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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연 Oct 15. 2024

책갈피는 하얀 봄에, 10.

10. 우리 함께

그를 향한 애틋함이 물기 머금은 꽃처럼 만개해, 숙소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감정에 촉촉하게 물이 오르고, 영혼에는 화려한 꽃 향이 짙게 배어들었다. 미희는, 머릿속이 온통 꽃밭이 되어, 어떤 생각도 쉬이 할 수 없었다. 붉게 익은 얼굴을 한 그녀는 오후 일정 없이 숙소로 되돌아왔다. 촬영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던 탓이다.     


생각보다 이른 귀가에 주인아저씨는 괜찮냐고 물어왔지만, 미희는 마땅한 답을 찾기 어려워 입을 닫았다. 괜찮은 건지, 아닌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평소와 달리 뛰는 심장 소리를 들킬새라, 그녀는 방에 들어가 괜히 짐을 정리했다. 둘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되물음에, 태수가 괜찮다고 늦은 대답을 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건지, 그렇지만 괜찮다는 건지. 아니면 아무 일도 없다는 건지 해석하기 나름인 애매한 답에, 아저씨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태수는 아저씨를 도와 작업실을 청소하러 공방으로 향했다. 수줍음을 견디며 미희는, 뒷마당으로 향하는 그를 창문을 통해 바라보았다. 미련 없이 생을 놓아버리려던 그가, 다시금 삶의 활력, 그리고 옅은 행복을 느끼게 된 것은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마음에 두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그녀는 재차 되새겼다. 켜켜이 쌓여가는 생각 중, 기적과도 같이 얻은 이번 생, 또 다시 남편과 함께해서는 안 된다는 결심이 지배적이었다. 남편이 생을 포기하지 않도록 가까이 머물겠지만, 전생과 같이 사랑을 해서는, 그와 결혼을 해서는 그렇게 아이를 낳아선 안돼. 예정된 결말을 익히 아는 미희는, 책의 마지막 장을 먼저 읽은 탓에 괴로움을 꿀꺽 삼켰다.     


선을 지키는 거야. 

그렇게 그이의 삶을 지키는 거야.  

   

미희는 조금 울고 싶은 기분에, 눈을 감았다. 목에 걸린 울음 조각이 뜨겁게 영혼을 태우는 기분. 한참 그슬려진 생각과 감정을 삭히는데, 창 밖으로 남편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미희는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가 고무호스로 화단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꽃잎에 닿아 물방울이 튀어오르고, 그럴수록 태수의 웃음도 한 톤 높아졌다. 미희는 꽃 속에서 즐거워하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던지 태수는 창을 통해 미희를 알아차렸다.     


“밖으로 나와요.”    

 

미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굴하지 않고, 태수는 밝고 건강한 목소리로 다시금 함께하길 권했다. 그는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며, 활짝 미소지었다.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나와서 이 햇살 아래 서봐요. 저 꽃들처럼.”     


속이 투명해 보일 정도의 함박웃음에, 미희는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견고히 쌓아 올렸던 냉정과 각오들이 간신히 허물어지고, 미희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그래, 꽃들처럼. 미희는 작게 중얼거렸다. 우울한 생각은 그만두고, 햇살 아래의 꽃들처럼. 두 손 가득 쥐고 있던 슬픔을 이미 모두 놓아버려서, 미희는 그로부터 유쾌한 즐거움만을 건네받았다. 가볍고도 밝은 색의 감정이, 찬란한 햇빛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었다.      


“여기 있는 모든 꽃 중, 미희씨가 가장 예뻐요.”     


옷이 다 젖도록 화단 가득 물을 뿌리는 남편을 보고, 미희는 미소지었다.      


당신도 예뻐. 

젊고, 또 밝고.      


아주 예뻐.     


미희는 천천히 그에게 향했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운명이라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미희는 생각했다. 그녀의 걸음, 그 방향을 보고 태수는 두 팔을 벌렸다. 검은 고독 속 오래 전부터 홀로 서 있던 사람처럼, 태수는 빛을 뒤집어 쓴 미희를 기쁘게 반겼다. 햇살로 범벅이 된 미희는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태수는 고무호스를 쥔 손을 아래로 떨구고, 나머지 빈 손으로 미희의 등을 감싸 안았다. 젖은 그의 옷 너머,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미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흐느껴 우는 미희를 그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얼렀다.      


“내가 이마에 입을 맞춰서, 기분이 안 좋았던 거죠?”     


태수의 물음에 미희는 두 눈을 부비며, 소리 내 울었다. 아냐, 당신의 입맞춤이 싫었던 게 아냐.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미희는 설명하지 못할 전생의 기억들을 탓하며 연신 훌쩍였다. 태수는 고무호스를 바닥에 떨구고, 두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심장과 맞닿은 자신의 심장이 서로 공명하듯 같은 빠르기로 뛰었다.   

   

“그렇다면 미안해요.”

“아냐, 그런 게 아니야.”     


미희는 눈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태수는 여전히 일렁이는 짠물 안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파서, 또한 서러워서 미희는 태수의 뺨을 감싸쥐고,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남편에 대한 거센 감정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미희의 목에 내내 걸려있던 슬픔 조각이, 서로의 입 안을 넘나드는 마음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희는 영혼의 밑바닥까지 서서히 퍼져나가는 농밀한 감각에 눈을 감았다. 


나의 사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랑.     


그녀의 입맞춤에, 태수는 흠칫 놀라는 듯 했지만, 행동의 이유를 찾기보단 눈을 감고 애틋함을 나누는데 집중했다. 여린 햇살이 젖은 꽃잎을 매만져, 삶의 고독, 그 우울한 물기를 모두 거둬갈 정도의 시간이었다. 손목에 찬 시계에서 초침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찰나보다는 영원에 가까웠을 것이다.     


입술을 떼고, 몸을 천천히 떨어뜨리자 그는 미희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의식하지 못하는 듯 했으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미희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그래서 놓아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태수는 미희의 두 눈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동공은 깨끗하게 느껴질만큼 새까맸다.      


“미희씨, 내 삶은...”     


태수는 손에 힘을 풀지 않으며, 이어 말했다. 자신을 잃어버릴까 애처롭게 갈망하는 그를 미희는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당신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입맞춤 후 고작 한 뼘 가량 몸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그 간격마저 괴롭다는 듯 태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미희는 그런 그의 애달픔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이런 사람을 두고, 어떻게 떠날 생각을 했었을까. 미희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은 감정의 이름을 분명히 외치고 있었다.    

  

수돗물을 끄기 위해 아저씨가 공방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다면, 또 다시 입을 맞추고, 또 맞췄을 거라고 미희는 생각했다. 그마만큼 마음 결이 고르지 않았다. 마당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본 아저씨가, 깜짝 놀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기에, 미희도, 태수도 아쉬움 역력한 얼굴로 몸을 간신히 떨어뜨렸다. 한참 눈치를 보던 아저씨는, 공방에 들어와서 작업을 도와주지 않겠냐고 물었다. 아저씨가 어찌나 쭈뼛거리는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공방에 들어섰다. 못쓰게 된 흙더미를 하나로 합쳐서 덩어리지게도 만들고, 가마에 불도 뗐다. 엉망이 된 삶을 하나로 합쳐서 새로운 날을 꿈꿔보았고, 가슴 속에 열기도 지폈다. 물 양동이의 흙탕물을 비웠고, 깨끗한 물을 가득 채워 놓았다. 우울과 불안을 지우고, 영혼을 온통 긍정으로 채웠다. 미희는 가마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적당히 따뜻한 온기가 기분 좋았다. 태수 역시 그녀 곁에 나란히 앉았다. 흠뻑 젖었던 옷은 가마의 열로 보송하게 말라갔다. 침묵을 지키던 남편이 입을 뗐다.    

 

“미희씨, 내가 아까 하려던 말은...”

“알아요, 어떤 말을 하려던 건지.”     


그의 말을 자른 미희는 태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머릴 기댔다. 가마 속의 불길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두운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일렁이는 아름다움 앞에서 미희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미희는 태수의 심장 소릴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 귀한 사람을, 내 삶의 보물을 무심히 버려둘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남편의 삶 속에 들어가리라. 우리 전생처럼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지는 않겠지만. 그가 삶을 포기하려 할 때마다, 어둠 속에 깊이 침잠할 때마다 기꺼이 불꽃이 되리라.     


자신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미희를, 그는 가만가만히 느꼈다. 하얗고 작은 손으로 어떠한 각오를, 굳은 결심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태수는 옆자리의 미희만 겨우 들리도록, 자그맣게 속삭였다.     

 

“내 삶에 나타나 줘서 고마워요.”     


미희는 눈을 감고서, 옅게 미소지었다. 전생, 고달프긴 했어도, 당신이 있어서 큰 의미가 있었어요. 미희는 꺼내지 않은 마음의 말을, 영혼의 가장 여린 곳에 담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진심이 입술에 소리없이 맺혔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번 생도 우리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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