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렇게 오 남매는 고아가 되었다

by 권영순

엄마와 아버지가 구포리 산을 떠나야 했을 때 두 분이 유독 미적거리신 이유를 그때도 알 것 같았다. 수용된 땅에 대한 모든 권한이 공기업 LH에 넘어갔는데도 아버지는 이사하실 생각이 없어 보이셨다. 그리고 마지막 콩을 수확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가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움직임이 둔해지셨지만 그래도 우리를 못 알아보거나 하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 수리를 하지 못해 집은 두 분처럼 나날이 낡아갔다. 가끔은 LH에서 땅 정지 작업 공사를 이유로 전기가 끊어지고 전화가 두절됐다. 트랙터까지 동원되어 매일 엄청난 흙먼지를 피우며 주변 공사를 해 이주를 종용하는 게 눈에 보였다. 우리는 두 분이 미련을 버리셨으면 했다. 구포리 산을 떠나 조금 더 안전하고 따뜻한 곳에서 마음을 졸이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무슨 권한이 있겠는가' 싶어도 직접 목격하면 이해해 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구순의 노부부만 사는 곳에 중장비를 들이대며 매일 굉음과 먼지를 일으키며 토지 정리를 하는 모습이 어떻게 좋아 보이겠는가? 더구나 서민 임대 주택을 짓겠다고. 그것도 공권력을 이용한 잔인한 폭력일 수 있음을 나 같은 사람도 느끼는구나 싶었다. 엄마 말을 들어보니 아버지의 고집으로 두 분이 옮겨 살아야 할 집을 얻을 돈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적어도 구포리 산에 준하는 땅을 사야 한다는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막내가 해결책을 냈다. 일단 청요리에 창고를 겸한 거처를 마련하기 전에 전세라도 얻어 그곳으로 이사하자고 한 것이다. 막내와 비봉으로 집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전세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막내는 어렸을 때부터 저축하는 게 습관이었던 타입이다. 오죽하면 오 남매 중 유일한 비축형이라고 말할 정도였을까. 부모님의 노후가 걱정되어 모아둔 돈을 낼 테니 집을 보러 다니자고 했을 때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막내 역시 고령에 고향을 떠나 사셔야 하는 부모님을 보는 일처럼 괴로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막내의 도움으로 두 분은 구포리 산에서 가까운 윤경 빌라로 이주하셨다. 지은 지 이십 년 지난 낡은 빌라였지만 구포리 산보다는 나았다. 1층이라 오르내리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익숙한 전화번호 뒷자리로 비밀번호도 설정했다. 그걸 아버지에게 연습시켰다. 구포리 산은 따뜻한 물조차 나오지 않아 엄마를 씻기는 일이 미션이었다. 당시 요양보호사는 도통 엄마를 씻겨 드리지 않았다. 적어도 윤경 빌라는 따뜻한 물이 나와 다행이었다.


두 분은 그곳에서 2018년 한겨울을 나셨다. 그 사이 엄마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셨다. 단기 기억력이 점차 없어졌다. 움직임이 둔해지는 엄마도 문제였지만 아버지까지 나날이 기력이 없어지는 게 눈에 보여 걱정이었다. 그즈음 나는 갈 때마다 요양보호사를 하루 6시간 쓰고 밥이라도 제대로 드시라고 아버지에게 졸라댔다. 따로 보살필 사람이 없으니 그 정도라도 도움을 받자고 주장한 것이다. 모두 그러자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사람을 집에 들이기 꺼리셨다. 지나친 고집도 치매의 일종이라고 하는 말이 떠올랐다. 할 일도 없는데 왜 사람을 들이냐며 역정까지 내시는 데다 억지로 들여도 금방 돌려보내 우리를 낙담시켰다.


친정은 쉬었다 오는 곳이 아니었다. 항상 가 보면 할 일이 너무 많아 허둥대다 엄마와 대화도 제대로 못하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청소기 돌리는 것조차 아버지를 잠시 내 보내고 했다. 치울 게 없다고 주장하시는 데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심지어 청소나 설거지를 하면 역정도 내셨다. 본인이 다 하셨다며.

아버지는 무슨 일인가 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는 분이셨다. 평생 놀아본 적이 없으시니 더 그러셨던 게 아닐까. 아무리 딸이라도 당신이 할 일을 안 한 느낌을 주는 걸 못 견뎌하셨다.


일주일에 한 번 가서 엄마를 목욕시켜 드리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니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돌아왔다. 그 시간이 얼마나 아득하게 힘들었으면 우리 엄마가 딸을 하나 더 낳으셨거나 나라도 딸이 있었으면 덜 힘들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수백 번은 한 것 같다.


그래도 막내는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찾아왔다. 엄마를 모시고 시장도 가고 드라이브도 했다. 아버지는 그것조차 마다했다. 여전히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셨다.


엄마를 보내드리는 장례식장에서 막내의 딸 정후를 만났다. 나는 네 아빠가 심적으로나 물적으로 애를 많이 썼다며 이젠 아빠를 네가 좀 살펴보라고 했다. 토요일이면 빠짐없이 화성을 오가며 부모를 위해 필요한 물건을 사드리고 가는 게 보통 정성인가. 그때 정후가 한 말이 나를 안타깝게 했다. 임플란트를 해야 하는데 싼 데다 예약을 해 놔 좋은 곳으로 바꿔야 한다고 난리를 부렸다고. 딸 말은 들은 모양이다. 덧붙인 말이 나를 더 민망하게 했다. ‘우리 아빠는 너무 자기한테 돈을 안 쓰려고 한다.’고. 오죽하면 딸이 그런 말을 할까 싶었다. 미안했다. 윤경 빌라로 이사하는 비용이나 가구 마련하는 과정까지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걸 직접 봤으니 더 그랬다. 청요리 이주 때도 각종 가구를 같이 고르러 다녔으니 그 비용이 어디서 나왔을까. 그걸 이해한 정후 엄마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나에게 자주 하시던 축원이 있으시다.

‘네가 마음 새가 고우니 자식들이 잘 될 것이다.’

이 말을 막내에게도 하셨을 거라 믿는다. 아무리 의무라도 막내 같은 행동은 쉽지 않다. 그게 내 눈에도 보이니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찌 안 보이겠는가. 엄마 아버지의 인생 말년은 막내로 인해 적어도 자식들에게 외면당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조금도 갖지 않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부모 부양 문제로 다투는 주변 이야기를 듣다 못해 막내 동생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다 놀랐다.


그렇다고 다른 자식들이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셋째에게 그동안 네가 많이 힘들었을 거다, 애썼다고 말했다. 그때 셋째가 한 말도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버지가 정 떼고 가셨어!’

그 말의 의미를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 마음고생을 우리가 왜 모르겠는가. 내가 다른 형제들에 대해 부모님을 보내 드린 이 시점에서도 전혀 원망하지 않는 이유다.


2019년 3월 아버지는 더 이상 엄마를 돌볼 수가 없으니 요양병원으로 옮기란다고 연락이 왔다. 요양병원은 엄마가 원하시는 곳이 아니었다. 걸어서 들어갔다 죽어야 나오는 곳을 누가 가고 싶겠는가? 다른 대안을 찾으려 하지 어느 자식이 보내고 싶을까. 하지만 우리에게 대안이 있을 리 없었다.

엄마는 그 요양병원에서 겨우 한 달을 버티다 돌아가셨다. 내가 면회를 가면 집에 가고 싶다고 집에 데려다 달라고 애원하셨다. 애원하던 엄마의 모습이 쉽게 잊힐 리 없다. 그게 지금도 가장 마음 아프다. 아버지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요양병원에서 엄마의 낙담은 얼마나 깊으셨을까? 어느새 우리 사회는 마지막 죽고 싶은 자리를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권리가 엄청난 사치가 되어 버렸다. 내 죄책감의 원천은 거기에 있다. 나는 엄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했다.


요양병원에서 엄마를 면회하면 곧바로 윤경 빌라에 들러 아버지 먹거리를 챙기고 청소를 한 다음 서울로 돌아왔다. 그 길은 항상 마음이 공허한 데다 죄책감에 허둥거렸다. 깊은 우울감에 몸은 바닥을 칠만큼 지쳐갔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아버지는 구포리에 그나마 남아 있던 미련을 버리신 것 같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가꾸던 구포리 땅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모습을 직접 보신 적이 있다. 산 아래 있는 신작로를 지나가게 되자 이 길로 가기 싫은 데 왜 왔냐며 운전을 하던 요양보호사에게 화를 내시는 걸 봤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그런 마음이 이해됐다. 나 역시 그 길을 지나가기 싫은데 아버지는 오죽하셨을까.


아버지는 본인 소원대로 청요리로 이주하셨다. 너무 외진 곳에 교통도 나빠 난감했다. 2018년 후반기부터 남편은 70이 넘어 새로운 일거리를 찾았다. 아파트 청소 업체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하는 장소는 랜덤이었다. 집에서 두 시간도 더 걸리는 화성 오이도나 용인의 한적한 곳으로 가게 되면 새벽 5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남편에게 쉬는 날 화성에 오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제일 난감한 건 교통편이었다. 버스나 전철을 네 번 갈아타고 다녀야 했는데 문제는 청요 사거리에 내려 걸어가야 하는 불편함이었다. 아버지 드실 것을 배낭에 지고 30분 이상을 인도가 없는 차도를 걸어 태행산 방향으로 올라가야 했다.

걷는 것보다 힘든 건 그 도로가 유달리 덤프트럭이 많이 다니는 길이었다는 점이다. 좁은 도로에 대형 덤프트럭이 질주하듯 지나가면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작은 아들이 한 번 데려다주더니 진심으로 화를 냈다. 차도 없는 엄마가 이렇게까지 하며 할아버지에게 다녀야겠냐며.

2017년 내게 공황장애가 왔다. 심리적인 문제였다. 문제는 공황장애 순간이 하필 작은 아들을 보러 영국에 갔을 때 왔기에 그 심각한 과정을 아들이 봤다는 데 있다. 갑자기 뭘 먹지도 못하고 지하철도 비행기도 겁을 내고 두려워하는 모습에 심각하게 놀란 것 같았다. 항상 씩씩하고 건강한 모습만 보이던 엄마가 그렇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작은 아들도 충격을 받았을 터였다. 다행히 심리 치료로 좋아졌지만 그 일 이후 작은 아들도 내 건강에 예민하다. 정후도 아빠인 막내의 건강 상태에 예민하다. 인하 역시 아빠의 건강 문제라면 심각하게 반응한다.


청요리로 이주하신 초기 아버지는 밭에 풀을 뽑는 등 나름 정착에 대해 열성을 보이셨다. 다음 해에 무엇을 심을 것인지도 생각하시고 심지어는 재봉틀도 꺼내 달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삶의 의욕을 되돌리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느 날 가 보니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문단속도 소홀히 하시는 게 눈에 띄었다. 막내가 일부러 사다 드린 병아리 다섯 마리가 하루 밤에 다 죽고 한 마리 남았는데 그것조차 물이나 먹이를 제대로 챙기지 않으셨다. 나는 아버지의 상태가 갈수록 심각하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을 데워 목욕을 시켜드리다 날이 추워지면서 아버지를 모시고 근처 화성 온천으로 갔다. 창고에 들인 화장실에서 목욕을 시켜드리기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남편은 12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일거리가 없어 쉬어야 한다. 그래서 초봄까지는 아버지를 모시고 온천을 다닐 수 있었다. 노환의 아버지를 모시고 공중목욕탕을 갈 수는 없었다. 코로나도 문제였다. 다소 돈이 들더라도 가족탕이 답이었다. 온천에 모시고 다니는 데도 남편의 도움이 컸다. 사실 아버지를 모시고 오가고 씻겨드리는 일에 내 역할은 보조였다. 지금도 남편은 아버지를 모시고 온천을 다닌 일이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뭘 그런 곳을 가느냐고 하시면서도 사실은 좋아하셨다고 말이다. 워낙 씻기를 즐겨하시지 않았더라도 온천을 좋아하신 게 눈에 보였다고. 아직도 느긋하게 탕에 들어가 땀을 내시는 모습이 아른거린다며.


엄마를 공중목욕탕에 모시고 가는 대신 온천 가족탕을 이용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많이 후회했다. 엄마라면 특히 더 좋아하셨을 텐데. 왜 공중목욕탕의 위험성만 생각했는지 그게 아쉬웠다. 그때는 협조를 해 주지 않는 요양보호사에게 화가 났다. 자기는 그런 위험을 무릎 쓰기 싫다며 단호히 거절해서 말이다. 결국 그런 일에 나서야 하는 건 자식들인 모양이다.


20년 4월 말 아버지도 청요리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화성 해인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남양에서 사당을 오가는 버스는 두 대다. 1002번과 1008번 좌석 버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나는 1008번 버스를 타는 걸 피해왔다. 1008번은 화성 해인 요양병원 앞을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인터벌이 너무 길어 할 수 없이 1008번을 타더라도 요양병원 근처에서는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낸 엄마의 모습이 너무 괴롭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곳에 아버지를 다시 모셔야 한다는 데도 반대를 할 수 없었다. 결국 그게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두 달을 채 버티지 못하시고 아버지는 결국 운명을 다하셨다. 청요리에 갈 때마다 알려주신 자리가 있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그곳에 묻어달라고. 태행산 끝자락에 있는 그곳을 아버지는 왜 택하셨을까. 일부러 삼각대를 세워 놓고 지정한 장소에 우리는 아버지를 모시지 못했다. 유언도 끝까지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다.


태행산을 등지고 논길과 도로를 따라 청요 사거리로 버스를 타러 나설 때마다 항상 뒤에 남겨둔 아버지의 그림자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혹 이게 마지막은 아닐까? 입원하시기 전날은 유별나게 온천을 안 가신다며 힘이 없다고 해서 간단히 침대 앞에서 머리를 감기고 발을 씻겨 드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사들고 간 호박죽도 달달한 케이크도 그날따라 드시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으시는 데 막연한 불안감이 차올랐다.

주변 정리를 대강 해 놓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왜 그날따라 더 무거웠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 얼굴을 다시 보지 못했다. 코로나로 면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집에서 아버지의 소식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기다린 거나 마찬가지다.


2020년 6월 24일 아버지는 한 많은 인생을 마치셨다. 그렇게 오 남매는 고아들이 되었다. 부모님 두 분을 모두 보내드리고 말이다.

지금은 이 모든 일들이 마치 오래전 이야기같이 느껴진다.

현실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두 분이 이제 세상사 모두를 놓고 편안히 잠드시기를 오래오래 기원드린다.


<큰오빠의 아버님에 대한 단상>

1. 정직은 할아버님 이래 기본적인 가풍. 장사에 능하지 못한 것도 그 영향이라고 봐

2. 성실하신 것도 할아버님 이래 아버님이 이으신 성품.

3. 사회정의에 대한 열정. 초년에는 출세에 대한 야망이 크셨지만 그것이 좌절된 후에는 정의에 대한 갈망이 크셔서 언제나 민주당 편이셨지. 특히 노무현대통령을 좋아하셨던 것은 당신의 꿈을 투영하신거 아닌가 해.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위한 국민연합 충남 고동대표를 한 것도 그 영향.

4. 평등한 사회에 대한 호감.

어려서 기억에 아버님은 항상 우리집에서 일하는 분들과 겸상을 하셨어.

625 때 청년위원장 하신것도 추대도 있었지만 당신의 의사도 없진 않았다고 봐.

그 당시 당위원장은 북에서 온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아버님은 인테리라 임시이고 장래는 농민 노동자가 그 역할을 대신 할거라고 했대. 그래서 아버님도 임시로 맡는거라고 생각하셨고.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농민으로 초청받아 참석하신 생전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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