해 미점준(米點皴, 쌀알 모양의 점을 찍어서 그리는 산수화법)을 사용하고 오른쪽 험준한 암산을 표현하기 위해 수직준(垂直皴, 수직으로 내리긋는 선을 사용하는 산수화법)을 사용하고 있다. 아직 정선 특유의 힘찬 수직준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화법 모색기의 양상을 보인다. 후기 회화의 과감한 필치보다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그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비해 만년에 그려진 <인왕제색도>는 다양한 필법보다는 단순하면서 강력한 필선으로 감상자를 압도하는 특징이 있다. 암산을 표현하기 위해서 담묵부터 중묵, 농묵까지 먹을 여러 번 과감하게 덧칠해 짙은 먹색으로 암벽의 괴량감(塊量感)이 드러나게 하고, 소나무는 농묵을 사용하여 스케치하듯이 T자 모양으로 망설임 없이 빠른 필치로 그렸다. 정선의 빠른 필법에 대해서는 당시 주변 문인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한 번에 쓸어내리듯 휘두른 빠른 붓질(一筆揮灑)”(조영석,『관아재고(觀我齋稿)』)


“(정선이『해악전신첩』(1712, 소장처 미상)을 제작하면서) 더욱 放恣해진 쓸어내리듯 휘두른 붓질을 사용”(이병연, <정원백무중화비로봉(鄭元伯霧中畵毗盧峯)>)


“그의 그림은 생동하여 元氣가 있었다. 그러나 붓놀림은 거친 기운이 있었다. 一國의 그림 요구에 응하여 종이와 비단에 붓을 쓸어내리듯 휘둘러 그린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이규상,『병세재언론(幷世才彦錄)』)


이와 같은 기록을 보면 한결같이 정선이 속필로 그림을 그렸음을 증언하고 있는데, 이는 <인왕제색도>에서도 확인된다. 정선은 한국의 자연을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해 전통 화법에 얽매이지 않고 산천, 나무, 바위 등을 거침없이 그려냈다.


<인왕제색도>는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구도와 흑백 대비가 뚜렷한 작품이다. 특히 근경을 농묵으로, 중경과 원경으로 갈수록 담묵으로 그리는 산수화 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멀리 있는 인왕산을 농묵으로 대담하게 그리는 표현법을 취했다. 인왕산의 강렬함을 받쳐주는 것은 바로 산등성이 아래로 자욱이 깔려 있는 안개다. 정선은 흑백 대비를 통해 텅 빈 여백의 안개가 농묵의 강하고 무거운 인왕산 봉우리를 가볍게 떠받치고 있는 것과 같은 회화적 장치를 마련했다. 안개와 능선은 엷게, 바위와 수목은 짙게 처리하는 흑백의 대비를 주어 산의 굴곡을 처리했다.


이태호 교수는 <인왕제색도>와 관련된 화법으로 다시점 합성법과 축경(縮景) 방식을 꼽는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부감법(俯瞰法)으로 집과 언덕을 그리고, 인왕산 봉우리는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고원법(高遠法)으로 그려서 더 거대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정선의 작품 중 가장 실경과 가까운 그림으로 평가받기는 하지만, 실제 인왕산의 전경을 모두 담지 않고 압축하고 생략하는 화법을 쓰고 있다. 근경과 원경의 풍경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시점을 섞고, 실경에서 필요한 풍경을 선택하여 집중하는 회화적 재구성은 정선의 전형적 화법이다.


그림의 상층부는 화면을 압도하는 검은 인왕산 봉우리가 가득 표현되어 있다. 현재 인왕산 봉우리는 비에 젖어도 흰빛에 가깝다. 정선이 왜 인왕산을 검은색으로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당시의 인왕산을 표현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유리원판 사진에 인왕산의 바위 이끼가 검은색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그 증거로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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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인왕산의 유리원판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인왕산 근처에 있는 안산 둘레길에도 그늘진 바위에 이끼가 끼어 있는데, 인왕산과 안산이 서로 근접해 있으므로 인왕산에 이끼가 있었다면 이러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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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의 바위에 낀 이끼 /사진: 최은규


그러나 유리 원판 사진이 흑백이어서 이끼 유무를 확인하기 어렵고,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끼는 습생식물이므로 일광에 드러나 있는 암산 봉우리를 뒤덮어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심 경물을 강조하면서 흑백 대비에 의한 강약의 동세를 주는 구도는 정선의 <단발령망금강산도>(1711), <박연폭도>(1750년경), 1편에서 제시한 <청풍계도>(1739) 등에서 반복되면서 정선의 산수화 양식의 고유 특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인왕산 봉우리의 압도적 중량감을 표현하기 위해 검은 먹을 무겁고 강렬하게 쓴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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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박연폭도, 1750년경, 지본수묵, 119.4×51.9cm, 개인 소장


마무리


<인왕제색도>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한 점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왜 이렇게 품을 들여야 하는가.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 )는 그의 저술『역사는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18세기 중반에 그려진 <인왕제색도> 톺아보기는 그림 안에 담긴 과거를 향해 말을 거는 것이다. 그 안에는 인왕산 아래 살던 경화세족들의 사상과 문화가 담겨 있고 정선의 필생의 화풍이 담겨 있으며, 무엇보다 현재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인왕산의 옛 풍경이 당당하게 담겨 있다. 우리가 사는 현재의 땅을 역사 속의 인물이 그린 방식으로 그림을 읽어나가노라면 예로부터 현재에 맥맥하게 전해지는 우리의 정체성과 저변에 깔린 의식이 무엇인지 사유해 보게 될 것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으로 옛 그림을 보면서 문득 기원해 본다. <인왕제색도>가 기나긴 국외 전시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우리 앞에 다시 그 모습을 보여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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