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허무주의
오랜만에 1년 전에 읽었던 [이방인]을 다시 꺼냈다. [이방인]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알베르 카뮈의 수려한 표현들은 부담스러운 미사여구 없이 아름다운 색채의 1940년대 알제리의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알제리 교외의 마랭고 양로원과 알제리의 수도 알제의 색채가 나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알베르 카뮈의 인간에 대한 심오한 고뇌는 처음 읽고 나서는 잘 느끼지 못했다. 흑백으로만 보았던 1940년대의 모습이 모네의 그림처럼 화려하고 인상적인 색채로 덮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 오늘 다시 읽었을 때, 이제 그가 어떤 말을 남기고 싶었는지 다시 곱씹을 수 있게 되었다.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굉장히 수동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마리의 결혼 제안에도 자신은 어떻게 되는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 수동적이고 만사가 귀찮은 듯 보이는 뫼르소가 홀로 권총을 들고 가 아랍인을 쏘는 모습은 어떤 이질감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뫼르소를 수동적인 인물로 보는 것이 오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뫼르소는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라 이미 세상의 부조리를 깨닫고 허무를 느끼는 사람인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내지 못하는 바보가 아닌, 세상의 원리를 깨달은 천재였다.
'부조리'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법, 국경과 같은 사회적 약속은 그저 약속일뿐이다. 국경이라는 것이 물리적인 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런 믿음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다이아는 그저 돌멩이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 가? 단순한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믿음 때문에 우리는 부조리를 겪는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해 빈부격차가 생기고, 사회가 정한 성공에 따라 불쌍하게도 달려간다. 뫼르소는 죽음에 가까워지자,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그런 부조리함에 분노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는 세상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기에 세상의 이방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알베르 카뮈는 뫼르소의 삶과 정신이 옳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뫼르소의 행동만 보아서는 절대로 이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니체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뫼르소는 단순히 수동적 허무주의자일 뿐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에 표현된 자신의 사상을 후속작인 [시지프 신화]에서 드러냈다. 카뮈에 따르면 일단 뫼르소는 허무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카뮈는 뫼르소의 삶을 이상적인 삶이라고 본 건 아닌 것 같다. [이방인]은 일종의 우화라 생각한다. 부조리함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뫼르소라는 캐릭터를 통해 카뮈는 무의미라는 세상의 부조리는 당연한 것이고 수긍해야 하지만, 이런 반복되고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도 가치를 찾으려는 그런 인간 실존의 의미를 말하고 싶은 것이라 생각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이런 면에서 부조리한 즐거움의 전형은 다름 아닌 창조이다." 세상은 끝없이 부조리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회가 정해 놓은 부조리에 따라가기보단, 새로운 길을 창조하는 것이 창조 능력을 가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이다. 마치 영화 '트루먼쇼'의 트루먼처럼 부조리한, 만들어진 세상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문을 열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가 이런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 방법은 스스로의 문을 창조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