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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laus Nov 30. 2022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그렇게 더 나은 인간이 된다.

흔히 인간이 먼저 되라고들 하지만 그 누구도 어떻게 인간이 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다소 도발적인 주장을 하자면, 내 생각에 인간이 되는 것, 그러니까 철이 든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인 통념 상에서 하지 말아야만 하는 짓과 해야만 하는 짓을 적절히 할 수 있으면 어지간한 분별력을 갖춘 사람이 크게 욕을 먹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기심이 작동하기에 매 순간 적절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인간성을 잃어버리기는 쉽지 않은데, 다행히도 우리의 사법체계가 그럭저럭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어려움은 “어지간한 상황”과 같은 애매함에서 발생한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이 ‘어지간한 상황’을 그려낸다. 하루아침에 6년간 키워오던 아들이 친자식이 아니며, 동시에 진짜 친자식은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손에 양육되고 있다. 이때 나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만 할까? 주인공인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는 좀 무뚝뚝하지만 그럭저럭 착한 사람이다. 아이가 바뀌었다는 사실에 돈부터 탐내는 유다이(릴리 프랭키)와 유카리(마키 요코) 보다 그는 좀 더 인간다워 보인다. 분명 그는 살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에 지금까지 키우던 아이(케이타, 니노미야 케이타)를 외면하거나 버리지 않는다. 아마 감독은 극적인 의미를 전해주기 위해 료타의 캐릭터를 ‘냉정한 엘리트’로 설정한 듯 하나, 내 생각에 그는 꽤 도덕적인 인간이다. 우리가 강박적 의미에서 도덕성을 인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영화는 비극적 상황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렇게 보면 영화의 핵심은 ‘낳은 정 vs 기른 정’이라는 다소 고루한 딜레마 상황이 아닌 ‘착실히 살아온 사람에게 갑자기 찾아온 비극’에 더 가깝게 보인다. 영화 초반에 찾아온 상황은 료타와 미도리(오노 마치코)에게 큰 충격을 준다. 평안한 일상에 금이 가자 그 틈새로 료타의 냉정하고도 비-인간적인 면모가 나타난다. 아무리 연습해도 늘지 않는 료타의 피아노 솜씨에 근본적인 납득을 하고, 돈으로 류세이(황 쇼겐)를 사겠다는 생각까지도 한다. 료타를 위해 변명하자면, 이러한 행동으로 료타를 매정한 인간이라 매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에서는 제 아무리 괜찮은 인간이라도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지점은 분열적이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료타가 어떻게 수습해 나가는지에 있다.


이 영화에서 료타는 비극적 상황을 딛고 일어선다. 이 점이 중요하다.


처음에 그는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변호사를 통해 조언을 듣고, (아마) 무의식적 말실수를 통해 돈으로 두 아이를 키우겠다고 한다. 여기에는 그의 냉혹함보다는 어설픔이 더 엿보인다. 왜냐하면 만약 료타가 진정 비-인간적인 인간이었다면 고민도 하지 않고 돈과 소송으로 모든 일을 끝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고민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가 괜찮은 인간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고민은 고뇌로 발전한다. 케이타가 자신보다 못한 아버지라 여겨졌던 유다이에 호감을 느낀다는 사실에, 그리고 자신처럼 냉정한 친아버지로부터 혈연이 더 중요하다는 충고를 들으면서 료타는 계속 흔들린다. 그리고 그 절정은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던 아이를 바꾼 간호사 집에 ‘성의’를 돌려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료타는 차분하지만 분노를 담아 이렇게 말한다. “당신 때문에 우리 가족은 엉망진창이 돼 버렸어요.” 이때 그 간호사의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이 튀어나와 료타를 노려본다. “넌 상관없는 일이야.”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현명하다. “상관있어요. 우리 엄마니까.” 료타는 화를 내기보다는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 후 고개를 끄덕인다. 정답을 찾은 것이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살면서 많이들 하는 생각이다. 료타도 그 아이를 만나기까지 그러했다. 이제 상황에 대한 분노는 사그라들고 료타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그는 자기 자신, 특히 아주 깊이 묵혀두었던 감정의 맨 모습을 마주한다. 이후 료타는 자신이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던 여인에게 전화를 해서 사과를 하고 싶다고 한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듯한 장면이다. 그리고 자신과의 대면 이후 변화는 조금씩 시작된다. 류세이는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가출을 시도하나, 료타는 나무라지 않는다. 자기 친자식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일까? 료타는 슬픔에 젖은 눈으로 자기도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가출을 한 적이 있다고 고백을 한다. 그리고 카메라를 살펴보던 중 우연히 케이타가 자신을 찍은 사진을 보게 된다. 처음으로 케이타의 시선을 보게 된 료타는 눈물을 쏟아낸다. 그리고 그는 이로써 이 모든 상황을 끝내기로 결심한다. 


결국 료타는 다시 케이타의 아버지로 돌아온다.


결국 그는 류세이의 아버지가 되지 못하였다. 다시 케이타의 아버지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뀐 것일까? 케이타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이해? 아마도 료타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비록 류세이는 원래의 집에 돌아갔지만 료타는 유다이 가족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한 발자국 멀리서 친자식의 성장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비록 소질은 없지만 아버지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케이타를 계속 예뻐할 것이다. 자기의 뜻에 맞지 않더라도 주어진 상황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시도를 계속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료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였던 본래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료타는 더 나은 인간이 될 것이다.


저들은 더 나은  가족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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