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늦어도 괜찮아, 50대 파리 유학생이 되다
"당신은 그곳을 그냥 지나쳤나요?"
손미나 작가의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를 읽다가 멈칫했습니다. 책장을 넘기던 손끝이 스르륵 멈춰 섰어요.
"세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라고? 이게 그렇게 유명한 곳이었다고?"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아, 부끄러워라. 파리에 살면서도, 그것도 노트르담 앞을 수없이 오가면서도, 저는 그 보물 같은 서점을 그저 '사람 많은 관광지 서점' 정도로만 여겼던 거예요.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저기 왜 저렇게 줄을 서지?' 하고 고개만 갸웃거렸죠. 그리고는 옆 카페의 예쁜 간판을 찍느라, 조금 더 오른편 성당의 첨탑을 담느라 바빴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습니다. 문학의 성지를 눈앞에 두고도 그냥 스쳐 지나갔던 50대 유학생이라니. 하지만 괜찮습니다. 늦었지만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다시 갔습니다. 이번엔 제대로, 천천히, 가슴 뛰며.
뚜벅뚜벅, 생미셸 역을 빠져나와 센느강을 따라 걸었습니다. 저녁 노을이 강물에 반짝반짝 부서지는 시간. 멀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이고, 그 건너편으로 초록빛 간판이 눈에 들어왔어요.
"Shakespeare and Company"
이미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6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요. 하지만 이번엔 달랐어요. 그 줄 속에 제가 있었으니까요. 설레는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며, 저는 이 서점의 이야기를 곱씹었습니다.
서점 입구 옆에는 무명 화가들이 자신의 그림을 펼쳐놓고 있었어요. 파리의 골목길, 센느강의 석양, 노트르담의 첨탑... 그림마다 파리의 낭만이 묻어났습니다.
실비아 비치. 이 모든 이야기는 이 용감한 여성에서 시작됩니다. 1919년, 그녀는 파리 6구에 작은 영어 서점 하나를 열었어요. 그저 책을 파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아지트였고, 안식처였고, 영감의 샘이었죠.
헤밍웨이가 드나들고, 제임스 조이스가 커피를 마시며,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친구들과 문학을 논하던 곳. 헤밍웨이는 훗날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에서 이 서점을 신화처럼 묘사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누구도 나에게 그녀만큼 친절하지 않았다"고요.
무엇보다 놀라운 건, 실비아 비치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출판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검열 때문에 출판이 불가능했던 그 문제작을요. 1922년, 이 작은 서점에서 문학사의 한 페이지가 쓰여진 거예요. 비치는 조이스의 천재성을 알아본 최초의 출판인이었습니다.
전쟁이 휩쓸고 간 후, 서점은 문을 닫았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1951년, 조지 휘트먼이라는 미국인이 지금의 자리, 센느강 바로 옆 37번지에 새로운 서점을 열었습니다. 17세기 수도원 건물을 개조한 이곳은 처음엔 '르 미스트랄'이라는 이름이었죠. 그러다 1964년,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실비아 비치를 기리며 지금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휘트먼은 말했습니다. "이 서점은 책방으로 위장한 사회주의 유토피아다." 헨리 밀러는 "책들의 원더랜드"라고 불렀고요.
그리고 이곳엔 특별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텀블위드(Tumbleweed)' 프로그램. 바람에 날리는 회전초처럼 떠돌이 작가들에게 서점에서 잠잘 수 있는 자리를 내주는 거예요. 조건은 단 세 가지. 하루에 책 한 권 읽기, 서점 일 돕기, 그리고 한 페이지짜리 자서전 쓰기.
젊은 이선 호크도 16살에 이곳에서 잤다고 하더군요. 지금까지 3만 명이 넘는 작가들이 책장 사이 좁은 침대에서 꿈을 키웠습니다.
서점 앞에 서서 문득 떠올랐습니다.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봤던 그 서점이 바로 여기였구나.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셋에서 이선 호크가 책 낭독회를 하며 줄리 델피를 다시 만나던 곳도 여기였고요. 노라 에프론의 줄리 앤 줄리아에도 이 서점이 잠깐 스쳐 지나갔죠.
2003년에는 Portrait of a Bookstore as an Old Man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93세였던 조지 휘트먼의 일상을 담은 영화예요. 그는 팬케이크 반죽으로 카펫을 붙이고, 촛불로 머리를 자르는 괴짜 노인이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문학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반짝였습니다.
삐그덕. 문이 열렸습니다.
와, 이건 진짜... 미로예요. 책으로 만든 미로. 좁은 통로를 따라 책들이 빼곡빼곡, 천장부터 바닥까지 책, 책, 책. 오래된 나무 선반에서 풍기는 고즈넉한 냄새, 먼지와 종이와 시간이 뒤섞인 그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어요.
1층은 신간과 베스트셀러가 주를 이뤘습니다. 벽마다 휘트먼의 철학이 적혀 있었어요. "Be Not Inhospitable to Strangers Lest They Be Angels in Disguise(낯선 이에게 불친절하지 말라, 그들이 변장한 천사일지 모르니)."
삐걱삐걱, 나무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습니다. 계단 양옆으로도 책이 쌓여 있어서 조심조심 발을 디뎌야 했죠. 2층은 더 아늑했습니다. 문학, 시, 희곡 섹션. 낡은 가죽 소파들이 곳곳에 놓여 있고, 사람들은 그곳에 파묻혀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였습니다.
"어머!"
작은 탁자 위, 전면 디스플레이에 한강 작가님의 책이 놓여 있는 게 아니겠어요?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그리고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과 함께 비치된 신간들. 파리 한복판, 문학의 성지 같은 이곳에서 우리 작가의 이름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손을 뻗어 채식주의자 영문판을 꺼내 들었어요. 표지를 쓰다듬으며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한 여성 작가의 목소리가 이렇게 세계로 퍼져나가는구나.' 같은 한국인으로서, 같은 여성으로서, 그리고 50이 넘어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으로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2층 구석 창가로 갔습니다. 사실 서점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조심스럽게 몇 장만 담았어요. 창밖으로 센느강이 유유히 흐르고, 저 멀리 노트르담의 첨탑이 석양빛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낡은 벨벳 소파에 앉았습니다. 옆에는 백발의 할머니가 안경을 고쳐 쓰며 시집을 읽고 계셨어요. 맞은편에는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죠. 우리는 서로 눈인사를 나눴습니다. 말없이, 하지만 따뜻하게.
누구 하나 떠들지 않았어요. 그저 책장 넘어가는 소리, 스르륵, 바스락, 그리고 가끔 한숨 같은 숨소리만 들렸습니다. 바깥 세상의 소음은 이 두꺼운 책들이 다 흡수해버린 듯했어요.
시간이 멈춘 듯했어요. 아니, 시간이 겹쳐지는 듯했습니다. 1920년대 헤밍웨이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 지금 제가 앉아 있는 거예요. 같은 공기를, 같은 설렘을, 같은 고요함을 나누고 있는 거예요.
문득 상상했습니다. 만약 내가 젊었을 때 여기 머물렀다면? 텀블위드가 되어 책장 사이 좁은 침대에서 잠들고, 아침이면 커피 향에 눈을 뜨고, 하루 종일 책을 읽다가 저녁엔 서점 일을 도왔다면? 어떤 글을 썼을까? 어떤 사람들을 만났을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야, 지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야 진짜 책을 읽는 법을 알게 되었고, 진짜 글을 쓰고 싶어졌으니까. 늦었지만 더 깊게, 더 천천히, 더 진심으로 할 수 있으니까.
출구로 나왔습니다. 밖은 이미 어둑어둑했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어요. 센느강 건너편에서는 거리 음악가의 바이올린 선율이 바람에 실려 왔고요.
손에는 서점에서 산 책 한 권. 비치의 회고록 Shakespeare and Company였습니다. 표지에 찍힌 서점 도장이 자랑스러웠어요. 이 도장 하나에 100년의 이야기가, 수많은 작가들의 꿈이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50대 유학생의 고백
파리에 살면서도 몰랐던 것들이 참 많습니다. 아니, 보고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요. 하지만 괜찮아요. 늦어도 괜찮으니까요.
50대가 되어서야 유학을 왔고, 50대가 되어서야 진짜 파리를 보기 시작했으니까요. 늦은 만큼 더 천천히, 더 깊게, 더 감사하게 볼 수 있으니까요.
세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저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늦은 건 없어요.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딱 맞는 때예요."
그렇습니다. 지금이 딱 맞는 때입니다.
주소: 37 Rue de la Bûcherie, 75005 Paris
지하철: 4호선 Saint-Michel 역
노트르담 대성당 바로 맞은편, 센느강 옆
운영시간: 월-토 10:00-20:00 / 일 12:00-19:00
※ 서점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 사람이 많으니 평일 오전 방문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