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도구 : 철학 3,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 - 행복, 자유, 미덕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책이다. 누적판매로 200만 부를 돌파하면서 한때 서점가를 휩쓸었고, 수많은 독자들이 ‘정의’라는 단어에 끌려 책을 손에 들었다. 실제로 책 좀 읽는다는 사람치고 『정의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다.
이 책이 왜 그렇게 많이 판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겠으나, 그 이유 중 하나는 한국 사람들이 ‘정의’에 대해 갖는 특별한 감정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분노의 감정 속에서, 불공정의 원인이나 해결책 등을 알아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물론 더 큰 원인은 유행을 잘 따라가는 한국인들의 집단주의적 성향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쨌든, 지난번 글에서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트롤리 딜레마'에 대해서도 인용했으니, 이 책을 가볍게나마 한번 다루면서 '정의'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이 책이 있는지 물어보았더니, 좀 과장해서 절반 정도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읽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모두가 침묵이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1장 '정의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제일까?' 조차 읽지 못하고 책꽂이에 모셔 두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 책을 그렇게 읽기 어렵게 만든 것일까? 번역의 문제인가?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굳이 원인을 찾아보면,『정의란 무엇인가』는 독자의 기대와는 달리 '정의'가 무엇이라고 확실한 답을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책의 제목과는 달리, 정의가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리하지 않는다.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계속 질문만 던진다. 온갖 예시의 홍수 속에서, 그 잘난 철학자들의 수많은 말들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빨리 답을 찾고 싶은 한국인들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짜증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정의가 도대체 무엇인데?
하지만 조금만 말을 바꾸면 이 책은 그리 복잡한 내용은 아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 사회가 생산하거나 소유한 부, 한마디로 우리의 '돈'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을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더 많이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때문에 갈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갈등의 상황만 있고 중재하거나 타협하는 기준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공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분배의 합리적 기준’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그 고민의 결과가 『정의란 무엇인가』일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돈(자본, 이권, 소유 등)을 나누는 기준으로 세 가지를 차례대로 소개한다. 바로 ‘행복’, ‘자유’, ‘미덕’이다. 사실 분배를 위한 방법은 이 세 가지 외에 더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정말 아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먼저 '행복'이다. 이 기준은 제레미 벤담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에서 출발한다. 가능한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분배 방식이 정의롭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한 두 사람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논란이 있다. 그리고 행복의 양이나 인간의 목숨값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도 논란이 되기도 한다.
다음은 '자유'다. 자유는 우선 자유지상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각자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벌고, 소비할 수 있는 타고난 권리가 있다는 입장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자유롭게 노력을 하면, 그게 전체의 이익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자유'를 강조하는 철학자도 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공리주의를 비판하며 '자유'를 강조하는 칸트 같은 철학자도 있고, '자유'를 강조하되 먼저 기회가 최대한 공정해야 한다는 롤스의 생각도 여기에 해당한다. 어쨌든 이러한 입장에서는 개인의 권리를 더 강조하니, 국가의 간섭이나 세금 징수는 최소화되어야 한다거나 불필요하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미덕'이다. 이 기준은 고대 철학자들의 주장에 기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에는 고유한 목적, 곧 '텔로스'가 있으며,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보기에 좋은 것이며 정의롭다는 것이다. 예컨대 피리의 주인은 피리를 가장 잘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돈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피리의 목적과 주인은 분명해 보이는데, 돈의 목적은 또 애매하기는 하다. 그래서 이를 조정하고 명확히 정리하는 중재자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위와 같은 설명은 여전히 추상적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과 수업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정의'에 대해 설명하려고 해 본다.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도 다른 거 없다. 행복, 자유, 미덕의 개념을 소개한 뒤,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사례를 들면서,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지 계속 질문하는 내용이다.
“우리 반이 이번 체육대회에서 1등을 해서 100만 원의 상금을 받았다고 가정하자. 그럼, 이 돈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가장 정의로운 방법일까?”
이 질문에 아이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실제 자신이 충분히 경험했거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가장 많은 학생들이 내놓은 의견은 '그냥 똑같이 나누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복잡하거나 별 것도 아닌 일로 갈등하는 게 싫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자신의 기여도가 높지 않기에, 적당히 1/n 하는 걸 선호한다. 대부분 결론이 이렇게 난다. 그럼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한번 더 질문한다.
“그럼 너희들은 공산주의자를 어떻게 생각하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사람을 '빨갱이'라고 하던데... ”
이 말에 아이들은 뜨끔한다. 평소에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막상 '정의'를 묻는 질문 앞에서는 본인의 생각과 다른 답을 했다는 것을 눈치채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OOO은 빨갱이'라는 농담과 함께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난다. 그러다 보면, 학생들 중 일부가 손을 들고 말한다.
“체육대회 날에 게임방에 놀러 가서 참여도 안 한 친구까지 상금을 주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열심히 뛰어서 우리 반이 1등을 하도록 기여한 애들에게 더 많이 줘야 합니다.”
이 말은 명백하게, 개인의 능력에 따라 돈을 더 벌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자유'에 기반한 관점이다. 사실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는 학생들이 상당히 많다. 아이들은 무임승차 하는 아이들에게 불만이 많으며, 또한 현재 교육시스템의 기반인 '능력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실제 고등학교 교육은 철저하게 능력주의에 기반한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다니며,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운동을 잘하는 아이들이 상금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어야 한다. 그럼 나는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다시 묻는다.
“좋다! 그럼 우리 반이 1등을 하는데 큰 기여를 한 친구에게 얼마를 주는 것이 좋을까? A에게 80만 원을 주고, 나머지 29명이 20만 원을 나눠가지는 건 어때?”
이 제안에 아이들은 잠시 고민한다. 한 친구가 80만 원을 다 가져간다는 것이 좀 과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한 사람이 너무 많은 금액을 가져가는 것 같으니 조금 줄이면 좋겠다는 타협안을 내기 시작한다. 또는 A가 받은 상금 일부를 학급을 위해 다시 쓰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때 이런 질문을 다시 던진다.
“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더할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전 세계를 기준으로 해도 상위 1%가 부의 50%를 차지하고 있거든. 우리나라의 프로 야구 구단에서도 어떤 선수는 80억을 받고, 다른 선수는 5천만 원을 받는다고도 하더라고, 어때 이건 정의로운가?”
이 질문에 아이들의 반응은 반반으로 갈린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 거라면서 이러한 차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또 의외로 많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영웅으로 생각하는 스타들의 천문학적인 연봉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한다. 자기와 관련이 있는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좀 과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스포츠 스타들의 연봉과 주급에 대해서는 또 상당히 관용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자 어쨌든, 상금 100만 원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좋은가라는 질문에 아이들은 위에서 말한 두 가지 관점, 행복과 자유의 관점은 쉽게 제시한다. 하지만 세 번째 ‘미덕’의 관점은 잘 나오지 않는다. 학생들은 “제비 뽑기”나 “가위바위보”를 제안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능력이나 운에 따른 분배로 자유주의적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결국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또 던진다.
“체육대회 날 축구하다 다친 철수가 수술비로 100만 원이 나왔대. 그러면 이 돈을 철수에게 주는 건 어때?”
많은 학생들이 동의한다. 자신들이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들이라는 듯이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동의한다. 이것이 바로 ‘미덕’의 관점이다. 지금 이 돈을 가장 필요한 사람을 위해 쓰는 것도 보기에 좋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도 문제가 있다. 이의를 제기하는 녀석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철수에게 기부하는 것에 동의하는 반면, 장난기 많은 녀석들 하나 둘 끼어든다. 철수네가 생각보다 부자라고 말하거나, 또는 자신이 돈이 더 필요하다고 항변한다. 사실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상금 100만 원이 어떻게 쓰이는 것이 가장 보기에 좋은지, 어떤 것이 도덕적인지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누구나 돈이 다 필요하다.
이런 걸 보면, 교실에서 상금 100만 원을 나누는 것조차 힘든 게 현실이다.
이런 식으로 정의의 기준을 학습한 학생들은, 정의가 결국은 이익의 분배에 대한 다양한 기준임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정의가 결국은 이익을 나누는 갈등의 문제라는 것을 알면, 아이들은 개인의 갈등 문제나 사회적 논쟁에 대해서도 조금은 확장해서 사고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남학생들에게 가장 민감한 ‘페미니즘’ 논쟁도 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페미니즘' 논란의 본질도 결국은 우리 사회의 이권을 두고 남녀가 갈등하는 것임을 알게 되면, 조금은 더 합리적인 관점에서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정치의 영역으로 사고를 확장하면, 보수와 진보의 정치에 대해서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세금의 부과 비율이나 국가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정당에 따라 왜 달라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정의란 무엇인가』의 개념을 설명한 다음, 힘들고 어려운 내용이 많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냥 넘겨도 좋으니, 천천히 다시 읽어보라고 권한다. 책에 소개된 수많은 사례들을 놓고 하나하나 기준을 놓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다 보면, 자신만의 철학과 논리도 탄탄해질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문해력도 높아져서 국어영역도 성적이 쑥쑥 올라갈 것이라고 유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책 보다 재미있는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책은 억지로라도 읽혀야 한다. 책 보다 재미있는 게 많은 세상에서 알아서 읽으라는 말은, 책을 읽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아주 어릴 적에야 억지로 읽히면 역효과가 날 수 있겠지만, 이미 책을 포기한 아이들에게는 역효과를 염려할 필요도 없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다.
책이 정말 좋은 약이라면 억지로라도 읽혀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