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거하게 먹고 날이 저물도록 낮잠을 잤다. 오랜만의 단잠이었다. 평소에는 탁상달력 일정이 빼곡해서 동으로 서로 분주하게 살아낸 날들이기에 이런 여유가 어색하다. 그래도 주말에 이런 여유라도 있어야지 평일을 또 그런대로 잘 살아낼 수 있겠지!
저녁을 안 먹어도 되겠다는 남편과 밤 산책길에 나선다.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않아 번데기처럼 자신 안으로 스며드는 아이들은 오늘도 집을 택했다. 밤공기가 쌀쌀하게 피부에 와닿지만 생각만큼 춥지가 않았다. 스카프로 목을 돌돌 감았더니 밤 산책도 괜찮게 느껴졌다. 하지만 얇은 점퍼를 입은 남편은 몸을 움츠리며 걸었다. 뒤에서 걸으며 나이만큼 어깨가 수그러드는 남편이 안쓰럽지만 괜시리 핀잔을 준다. “그러게. 좀 두툼한 겉옷을 입으라고 했잖아.” 내 말에 남편은 "그러게, 이제는 좀 더 두툼한 옷을 입어야겠어." 한다.
밤 산책 코스는 아파트 옆 공원을 도는 것이다. 낮엔 더 멀리 걸을 때도 있지만, 밤에는 이곳이 익숙하고 편하다. 남편에게 “오늘은 몇 바퀴 돌거야?”라고 물으니 여덟 바퀴를 돌자고 한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밤에 산책하는 사람들이 부쩍 줄었다. 메타세콰이어도 어느덧 단풍이 들었고 이팝나무는 나뭇잎을 다 떨구고 어두운 밤 하늘 아래 빈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제 서서히 겨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을 돌면서 남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중3인 아이가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써야 하기에 우리의 관심사는 그리로 이어진다. 얼마 전에 갔었던 고등학교 입시설명회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 웃기도 해본다. 남편 지인 이야기도 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는 특별한 주제 없이 물 흐르듯이 오간다. 공원을 돌며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는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걸으니 어느새 두 바퀴, 세 바퀴, 다섯 바퀴를 돌고 있었다.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아이들이 우리 곁을 떠날 날이 떠올랐다. 지금은 이렇게 가까이 있지만, 그때는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했다. 금이야 옥이야 키워도 때가 되면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자기 삶을 찾아 아이들은 떠날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러하듯이 아이들은 자신의 생활로 바쁠 것이고 우리를 자주 잊어버리기도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갈까 생각하니 슬퍼진다. 결국 남는 건 우리 둘이겠지. 하지만 그 시간이 더 단단하고 깊은 동행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날개짓을 익혀서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우리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날아갔을 때 둥지에 남은 우리는 의연하게 살아야겠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을 하며 남편과 이야기를 나눴다. 늦가을의 쌀쌀한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마음 한구석은 따뜻하게 데워지는 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