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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 Oct 17. 2024

승아의 겨울

9화

승아는 요즘 들어 부쩍 일찍 일어난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여유 있게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 밤새 여있 공기를 내보 후 새벽의 찬 공기를 한껏 마셨다. 밥솥의 추가 쉭쉭 돌아가는 동안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적당히 배를 채운 다음엔 온몸 구석구석 빠진 곳 없이 안마 했다. 일련의 행동들을 부지런히 해내는 동안에도 승아의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8년, 돌아보니 아주 짧행복이었다. 멈추지 않고 쭉 이어질 줄로만 알았는데. 이미 마음을 접어버린 연인 관계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승아는 다 알고 있었다. 승아가 영보와 연애를 하는 동안 친구들이 두세 번씩, 많게는 다섯 번도 넘게 연애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갖가지 이유로 이별하여 밤새 울고불고 괴로워하던 친구들을 다독여주면서 사랑을 마무리하는 방법을 많이도 배워왔다. 하지만 보고 들은 것들은 소용이 없었다. 이미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알고 있지만 정작 승아 본인의 헤어짐에는 전혀 적용시킬 수 없었다. 몰라서도 아니고 하기 싫어서도 아닌데. 억울하면서도 원망스러운 기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를 영영 지 못해도 좋으니 제발 보통의 기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며 출근 준비를 하는 승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승아는 눈물을 닦아내며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하루종일 비워져 있던 집은 밤이 되어서야 다시 온기가 돌았다. 승아는 보일러의 온도를 높이고 가습기도 세게 틀었다. 온 방이 하얘지도록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승아는 자신의 머리에 박힌 온갖 생각들이 수증기와 같이 섞여 날아가길 바랐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탓하였다. 아무리 영보가 허락하였어도 취미생활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에만족했어야 했다. 승아도 영보가 어떤 여자와 단둘이 강아지 산책을 다닌다고 생각하면 싫었을 것 같다. 승아와 진대리 둘 다 서로에게 연애감정이 없더라도 주위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미스터리우스도 너무 잘생겼다. 좀 평범한 외모였더라면 달랐을까. 승아는 거실 구석에 있는 실내자전거 위에서 힘차게 발을 굴렸다. 아니, 차라리 회사 재계약을 하지 말걸 그랬다. 그렇다면 구직 활동을 하느라 바빠서 미스터리우스 영상은 발견하지도 못했을 텐데. 그냥 혼자 방에서 코난이나 돌려봤으면 됐을 텐데. 더운 방에서 자전거를 타니 얼마지 않아 땀이 쏟아졌다. 승아는 흐르는 땀을 닦지도 않고 그냥 떨어지게 놔두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둘이서 만들어간 8년간의 신뢰를 한순간에 린 것은 영보였다. 명백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그저 승아가 영보 곁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모습이 보기 싫다는 이유로, 그 어떠한 조율의 과정도 없이 혼자 대로 결론을 내버렸다. 승아는 연인을 자신의 모든 것을 만족시켜 줄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연인이 채워줄 수 없는 욕구들, 우정이나 호기심, 사색과 여유, 이런 것들은 스스로 채워나가야 부분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연인의 자질 부족 때문이 아니라 원래부터 사랑과는 카테고리가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보는 사랑하는 연인의 영혼 전부를 책임지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고자 했던 것 같다. 승아에게 우정과 호기심, 사색과 여유가 없더라도 영보의 사랑 하나면 그녀 완벽히 충전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그녀의 100%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믿었던 것 아닐까.


승아가 생각하기에 사랑은 그런 마같은 무언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기에 서로를 대하는 태도만이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존중하는 말투를 사용하는 것, 예의 바른 행동을 하는 것,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활동을 지지하는 것으로 서로가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려고 했다. 눈만 마주쳐도 불타올랐던 사랑의 초입을 지나고 나서는 이런 것들이 엇보다 중요한 하트시그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만 보면 영보는 승아를 전혀 존중하는 것 같지 않았다. 혼자 결정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방식은 에서조차 난받을 행동이었다. 하물며 8년을 함께 지낸 연인라면 서로 조정하고 마무리할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주어야 하는  아. 결론을 달리할 가능성을 애초부터 닫아놓 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하는 처사다. 이런 사람과 영원을 맹세하 것은 너무나 모험 아닌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라면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할지 같이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불편한 감정을 마주하기 싫어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사람과는 생을 동반하기 어려울 것이다. 거, 지금이라도 헤어진 것을 감사해야 할 것만 같다.


야군은 전과 달리 부지런히 움직이는 승아에게 시끄럽다고 항의하듯 야옹거렸다. 평소처럼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나 쳐다보라옹. 승아는 꼬리를 탁탁 치며 누워있는  세상일 다 아는 듯한 고양이에게 인생상담이라도 받고 싶 기분이었다.


"넌 그간 나에게 해줄 말이 참 많았을 텐데, 내가 이해를 못 해서 답답했지? 결국 내가 직접 겪어 봐야만 알 수 있는 건가 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아니,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내가 정할. 나 이번 일은 좋은 이별이라고 정하려고. 미래의 나를 더 잘 살게 하는 좋은 이별. 나 이렇게 계속 살아가도 되는 거지, 야군?"


돌아오는 건 야옹 소리뿐이고 야군은 털실로 짠 방석으로 가 식빵을 구웠다. 승아는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렇게 자고 일어나면 또 아침밥을 해 먹어야지. 왠지 내일은 알람 울리는 소리에 눈을 뜨게 될 것만 같다.       

 

- 1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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