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비탕과 후회의 착각

퇴사 후에 남겨진 사람들

by 글쓰는도야지

며칠 전부터 몸과 마음이 허해졌다.

약해졌다는 느낌과는 달랐다.

설날에 먹은 음식들을 아직도 되새김질할 정도로 배는 두둑했다.

하지만 허하다는 느낌, 그러한 감정이 내 속에서 잔파도를 쳤다.

퇴사를 한 지 3개월가량 지났다.

내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일하던 동료 2명이 퇴사를 감행했다.

그 뒤로도 다른 팀의 사람들이 몇몇 줄퇴사가 이어졌다.

내가 애정을 갖던 그 회사는 (내가 보기엔) 인재들을 많이 잃었다.

그럼에도 회사는 굴러간다.

거대한 자본 시장에서 우리는 그저 나사 하나, 베어링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난 그런 진부한 자본주의의 맹점에 놀아나지 않겠다.

나도 그들을 충분히 부려 먹었다.

매달 월급은 물론 그들의 자본으로 나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데 잘 이용해 먹었다.

그렇게 쭉쭉 뽑아먹었다 싶었데, 한편으론 참 공허한 배부름만 남았다.


나의 뒤를 이어 퇴사한 동료 '리'는 2개월 만에 이직에 성공했다.

축하의 의미로 집에서 갈비탕을 끓여줄 테니 놀러 오라고 했다.

살코기가 많지 않아 탕용으로 따로 빼놓은 LA갈비가 있었다.

아침부터 끓기 시작해 불순물을 계속 걷어주고 찬물을 종종 부어가며 진한 국물을 우려냈다.

간은 국간장 조금과 굵은소금, 그리고 빠지면 섭섭한 다시다와 미원으로 2%를 채웠다.

이른 오후에 이르자 고기는 연해지고 국물은 깊어졌다.

난 환희에 찬 상태로 간을 보았다.

윽.

소금이 범인일까, 다시다가 범인일까.

뭐든 정량보다 많이 들어간 탓에 짠 기가 짙었다.

물을 더 붓기엔 냄비는 이미 찰랑대고 있었고, 옮길 냄비조차 마땅치 않았다.

축하 요리에 대한 나의 열정이 너무 과했던 탓이다.

어쩔 수 없이 난 국물의 절반을 버리고 새 물을 절반이나 또 부어야 했다.

다시 끓이고, 끓이고, 끓이자.

국물 색은 옅어졌지만, 결국 간은 제대로 맞았다.

보기보다 진국이었다.

아마도 남아있던 절반의 국물에 맛이 잘 농축되어 있었던 것 같다.

때마침 동료 리가 도착했다.

난 달걀지단과 쪽파를 썰어 갈비탕 한 상을 제대로 차려주었다.

리는 리액션 부자였다.

나의 수고로움을 어디선가 관찰 예능처럼 보고 왔는지 온몸으로 감탄해 주었다.

그리고 아주 옅은 미소로 말했다.

"나 또 퇴사했어."


리는 새로 이직한 곳에서 2주 만에 다시 퇴사했다.

그는 그동안 그곳에서 겪은 일들을 말해주었지만, 내게 정리되는 문장은 한 마디였다.

"다시 새로운 직무에 도전하기 위해 퇴사를 결심했어."

그가 이직한 곳은 이전 경력들과 결이 비슷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 커리어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하면 할수록 남겨지는 실체는 없고,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축하해주러 날 불렀지만 그래도 오고 싶었어. 나 사실 요즘 많이 허했거든."

퇴사 후에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은 모순적이다.

새로운 시작을 향해 달려갈 열정과 그동안 쌓아온 시간의 후회가 동시에 사무친다.

리는 커리어 전환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을 맞이했고 동시에 후회가 가득했다.

자신의 인생이 이대로 실패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늘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갈비탕이 처음엔 간이 안 맞는 거야. 그래서 국물을 절반 정도 따라 버리고 새 물로 다시 끓였어."

"너무 아깝다!"

"그래서 이렇게 간이 딱 맞는 진국이 탄생할 수 있었지."

리는 어안이 약간 벙벙한 표정으로 국물을 마저 떠 마셨다.

"어쩔 땐 버리는 것도 중요한 순간이 있는 거 같아. 당연히 후회스럽지."

난 리에게 김치 한 조각을 얹어주며 말했다.

"후회는 가끔 착각을 일으켜. 내가 못난 것처럼. 앞으로 안 될 것처럼."

난 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간적으로 나의 갈비탕 실패기와 감히 연결 지었다.

그의 진짜 마음과 상황을 잘 알지 못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는 그것뿐이었다.

"이 갈비탕도 그런 시행착오가 없었으면 이렇게 맛있게 나올 수 없었을걸?"

난 국물의 절반을 버릴 때, 리만큼은 아니지만 적잖이 실망하고 후회했다.

그동안의 열정과 시간이 버려지는 순간을 참지 못해 나 자신을 원망했다.

그렇게 후회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직 남은 국물 절반에 나의 열정과 시간이 제대로 농축됐다는 것을 못 보게 한다.

그 농축된 마음은 새로운 물과 함께 어느덧 성공의 진국이 된다는 것도 숨긴다.

"착각하지 말자. 우린 스스로 소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어."

나의 일장 연설에 리는 벙찐 표정을 차츰 풀어가며 국물을 쭉 들이켰다.

은은한 웃음소리와 함께 넌지시 말했다.

"나 진짜 소중하네~ 이런 갈비탕도 먹고!"


인생은 모순의 허들을 힘차게 넘어야 하는 달리기 경기와 같다.

지난날들이 후회스럽고 나의 지금이 초라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의 미래에 대한 부담과 불안이 있다면 그건 착각이라 단언한다.

내 안에 농축된 무언가에 집중할 때다.

사람마다 그 무언가는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농축된 무언가에 새로움이 희석되어야 비로소 나는 완성된다.

공허했던 내 마음은 오늘에서야 깊고 든든한 삶의 진리를 맛보았다.


작가의 이전글퇴사 D-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