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리와 틀

눈꺼풀 바라보기

​현대인은 눈을 뜨고 있어도 정작 본질은 보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알고리즘이 설계한 빛의 파동에 시선을 내어줍니다. 스마트폰의 작은 사각형 안으로, 혹은 타인의 화려한 일상 속으로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흩어집니다. 시선이 밖으로만 쏟아질 때, 우리는 세상을 관조하는 주체가 아니라 세상에 의해 읽히는 데이터 조각으로 머물게 됩니다.

​우리는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스스로 생산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시점이 외부에 고정된 채 행하는 모든 지적 활동은 사실 알고리즘이라는 거대한 지주(地主)의 창고를 채워주는 ‘인지적 소작농’에 머무를 때가 많습니다. 애써 얻은 통찰과 소중한 시간은 플랫폼의 힘을 키워주는 재료가 되고, 정작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공허한 도파민의 흔적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현대판 예속의 삶입니다.

​이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고도 물리적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눈꺼풀’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잠시 눈꺼풀을 반쯤 내려보십시오. 외부의 선명한 형체들이 흐릿해지는 그 경계면, 즉 내 몸과 바깥세상이 만나는 그 얇은 막에 시선을 멈추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화면에 몰입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내가, 눈꺼풀이라는 커튼을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세상을 보고 있는 나’라는 독자적인 시점(Perspective)으로 깨어납니다. 세상이라는 스크린에 코를 박고 있을 때는 결코 보이지 않던 '관찰자로서의 나'를 자각하는 것, 이것이 예속의 신분을 벗어나 주인의 자격을 회복하는 첫 번째 걸음입니다.

​이렇게 찾은 시점을 이제 내면의 가장 깊고 고요한 곳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그곳은 외부의 간섭이 닿지 않는 주인의 자리이자 귀족의 자리이며, 세상의 문을 여닫는 회전축인 지도리(樞)가 자리한 곳입니다.

​지도리는 문 전체를 지탱하지만 스스로는 요란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문이 아무리 거세게 흔들려도 결코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오히려 문이 더 큰 원을 그리며 조화롭게 회전할 수 있도록 부동(不動)의 축이 되어줄 뿐입니다. 복잡한 세상 조차 이 견고한 지도리 앞에서는 그저 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풍경이 됩니다. 우리가 이 귀족의 자리를 유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 끌려가는 소작농이 아니라 세상을 조화롭게 이끄는 주인이 됩니다.

​지도리가 바로 서면, 비로소 세상을 여는 (機 ,기틀)가 우리의 손에 쥐어집니다. 틀은 무언가를 터지게 하거나 열리게 하는 장치를 뜻합니다. 지도리에 자리한 시점은 이제 분명한 의지가 되어 외부를 향합니다. 인공지능이나 방대한 지식은 우리가 지도리에 앉아 이 틀을 당길 때만 바르게 작동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주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흩어져 있던 데이터들은 생명력을 얻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자산으로 재편됩니다.

​결국 삶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지식을 쌓았느냐가 아니라, ‘어디서 세상을 바라보느냐’는 시점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부릅뜬 눈을 잠시 거두고, 눈꺼풀이라는 경계를 응시해 보십시오. 이제 그 뒤편 고요한 자리에 우리의 지도리를 세우고 주인의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반쯤 감긴 우리의 눈꺼풀이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세상을 걸러내는 가장 따뜻한 개인 방화벽이며, 그 눈꺼풀을 바라보는 내면의 중심이 우리의 시점이 됩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비로소 우리의 선한 의지를 트개로 투영하는 화엄의 바다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