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칠의자에 앉은 한복차림의 “Meri bombeen” -경기전 어진 박물관에서-
얼마전 음식 맛과 한옥의 멋이 살아 있는 조선왕조의 본향 전북 자치도 전주에서는 로컬 컨텐츠 연구소가 진행하는 《다시 만난 영웅 태조 이성계》 역사탐방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전주는 조선 왕실과 관련된 경기전을 비롯하여 전주이씨 시조 묘인 조경단, 오목대, 이목대, 전주 사고, 예종 태실 등 많은 유적과 한옥마을이 있다. 경기전에는 언제나 많은 관람객이 북적인다.이번 역사탐방 프로그램에 특이하게도 네덜란드에서 유학 온 벽안의 외국인 여학생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모르는 역사를 외국 여학생인 meri가 무척 신기해 하며 재미있어 했다. 이곳 어진 박물관 '일월 오봉도' 앞에는 주칠(朱漆)한 조선 왕실 의자가 놓여 있다. 망설이던 meri가 의자에 앉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의자에 앉아 멋들어진 자세를 취한 벽안의 여성이 우리나라 왕만이 앉을 수 있는 어좌에 앉으니 놀랍도록 어울린다. 이제 우리 궁궐의 문화는 한국을 넘어 글로벌화 되어 간다. 이 처럼 추억의 한 컷 사진을 간직할 수 있는 전주의 문화유산과 먹거리를 찾아 즐겨 보는 것을 강추한다. 오늘은 창덕궁의 요금문과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던 박규수 집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창덕궁 서편 재동(齋洞)에는 1989년 창덕여고가 강동구로 이전하여 그 터 위에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하는 핵심 기관인 ‘헌법재판소’가 자리를 잡았다. 이 터는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온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의미 있는 터와 함께 주목할 인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개화 사상가이자 문신이었던 박규수(朴珪壽,1807-1877)와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다.
헌법재판소는 조선의 역사와 근·현대사의 격동의 시기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던 사건들을 배경으로 선조들의 피가 흩뿌려진 바닥 위에 지어졌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재동(齋洞)이라는 지명에 대해서 알아보자. 재동의 유래는 계유정란에서 왔다. 수양대군이 계유년에 정란을 일으켜 영의정 황보인 등 반대파를 유인하여 살해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게 된다. 백성들은 핏자국과 비린내를 제거하고자 집안의 재[灰]를 가지고 나와서 덮어버린 결과 온 동네에 재가 가득하게 되어 '잿골'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본디 이 터는 영조가 막내딸 화길옹주에게 내린 사저 터였다. 조선 후기에는 개화사상의 선구자였던 박규수와 갑신정변으로 집안이 풍비박산된 홍영식의 집터가 자리 잡았고, 이웃에는 효명세자(추존왕 문조)의 세자빈이자 조선의 마지막 대왕대비 신정왕후 친정 풍양 조씨가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정변 후 이곳 터는 고종이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죽음 일보 직전의 큰 상처를 입은 민영익을 서양 의술로 치료해준 의료 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安蓮)”에게 제공하여 광혜원이 세워졌다. 그 후 2주일 뒤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알렌은 나중에는 선교사로서의 초심을 잃어버렸고 정치가와 사업가로서 행세했으며 조선 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벌여 운산 금광채굴권과 경인 철도부설권 등의 잇속을 챙긴 인물이기도 하다.
#. 헌법재판소 경내 천연기념물 ‘백송’
현재 재판소 터 옆에는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하연빛이 되는 600살 정도로 추정되는 ‘백송’과 이곳이 광혜원 터, 홍영식의 옛 집터라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효명세자의 아버지는 순조 임금이며 할아버지는 정조 임금이다. 조선의 미래를 책임지고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과 백성들의 안정된 삶의 보장이 기대되는 세자였기에 만백성들과 관료 모두가 반겼던 세자였다. 부왕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1800년)로 승계에 대하여 전혀 준비되지 못한 채 11살에 왕위에 오른 순조의 통치 시기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이어졌다. 지방에서는 홍경래의 난과 가톨릭에 대한 박해로 나라가 매우 어렵고 가난한 시기였다.
이 난국에 세자는 헌종을 낳던 해에 부왕 순조의 명에 따라 왕을 대신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작하였으며 세도정치를 견제하고자 그에 맞는 젊은 인재 박규수를 중용하였고 경연을 벌인 경우에도 박규수를 배석시키고 견해를 들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고 총명하였던 세자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라를 잘 다스렸다.
창덕궁 후원에는 ‘효명세자’와 관련된 의두합, 운경거, ‘연경당 등의 전각들이 있다. 세자는 정치적인 감각과 지혜가 뛰어나 조선이라는 나라를 안정시켜 조선을 반석 위에 세운 할아버지 정조를 닮고자 하였다. 규장각 뒤쪽 작은 집 의두합과 운경거에서 규장각 쪽으로 계단을 내고 주로 기거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왕의 권력을 강화하여 나라를 굳건히 하고자 ‘연경당’을 지어 신하들이 왕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도록 ‘예악 정치’를 펼쳤다.
#. 한국전쟁중 부산으로 옮겨 보관중 화재로 반쯤 불타버린 효명세자 어진
16세의 효명세자는 요금문을 통해 걸어서 몇 분 거리도 되지 않은 지금의 재판소 터에 살고 있었던 2살 많은 약관의 나이에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개혁사상가 박규수의 집을 자주 찾았다. 그는 정조 4년(1780)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다.
효명세자는 박규수를 신하이자 정치적 반려자로서 믿고 의지하였으며 깊은 친분을 가지고 친구 이상의 관계로 가까이 지냈으며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야심한 밤늦게까지 학문을 논하고 친분을 나누면서 교류하였다. 하지만 운명이라고 할까 세자는 아들 헌종이 4살 때인 1830년에 스물한 살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조선은 세도가들에 의한 권력 독점과 남용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국가 운영이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왕이 아니면서 세자의 신분으로 나라를 통치하였던 세자는 사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묘호를 국왕으로 추존하면서 익종(翼宗)으로, 고종이 황제로 다시 추존하면서 문조(文祖)로 묘호를 바꿨다.
환재(瓛齋) 박규수는 세자와 함께 개혁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지만 이 충격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채 20여 년간 지금의 헌법재판소 터에서 오랜 기간 칩거에 들어가게 된다. 그 기간 조선은 순조의 승하와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 일곱 살에 즉위한 헌종, 허수아비 같은 철종이 왕위에 오르며 조선의 발전은 거꾸로 가게 되었다. 1864년 철종 사후 재동 이웃에 살았고 효명세자의 세자빈이었던 신정왕후 조씨의 도움을 받아 그의 관운도 활짝 열려 여러 관직에 오르게 된다. 평안도 관찰사 시절 박규수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미국의 통상 요구를 조선은 대원군의 통상 거부 정책에 의거 거부했다. 미국이 이를 계속 묵살하고 사태를 악화시키자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우기도 하였다.
후원을 관람하고 향나무 쪽으로 나오다 보면 인적이 드물어 특별히 관심을 갖고 보지 않으면 보기 어려운 문으로 궁궐 담장 중간 정도에 위치한 요금문(曜金門)을 만나볼 수 있다. 예전에는 이 문의 궁장(宮牆)을 돌아 흐르는 실개천인 금천(錦川)에서 근처의 백성들이 빨래를 하였던 빨래터 흔적이 아직도 가까이에 남아 있다. 요금문의 ‘요(曜)’자는 빛난다는 뜻이고 ‘금(金)’자는 오행에서 서쪽과 가을을 상징하여 서쪽을 빛내는 문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처음에 이름이 없었던 이 문은 1475년(성종 6년)에 왕명으로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요금문” 이름을 지어 올려 문에 달았다. 문은 평상시에는 닫혀 있으나 궁궐 주방에서 물길어 나가거나, 궁궐에서 살아가는 내시와 여관(=궁녀)들이 병들거나 늙어서 궁내 생활을 마감해야 하는 경우 이문을 이용하여 퇴궐하였다. 1688년에는 폐비된 인현왕후가 이 문으로 출궁하였고 6년 뒤 복위될 때는 하루 전날에 미리 이 문으로 다시 궁에 들어와서 잠시 머문 곳이 창덕궁의 경복당이었다. 후에 “경복전”으로 이름이 바꾸었고 1824년(순조 24년) 화재로 불타 사라진 이후 현재까지 복구되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문형배는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형편에 도움을 주신 김장하 선생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유일한 잣대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선생은 제게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해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히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줬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가르침이리라. 효명세자가 요금문을 지나 박규수의 집을 찾을 적마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으로 이루고자 추구했던 나라 발전의 꿈도 현재의 김장하 선생님의 가르침과 같지 않았을까? 비록, 세자의 꿈이 요절이라는 꺾임에 날아가 버렸지만…
어찌 되었건 재동 헌법재판소 터 위에 세워진 지금의 재판소가 대한민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래 살아남아 근대 문화유산을 거처 국가 유산 국보로 남아 주었으면 좋겠다.
[정환선의 문화유산 산책 ③] 효명세자의 ‘요금문’과 박규수의 ‘헌법재판소’ 터 < 문화일반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