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렬독서
낮 동안 틈틈이, 그리고 잠들기 전 책을 읽는다.
쉬는 날엔 제대로 앉아 읽고 싶었던 책을 정독한다.
잠들기 전이나 낮에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주로 읽었던 책들 중에서 손에 잡히는 것들을 읽는다.
sns를 하거나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 것 보다 낫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정보의 홍수에서 해방된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를 읽으면 sns 폐해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과잉된 정보는 공허한 개인들의 속빈 강정에 불과하다는.
겨우내 한니발과 카이사르 이야기가 들어있는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다. 실은 혹서기라고 해야하나. 애들레이드에서 1,2월을 났으니.
번사이드 도서관의 한국도서들 중에 구병모가 쓴 <파과>라는 소설도 읽었다. 동명의 영화가 이혜영 주연으로 상영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한니발도 카이사르도 위대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어떤 면에서 그런가를 논하자면 워낙 입체적 조명이 필요한 인물들이라 쉽지 않다.
두 인물의 특징은 다른 인간들에 대한 상상을 초월한 영향력이다.
견고한 대원칙, 뚜렷한 목표, 농축된 근성, 집요함, 건드릴때마다 더욱 견고해지는 결의, 심장을 고동치게 만드는 연설능력, 목숨을 건 용기, 여우의 지혜 등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은 죄다 갖주고 있는 인물들을 탐험하는 일은 흥미진진하다.
한니발은 "관점을 바꾸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을 남겼고
카이사르는 "인간은 보고싶은 것만 본다"는 말을 남겼다.
그래서 한니발은 카르타고 코앞의 지중해를 건너 로마를 공격하는 전통적 전략을 버리고
피레네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쳐들어 가 무려 16년 동안 로마의 전역을 초토화시킨다.
카이사르는 아군이든 적군이든 다른 인간들이 자신들이 보고싶은 것들만 보며 안주할 때 갈리아와 잉들랜드까지 정복해 지금의 서유럽을 디자인한다.
해가 저무는 겨울밤마다 2천여년전에 이들이 누빈 전장의 기록들을 읽다보면 '나는 참 편하게 세상을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의 내면에서는 새로운 계획과 희망이 들끓는다.
봄맞이를 하며 읽은 책들은 한강의 <희랍어 시간>과 <검은 사슴>이다. 노벨상 전에 이미 맨부커상 수상자였던 한강의 전작들이다.
이미 <소년이 온다>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면 알 수 있겠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대단한 몰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봄에 읽을만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절대적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이야기임에는 분명하다.
인간이 만든 문명에 다시 인간이 예속되어 고통받는 상황을 한강보다 잘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꾼이 있었다면 그건 박경리 선생이다.
인간이 AI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마는 상황을 대비하자는 의미에서 문학을 방어기재로 삼자고 한다면 단연 한강의 소설을 추천하고 싶다.
<대온실수리보고서>는 작가의 경험과 상상력의 산물이라는데, 참 재미있게 읽었다. 연구를 많이 한 흔적이 보이는 소설이다. 서사의 핍진성과 표현의 단호함에서 흥미와 감동이 솟아나는 것 같다.
문화재라는 구체적 실존이 주는 역사성만 생각해봤지, 그것이 어떻게 발견되고 보존되며 때로는 먼지처럼 흐트러져 버리는지 알 수있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파우스트>는 18세기에 추앙받던 셀럽의 상상력을 이해하고 싶어서 읽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던 책이다.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내용을 이해하고 습득하기 위해 유튜브의 힘을 빌렸다. <일당백>에서 정박님의 설명이 <파우스트>의 2부를 읽는 마중물이 되어 주었다.
신과 협상을 하는 악마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는 지식인, 이를 통해 우리 인간들에게 울리고 싶었던 경종의 핵심은 뭘까. 지식이 곧 삶의 지혜가 되지는 않는다. 또 지식와 행동이 일체되지 않으면 지식은 사상누각이 된다. 인간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 따라서 죄악 또한 질과 양의 한계가 없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풍요로움속에서 부족함을 느끼게 되면 더욱 괴로운 법이라는 파우스트의 말처럼 갈망하던 지식을 축적만 하던 인간은 결국, 삶의 지혜를 얻지 못하면서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 괴테가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핵심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