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731부대. 차가운 기억
Ⅰ. 장면 — 감정 없는 진열, 차가운 윤리의 시작
여행자는 유리 케이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춥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일본 731부대 부대장 가족사진입니다. 해 질 녘의 물빛처럼 부드러운 빛이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을 감쌉니다.
일본 731부대 부대장 어머니의 인자한 미소, 아내의 남편에 대한 신뢰가 담긴 눈빛,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아이의 작은 눈동자. 단정한 군복의 단추는 반듯하고, 가족의 표정은 행복합니다. 그 평온한 일상은 한순간 멈춘 시간처럼 고요합니다.
그러나 사진의 오른편 유리 케이스에는 세균전 도구가 놓여 있습니다. 바늘의 길이, 튜브의 지름길이, 금속의 차가운 반사광. 웃음과 기술, 인간의 온기와 냉정한 실험이 불과 한 걸음 거리 안에 공존합니다.
표백액과 금속이 섞인 미세한 화학 냄새, 천장 형광등의 희미한 백색빛, 바닥에 닿는 구두굽의 건조한 소리가 들립니다. 전시관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두 사물의 거리가 모든 말을 대신합니다.
전시실을 따라 걷는 동안 유리는 여러 번 내 얼굴을 반사하고, 반사된 얼굴은 매번 조금씩 다르게 보입니다. 731부대의 유리는 감정을 배제하려는 듯 차갑지만, 그 차가움이야말로 나를 오래 붙잡습니다.
송화강을 향해 난 창문 틈에서 바람이 스칩니다. 하얼빈이라는 지명에 깃든 오래된 뜻 ‘그물을 말려 두던 자리’가 순간 떠오릅니다. 누군가는 강가에서 그물을 널었고, 또 누군가는 다른 종류의 그물을 사람 위에 던졌습니다. 이 공간의 빛은 살짝 떨려 보입니다.
Ⅱ. 질문 — 부끄러움을 전시한다는 것
여행자는 자문합니다. 부끄러움까지 전시하는 용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진실을 드러내는 일은 복수일까, 아니면 책임일까? 가해의 도구 옆에 놓인 일상의 사진은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일까?
중국 곳곳의 일본제국주의 전시는 왜 피해의 기록뿐 아니라, 그에 협력했던 중국인들의 이름과 얼굴까지 밝혀 둘까? 오늘의 중국은 이 기억을 어떻게 제도로 고정했으며,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사는 이웃으로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Ⅲ. 사유 — ‘기억의 윤리’를 설계하는 방법
전시의 문법: 감정을 지우고, 판단을 남기다
이 공간의 첫 인상은 차분함입니다. 그러나 그 차분함은 무감각이 아니라 의도된 거리입니다.
난징 대학살 희생자 기념관에서는 일본군 위안소가 실물 규모로 복원되어 있고, 생존자의 증언이 낮은 음성으로 흐릅니다. 난징 대학살 희생자 기념관은 한국어로 번역한 기념관 이름입니다.
중국의 난징 기념관을 한국어로 가감없이 번역하면 난징 대도살 희생자 기념관입니다. 한국에서 도살이란 단어는 병에 걸린 닭이나 돼지를 죽일 때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선양(심양)의 9·18 역사 박물관에는 철로의 잔해, 군복의 재질감, 포연이 남긴 검댕의 색조가 시각적 충격 대신 시간의 밀도를 전달합니다. 그 옆 전시실에는 한간(漢奸)—일제에 협력한 중국인—이 고개 숙여 사과하는 밀랍 인형이 서 있고, 그 뒤 벽면에는 수탈과 착취로 고통받는 민중의 그림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한간’은 한국의 ‘친일파’와 유사한 개념이지만, 중국에서는 단순한 역사적 명칭을 넘어 국가 윤리를 위반한 상징적 존재로 기억됩니다.
이 전시 언어의 핵심은 감정의 과잉을 피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덜어냄으로써 관람자는 일시적 분노보다 지속되는 판단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 여기서의 사실 나열은 냉정이 아니라 윤리입니다.
사실이 정확히 서 있을 때, 관람자 각자의 책임이 생깁니다. 전시는 말합니다. “우리가 겪은 일을 숨기지 않겠다. 심지어 부끄러움도 보이겠다.”
부끄러움의 기록: 협력자까지 전시하는 까닭
중국의 여러 전시장에는 독립운동 영웅보다, 일본에 협력한 한간의 목록과 얼굴이 더 자주 등장합니다. 어떤 이는 그 목록이 자학적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부끄러움의 기록’이 사회의 백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움을 보관하는 사회는 재난 앞에서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얼굴, 그리고 이름과 직책, 행위의 맥락을 함께 남기는 방식은 역사적 판단의 인프라를 깔아 둡니다. 누가, 언제, 무엇을 했는가. 열쇠는 ‘우연히’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기억하는 습관입니다. 그 습관이 다음 세대의 윤리 감각을 자라게 합니다.
기억의 제도화: ‘정신일본인’에서 법으로
2018년, 난징 항일 유적 앞에서 일본 군복을 입고 일장기를 든 중국 청년들의 사진이 퍼졌습니다.
그 사건은 곧 ‘정신일본인’이라는 신조어를 낳았습니다. 정신이 일본인과 같은 중국사람.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하고 자국의 항일 영웅을 조롱하는 이들을 향한 사회적 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낙인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중국 정부는 곧 ‘영웅 열사 보호법’을 제정했습니다.
이 법은 영웅·열사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행위를 형사 처벌할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온라인상에서의 역사 왜곡 게시물 삭제, 검찰의 공익소송 제기, 기념 시설 훼손 시의 행정 처벌 등 다층적 대응체계를 마련했습니다. 이어 강소성 조례가 추가되어 구체적 행위 유형으로 남경 대학살 부정, 항일 유적지에서 일본 군 상징물 사용, 희생자 명예 훼손이 명시되었습니다.
이 일련의 조치는 사회의 분노를 법의 언어로 바꾸는 과정이었습니다. 감정의 폭발을 제도 속에 가두고, 기억을 윤리적 규범으로 고정하는 시도였습니다. 이렇게 중국은 “잊지 않음”을 감정이 아닌 국가적 의무로 만들었습니다.
Ⅳ. 여운 — 차갑게 남긴 것의 온도
전시관을 나서는 길, 유리 케이스에 마지막으로 시선이 머뭅니다. 금속의 표면이 차갑게 빛나고, 그 차가움 속에서 사람의 체온이 느껴집니다. 바람이 지나가며 작은 종이를 들추고, 그 위의 글씨가 잠깐 흔들립니다.
기억은 분노가 아니라 윤리라는 문장이 조용히 가슴에 내려앉습니다. 나는 하얼빈 송화강변을 잠깐 걸었습니다. 강은 오늘도 묵묵히 흐릅니다. 진실은 차갑게 보여야 뜨겁게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