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모시고 산다는 건 어려워

by 봄날의춘천저널

제주 이주하고 나서 시어머님을 모시고 3년을 같이 살았다. 결혼 초기부터 헌신적으로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잘해주신 어머님. 항상 손에 물 마를날 없이 식당일을 하면서 모은 돈을 아들 휴대전화매장 마련, 자동차구매비용까지도 모두 어머님께서 돈을 마련해 주셨다. 아들 며느리 좋아하는 반찬을 매번 해주셨고, 첫 손주가 태어나니 매주 집에 오셔서 집안일까지 해주시는 분이었다. 휴대전화 사업을 접고 제주 이주 결심은 오롯이 시어머님 도움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어른을 모시고 산다는 건 나에게 그다지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하여 작은 아빠, 나를 포함하여 오 남매까지 학교 다닐 때 가족이 몇 명이냐고 물어보면 10명이라고 대답했다. 다들 헉하고 놀라는 모습에 나도 당황한 적이 있었다. 다들 이렇게 사는거아니냐고. 그 시절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던 할아버지 덕분에 난 여동생 3명, 남동생 1명이 있다. 식사부터 간식까지 집에서 할아버지는 어른이니깐 먼저 식사하시고 챙김을 받았다. 할머니와 엄마를 보며 나도 어른 챙김을 자연스럽게 배운 것 같았다.

제주이주 첫 집은 노형동 4층 다가구 건물 1층에 연세로 집을 구했다. 가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었다. 결혼 초기 시어머님이 자주 집에 오셨지만, 같이 산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편은 가게 실내장식 공사를 하러 가고, 두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면 나와 시어머님 둘뿐이었다.

시어머님은 산악자전거를 비롯하여 등산, 걷기 등 취미 부자로 모임도 많아 적극적이고 술도 잘 드시고 나와 정반대 성향을 가시진 분이다. 체력도 나보다도 더 좋을것 같다. 명품도 좋아하시고 옷, 신발 등 귀걸이, 반지, 팔찌, 발찌까지 패션에도 감각이 뛰어나셨다. 그에 반면 나에겐 너무나도 벅찬 분이기도 했다.

결혼 초기 남편이 나이키 에어 맥스 운동화를 사준 적이 있다. 형광과 파란색이 적절하게 들어가서 이쁘다고 하면서 사준 신발. 시어머님이 그 신발을 보시고 마음에 드셨는지 결국 사서 며느리와 커플 신발을 신고 다녔다. 그나마 나보다 한 치수 발이 컸던 시어머님이기에 같은곳에 가더라도 내 신발을 찾을수 있었다. 만약 내가 시어머니 입장 였다면 며느리와 똑같은 신발을 사달라고 했을까.


노형동에서 가까운 민속 오일장을 시어머님과 5일마다 갔다. 매달 2일, 7일 끝자리는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다. 시어머님은 오일장 마니아였던 사실을 그땐 몰랐다. 오일장이 되면 구경삼아, 운동 삼아, 오일장을 가지 않으면 몸이 아마도 두드러기 나시는 듯 매번 발도장을 찍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곧잘 잘 따라 나셨다. 남편은 오일장 가는 것을 싫어하니 내가 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싫어하는 이유를 난 알아버렸다. 시어머님은 매번 나물 한 바구니를 살 때마다 돈을 깎고 또 깎았다. 한 바구니에 5천 원이라고 하면 단돈 천 원이라도 깎아야 사 왔다. 그런 실랑이를 과일이든 채소든, 나물이든 살 때 마다. 그 옆에 있던 나는 곤욕스러웠다.


제주도 특히 오일장 아주머니들. 시어머님도 기가 세다고 생각했는데, 제주도만큼은 이길수 없었다. 억척스러웠고 악착스러운 모습들. 이런 모습 정말 처음이었다. 친정엄마는 단 한 번도 시장가서 돈을 깎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넋을 놓았다.

시어머님은 목욕탕 가는걸 좋아하셨다. 두 아이 5살,3살 무렵에 같이 목욕탕을 가게 되었다. 며느리 입장으로사실 목욕탕 가기 좀 꺼렸으나, 두 아이를 또 맡길 수가 없기에 나도 옷을 자연스럽게 훌렁훌렁 벗으며 같이 목욕탕을 갔다. 제주도 목욕탕은 특이했다. 밖에 노천탕이 있고, 바다가 보였다. 시원스럽게 탁 트인 바다를 보며 탕 속에 있으니, 그 순간만큼은 가슴이 뻥 뚫렸다.


어릴적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자연스럽게 모시고 사는 모습을 보고 커왔기 때문에 제주이주하고 나서 시어머니와 같이 산다는건 익숙했다. 한해,두해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겪고보고 살아보니 어른을 모시고산다는건 어려운 일이다. 사랑하는 남편의 부모님이지만 그 동안 살아온 세월도 있으니 마음 조차도 힘든일이 있었다.


시어머니와 나 사이의 시기 적절한 적정선을 유지하며 내가 해야 할 도리를 했다. 그 적절한 선을 찾기가 시간이 흐를수록 히미 해 지지 않도록 내가 옳바르게 서 있어야지. 어른을 모시고 사는건 어려운일이라는건 겪어본 사람만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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