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소풍날

by roun

정은에게 남편의 울타리는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 그건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얻게 된, 처음으로 누군가의 보호 아래에 들어왔다는 감각 때문이었다.

정은이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정은의 엄마는 외도 사실을 아빠에게 들켜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집에서 쫓겨났다.

한 달쯤 지난 뒤, 자식들이 눈에 밟히다며 엄마는 아빠에게 용서를 빌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외도로 깨진 부부간의 금은 회복하기 어려웠다. 결국 엄마는 다시 집을 나갔다.


정은과 남동생 정민은 엄마가 미처 챙기지 못한 옷들을 끌어안고, 옷에 밴 냄새를 코에 묻은 채 매일같이 울었다.

아빠는 두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밤낮없이 일을 했다.

아빠가 재혼한 뒤로는 얼굴을 보기가 더 힘들어졌다.

정은은 정민보다 고작 세 살 많은 누나였지만, 동생만큼은 엄마와 아빠의 부재로 생기는 결핍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빠가 교통비라며 회수권을 사라고 돈을 주면, 정은은 회수권 대신 돈을 전부 천 원짜리 지폐로 바꿔두었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는 정민의 교복 바지 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을 슬쩍 넣어주며 꼭 같은 말을 했다.


“정민아, 학교 끝나고 친구들이 음료수나 아이스크림 사 먹으면 남 먹는 거 쳐다보지 말고 너도 꼭 사 먹어. 알았지?”


누나의 말을 들은 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정민을 보내고 나면, 정은은 학교까지 왕복 1시간 30분 거리를 매일 걸어 다녔다.

정은은 늘 신경이 쓰였다.

정민이 밖에서 ‘엄마 없는 아이’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그래서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모조리 찾아다녔다.

첫 월급날, 정은은 정민에게 새 옷과 새 운동화를 사 주었다.

할머니는 유독 정은을 못마땅해했다.

정은의 뒷모습만 봐도 ‘지 애미랑 뒷태가 똑같다’며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집안에 남아 있던 엄마 사진은 죄다 바늘로 찔러 놓았다.


정은은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쌀을 씻어 압력솥에 밥을 안치고, 욕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손빨래를 했다.

할머니는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며 불도 켜지 못하게 했고, 수도세가 아깝다며 세탁기도 쓰지 못하게 했다.

겨울이면 난방비를 아낀다며 보일러를 틀지 않아 집 안 공기가 늘 서늘했다.

정은에게 겨울은 가장 힘든 계절이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두툼한 겨울옷을 비벼 빨아야 했기 때문이다.


정은의 아빠는 삼남이녀 중 장남이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 다섯 아이를 키운 할머니에게 아빠는 아들이자 남편 같은 존재였다.

할머니는 뭐든 아껴두었다가 아빠가 집에 오면 아빠에게만 내주었다.

아들인 정민의 상황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삼계탕을 끓이면 닭은 늘 두 마리였고, 과일을 사도 항상 두 개였다. 어느 날 정은은 냉장고를 열었다가 접시에 놓인 탐스러운 홍시 두 개를 보았다. 너무 먹고 싶은 마음에 할머니 몰래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들켜 호되게 혼이 났다. 그날 이후 정은은 할머니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정민의 소풍 날이 다가오자 정은의 걱정은 깊어졌다.

김밥을 한 번도 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작은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은아, 큰 골목 끝에 새로 생긴 마트로 얼른 뛰어 와!”


정은은 작은엄마가 자신의 걱정을 알아준 줄 알고 고마운 마음에 한달음에 뛰어나갔다.

작은엄마는 카트에 김밥 재료와 음료수, 값비싼 수입 과일을 가득 담았다.

정은은 그게 정민의 도시락 준비인 줄 알고 마음을 놓았다.

양손 가득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에도 힘든 줄 몰랐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 작은엄마는 현관 앞에 음료수 두 병만 내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정은아, 고생했다. 내일 민호 소풍 가는데, 선생님 도시락까지 싸려면 일이 많아서.”


작은엄마가 떠난 뒤, 정은은 다시 마트로 향했다. 조금 전 카트에 담겼던 재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가진 돈에 맞춰 김밥 재료를 다시 골랐다.


새벽 네 시.

알람 소리에 정은은 벌떡 일어났다.

새로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김밥 속 재료들을 준비했다.

김을 펼쳐 고슬고슬한 밥을 고르게 펴 발랐다.

준비해둔 재료를 하나씩 올려 조심스럽게 말았다.

모양이 어설퍼 정은은 속으로 여러 번 망했다고 중얼거렸다.

직접 만든 도시락을 들려 보냈지만 마음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정민이 친구들 앞에서 도시락을 꺼낼 때 혹시 창피해하진 않을지, 하루 종일 그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정민은 도시락을 말끔히 비워 돌아왔다.

정은은 빈 도시락 통을 닦으며, 그제야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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