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공부를 막 잘하진 않았어도 웬만큼 했다. 수능 보고 이것저것 정리해보니 인서울이나 지방 국립대 정도를 가볼 만했었다. 당장 돈은 벌어야겠다만 해놓은 게 아까워서 대학을 가는 걸로 맘을 잡았다. 당연히 사립은 어림없었다. 국립대 중에서도 돈 한 푼 안들 수 있는 해양대를 입학했다. 취업률이 높았고 졸업 후 산업요원처럼 병역 특례를 받으며 빠르게 돈을 벌 수 있었다. 대학교 생활도 열심히 해서 장학금 받고 다녔다. 군대 같은 학교 생활을 마치자마자 취업이 되었다. 항해사가 된 것이다.
당시의 나는 투자 실전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다. 먹고 죽을 돈도 없는 흙수저 대학생이었다. 그래도 투자 공부는 타 또래들보다 많이 한 상태였다. 일 시작하면 애초부터 돈 잘 모아 1억 시드머니 만들 생각 했고 실전 투자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취업이라고 한 기업은 사무실에 출근하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컨테이너선에 올라 8-9개월 바다 위를 다녀야 했다. 한국에 없는 것이 아니라 땅에 없는 것이다. 핸드폰도 거의 안된다.
그럼 어떻게 했을까? 보험에서 절충안을 찾았다. 학교 다닐 적에 업계 선후배 사고소식을 여럿 접했기 때문에 생명보험을 드는 동기들이 많았다. 일반적인 보험회사에서는 선원에게 보험을 잘 안 들어준다. 위험한 일터이기 때문이다. 졸업 선배 중 선원 보험으로 특화하여 우리 출신들 보험을 해주시는 분이 계셨다. 그분을 통해 보험을 들고 펀드 투자도 계약하게 되었다. 초심자 흙수저였던 나는 그렇게 첫 투자에 뛰어들게 되었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어리고 멍청했던 난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그 선배님은 적어도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컨테이너선에 올랐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굴한 시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뱃사람들은 거칠다. 말도, 행동도, 생각도 그렇다.
괴물과 싸우려면 괴물이 되선 안 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 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니체
길이 300미터 폭 40미터 안의 철판 덩이에 아홉 달간 갇혀 항해와 갑판 작업을 했다. 2차원 인생이다. 모든 것이 중장비이고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다. 배는 무겁고 차가운 쇠와 철로 이루어져 있다. 사고 나면 최소 중상에 병원을 바로 갈 수도 없다.
3년간의 수면부족과 고립된 생활,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의한 신경과민으로 나는 망가져갔다.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끼리 반년이 넘게 동고동락한다. 또는 서로 쥐 잡듯 싸우며 지낸다. 작은 통에 쥐를 여럿 넣어서 두면 서로 물고 뜯어 죽이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후자가 대부분이다. 하루하루가 그렇고 여자 친구, 마누라 자주 도망간다. 그래서 뱃사람들이 그렇게 술 담배에 절어 산다.
배를 타다 선원 교대가 된다. 한 달 내지 두 달의 휴가를 준다. 그때마다 엄마를 보면 한 줌 한 줌 늙어 있었다. 동생은 듬성듬성 키가 커져있었다. 잔뜩 헤어진 몸을 조금 추스르고 나면 회사에서 연락이 온다. '다음 배는 언제입니다. 준비하세요.' 한다. 그러면 다시금 시한부 인생이 된다. 속절없는 담배만 태우다 간다. 노예처럼. 무식하게 큰 캐리어와 배낭을 가지고 바다로 나가는 날, 엄마는 울었다. 늘 뉴스에서 사고소식은 나지 않을까 노심초사였다. 항상 머리맡에 휴대폰을 두고 주무셨다고 한다.
친할머니 장례식장도 산소도 못 갔다. 나는 남중국해 한가운데 떠가는 큰 쇳덩어리가 뿜어내는 매연 냄새와 함께 칠흑 같은 수평선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청춘 가장 꽃다운 나이에 지옥의 회전목마였다. 3년 동안 저 짓을 반복했다. 전역이 될 때까지는 꼼짝 마라였다.
대학교 다닐 때 이미 예상했다. 사지나 멀쩡히 해서 돌아오면 성공한 거라고. 그래서 직접투자는 아예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저런 폭풍에 휘말린 삶을 사는데 투자 마인드셋이 건강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아주 맞는 판단이었다.
급여는 또래에 비해 많은 편이었다. 달에 평균적으로 400만 원 정도 저축이 가능했다. 대부분의 돈은 계약한 펀드 계좌로 자동이체가 되었다. 보험 회사에서도 펀드를 한다. 다행스럽게 그 펀드 역시 s&p500과 russell 1000 등 대부분 미국 지수를 추종토록 설계된 상품이었다. 배를 몇 번 탈 동안 느린 듯 안 느린 듯 잘 올라갔다.
그러다 코로나가 덮쳐왔다. 당시 나는 세상 살면서 처음으로 금융적인 위기를 맛보게 되었다. 주가는 자유낙하를 시작한 것 같았다. MDD를 낮추기 위해 이 지수 저 지수로 섞어놓은 그 펀드마저도 거의 -20%가 찍히는 걸 내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돈이 증발되려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정수리가 지끈거렸다. 지금 와서는 너무너무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의 나는 진정한 투자 초심자 흙수저였다. 마인드셋에서 흙수저 냄새가 많이 났다는 말이다. 내 돈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 선배님을 참 많이도 귀찮게 만들었던 것 같다. 글 쓰면서 그 기억하면 그저 웃기기만 하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분의 외부적인 컨트롤 덕분에 중간에 계약을 해지하지 않게 되었다. 한 달, 두 달 시간은 흘러갔고 코로나는 끝날 줄 몰랐다. 그 역병이 해결이 돼야만 주가가 올라가는 것일 줄로만 알았다. 순진했다.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듯, 연준에서 무제한 양적완화를 실시했고 코로나와는 무관하게 모든 자산 가격은 일제히 상승했다. 그래서 몇 년은 들고 있었다. 지금은 펀드를 정리하고 득을 보았다. 그렇게 나는 생애 첫 경기 순환을 내 돈으로 경험했다. 똥인지 된장인지 맛을 직접 보고 마인드셋이 훨씬 발전했다. 지금도 그 선배님을 보면 참 부끄럽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1억을 번 것이다. 3년 만에.
나의 경우, 쓴 약을 한입에 들이 삼킨 것과 비슷하다.
저 종합적인 고통은 진실로 흙수저 태생만이 철저하게 느낄 수 있는 사무치는 고통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경제적 자유가 중요하다지만, 나처럼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빠르게 모아라 제시하지는 않겠다.
정말 너무나 힘들고 위험했기 때문이다. 나도 저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음악이 시작되었고 끝날 때까지 춤을 추어야만 했다.
오늘도 사지 멀쩡히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하늘에 감사하고 조상께 감사한다. 내가 글을 쓸 수 있게 손, 손가락이 달려있다는 것에도. 오늘도 내 보잘것없는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작가로 나서게 된 이유는 다른 또는 미래의 흙수저들이 내가 겪어온 시행착오를 거름 삼아 더 영리하고 편안하게 경제적 자유의 길로 가도록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진정으로 당신과 당신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 어떤 외압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당신들의 삶을 주관할 수 있길 바란다.
가장 최근 10년간 10대, 20대의 나이로 흙수저 삶 속에서 파이어족을 목표로 역경을 꾸역꾸역 헤쳐나가고 있다. 그래서 독자 여러분의 진짜 주머니 사정에 있어 실용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